카테고리 없음

고산지 팀의 앙코르 여행기 - 44 * 프레아 코 사원

高 山 芝 2013. 12. 2. 22:15

                                                                                         위치보기

 

▷건축시기 : 879년
▷건축왕 :
인드라바르만 1세(Indravarman I, 877~889)
▷종교 : 힌두교
▷건축양식 : 쁘레아꼬

위치
롤루오스 유적군내. 롤레이와 바콩 사이

명칭 : 쁘레아란 크메르 어로 "신성한", 꼬는 "소" 즉 "신성한 소"라는 뜻으로 중앙탑에 놓인 황소상 때문에 된 이름이다. 

형태 화장터와 무덤을 갖고 있는 장례전이지만 어두운 느낌은 없이 아름다운 사원 이미지가 강하다. 3겹의 담에 에워싸인 사원으로 이승계와 저승계 방향인 동문과 서문 뿐이며 지하세계와 보다 가깝게 하기 위해 높이를 최대한 낮추었다. 무엇보다 불규칙적이고 비대칭적인 배치가 특이한 사원이다.

개요 : 새 도읍지 하리하랄라야에 들어선 최초의 사원이란 점에서 의미깊다. 인드라바르만 1세의 조상과 선대왕의 영혼을 기리는 왕가의 장례전(葬禮殿)으로 쉬바 신에게 봉헌했다. 중앙 성소의 6개의 탑은 각각의 조상의 무덤으로 세웠지만 실제로 그 탑에 시체가 안장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단지, 자신을 즉위시킨 조상의 영광을 기리고 조상의 영생을 기원하는 공묘(空墓)일 것으로 추정한다.

감상 :

①외벽과 탑문 : 세 겹의 담에 둘러 쌓이고
외벽이 400mx 500m나 되는 큰 사원이지만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실제로는 작아보인다. 외벽에는 동쪽과 서쪽에 탑문이 나 있으나 동쪽탑문만 출입구로 사용한다. 작은 테라스가 동쪽 탑문으로 인도하는데 테라스는 거의 유실되었다. 동쪽 탑문에는 사암으로 곱게 빚은 기둥과 문틀을 가진 창문을 마치 나무 질감을 내듯 정교하게 장식했다. 동쪽 탑문을 지나면 해자 역할을 하는 긴 보도가 사원을 에워싼 내벽으로 연결된다.

②건물잔해 : 보도 좌우로 갤러리를 가진 직사각형 건물들이 대칭하여 서 있지만 대부분 유실되어 잔해만 남아 있다. 남쪽 갤러리 건물 아래쪽의 건물은, 원래 크메르 건축물은 좌우대칭형을 중요시하는데 이것만 홀로 서 있는데, 확실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건물 위쪽에 환기를 목적으로 낸 숭숭 뚫린 구멍을 보건데 화장터가 아닌가 한다. 구멍 위쪽에도 벽감을 넣어 장식한 걸로 보아 예사로운 용도가 아닌 듯하다.

③내벽과 탑문: 내벽에도 동쪽과 서쪽에 탑문을 갖고 있다. 탑문은 단순히 기둥만 가진 심플한 양식이며 상인방(문틀위)에는 가루다(독수리)를 탄 우주 질서 유지의 신 비쉬누가 조각되어 있다. 입구의 계단 모서리를 월장석 모양으로 다듬었는데 월장석은 남녀간의 애정을 돈독히 하는 의미를 가진 탄생석으로 이것은 하늘에서도 조상들의 부부 금슬이 좋음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또 동쪽 탑문에선 이 사원에 대한 기록 비문이 새겨져 있다.

④황소상 : 내벽의 탑문을 들어서면 이 사원의 이름이 된 성스런 황소 상 세 개가 있다. 이 신전은 쉬바 신에게 봉헌되었으며 쉬바 신은 난디(Nandi)라는 흰색 황소를 타고 다닌다. 좌우로 사암으로 빚은 사자상이 버티고 선 계단이 중앙성소로 연결된다.

<생명의 어머니 난디>
난디는 힌두교인들에게 사랑 받는 흰색 황소로서 쉬바 신과 번개의 신이자 최강의 파워를 가진 인드라 신과의 싸움에서 난디는 주인을 대신하여 싸워 승리했으며 농업을 주로하는 인간들에게 경작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는데다가 뭍 짐승들의 보호자에 생식과 종족 번영의 상징으로서 숭배되어 '생명의 어머니"로 숭배받는데 힌두교 특히 인도에서 오늘날까지 흰색 소를 숭배하여 일을 시키지 않는 것도 바로 난디 숭배사상에서 비롯된다. 
 

⑤중앙성소 : 여섯 개의 탑이 얹혀진 성소는 대단히 독특하다. 구조도 여느 사원과 다르며 배치도 듬성듬성, 크기도 뒤죽박죽이다. 탑은 2열로 세워져 있으며 앞쪽열의 세 개의 탑 중 가운데 탑이 가장 크고 나머지 두 개의 탑 보다 중앙으로 툭 튀어 나오게 배치했다. 또 뒤쪽 열의 세 개의 탑 중 위쪽 두 개만 붙혀 놓고 나머지 한 개는 띄워 놓은 데다가 붙은 두 개의 탑 중 가운데 탑은 앞열의 큰 탑쪽으로 바싹 붙혀 놓았다. 계단도 동쪽에는 세 개, 서쪽에는 한 개만 나 있다

이러한 구조와 크기에 대한 해석을 하자면
탑들은 조상들의 묘이며 영혼들은 지하 세계에 거주하므로 가능한한 땅에 가깝게 최대한 단을 낮추었고(신전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데 반해) 
네 방향으로 난 탑의 문에 새겨진 부조로 남녀의 묘를 구분케 했다. 앞쪽 묘의 문에는 남자 수문장이 그려져 있으므로 남자들의 묘이며(선대 왕 또는 인드라바르만 1세의 부 또는 외조부), 뒤쪽 묘의 문에는 여신들이 새겨져 있으므로 여인(선대왕의 비 또는 인드라바르만 1세의 모 또는 외조모)이다. 왕의 묘는 왕이 아니었던 인드라바르만 1세의 조상묘보다 크게 짓고 또 남자들의 묘는 여인들의 묘보다 크다. 가장 크고 가능한한 가장 중앙에 놓으려는 앞열의 가운데 묘는 크메르 왕조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의 묘로 확정 추정한다. 따라서 뒷열 가운데의 여인묘가 왕의 묘에 바싹 붙은 것으로 보아 자야바르만 2세의 왕비묘임을 알게하며 지하세계에서도 금슬을 좋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쁘레아 꼬 묘의 주인들>

1대왕     자야바르만 2세와 왕비
3대왕인  인드라바르만 1세의 부모
             인드라바르만 1세의 외조부모

크메르 왕조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는 이곳 하리하랄라야로 도읍을 정해 천도했고 그 아들인 자야바르만 3세가 즉위했으나 적들의 침범이 끊이지 않아 자야바르만 3세는 외적에 대항하여 싸우느라 또 새 왕조를 키워나가는데만 주력하여 후계자가 없이 사망했다. 비워진 옥좌는 인드라바르만 1세의 외할아버지가 장악하여 당시 적군에 맞서 용맹스런 지휘관로 크메르를 승리로 이끈 외손자 인드라바르만 1세에게 내주었다. 즉 인드라바르만 1세의 즉위는 외가의 도움에 의해서였고 인드라바르만 1세는 선대왕과 함께 부모와 외조부모를 나란히 안치한 사원을 지어 바쳐 그 영광을 돌렸다.

쁘레아꼬 건축 양식의 핵심은 벽돌 위에 석회를 두텁게 발라서 그 위에 부조를 새기는 것과 문의 상인방(문틀위)에 의미로운 신화 부조를 새겨넣는 것이다. 탑들의 기둥들은 나뭇잎이나 꽃잎 또는 기하학적인 무늬를 넣어 장식하고 고리 모양으로 엮어 밋밋함을 없앴고 수문장이나 여신 부조 또한 잿빛 사암이나 붉은 벽돌과 조화를 이루게 세심하게 배려했으며 특히 동쪽 탑에 새겨진 수문장 부조는 크메르 부조의 우수함을 알게한다. 남서쪽 탑에 새겨진 여신은 길다란 줄기의 연꽃을 들고 서 있어 락쉬미 여신이 아닌가 한다.

쁘레아꼬는 "의미"에 상당한 중요성을 두는 듯 각 탑의 상인방에는 힌두 신화에 등장하는 수호신이나 영물들을 새겨 영혼들을 수호케 한다. 사원과 탑의 수호신인 칼라(Kaka)의 귀면상(
鬼面像), 뱀 위에 탄 형상과 마부, 작은 머리들에 둘러싸인 가루다(천상의 독수리), 바다 영물 마카라(Makara, 초기 힌두신화의 우두머리로서 아버지의 의미를 가진 바루나 신이 타고 다니는 바다 짐승) 같은 부조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copyright ⓒ magicbu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