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수필 은혼식 기념 대만행기

영상수필 - 대만여행기 - 2

高 山 芝 2014. 12. 2. 10:30

 3세기 중엽 중국의 삼국시대 때 심형(沈瑩)이 저술한《임해수토지(臨海水土志)》에서는 타이완을 이주(夷州)로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문헌 기록으로 거의 초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주라는 명칭을 두고 타이완 섬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이견도 있다. 7세기 초 수(隋)나라 때부터 한족(漢族)이 타이완을 정찰정략(偵察征略) 시도하였으며, 타이완을 유구(流求)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유구는 현재의 오키나와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시에는 구분없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元)은 1360년 펑후섬[澎湖島]에 처음으로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지만 타이완은 관할에 두지 않았다. 명대(明代)에 이르자 해상무역과 해적활동을 하는 한족의 정착이 늘어났고 동시에 동방무역에 나선 서구의 열강도 타이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명나라는 타이완을 행정 관할에 두지 않았고 원주민과 한족,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각자의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타이완을 통치하는 기구나 세력은 없었다.

 첫번째 방문지 : 忠烈祠 - 중국 궁전식의 호화로운 건물로 중화민국 국민혁명을 위해 순국한 장병 33만여명의

영령을 모신 곳으로 근위병 교대 시 제식동작이 일품이다

 

1590년 동방무역을 위해 이곳 해역으로 진출한 포르투갈인이 타이완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르모사(Formosa)라고 명명하였다. 1616년 일본인들이 대만을 점령하려다 풍랑으로 수천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후 네덜란드가 타이완 남부에 정착하였는데 그들의 목적은 동방무역을 위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앞서 정착한 한족을 누르고, 이곳에 무역기지를 건설하였다. 1624년 안핑[安平:臺南市]에 지란디아 성(Zeelandia castle)을 구축하였다. 타이완이 중국과 일본의 중계무역 거점으로 전력적 가치가 높아지자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 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쌓았다.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 성(Santo domingo castle)을 각각 축조하고 타이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642년에 에스파냐를 타이완에서 격퇴하고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661년 명나라가 청에 패망하자 유신 정성공(鄭成功)이 부하를 이끌고 타이난[臺南]에 상륙하여 지란디아성을 점령해서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타이완을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기지로 삼았다. 1662년 정성공이 죽고 이후 아들 정경(鄭經)이 대만을 통치하면서 독립된 국가로서 체제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1673년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난 틈을 이용해서 대륙으로 진격하여 푸젠성 일대를 점령하기도 하였지만 1680년 하문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다시 퇴각하였다. 정경이 중국 대륙 진출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사망하자 대만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내분으로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1683년 6월 청(淸)이 타이완으로 진격하자 3번째 정(鄭)씨 왕인 정극상이 청나라에서 요구한 변발을 받아들이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정(鄭)씨의 타이완 지배는 불과 3대, 22년으로 끝났다. 다음해인 1684년 청은 타이완을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부(府)를 설치하였다

 

그후 대륙으로부터 이민이 격증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신천지를 개척하고 1885년 타이완은 하나의 성으로 독립하였다. 청은 대만에 대한 차별적 정책을 펼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민심이 이반되었다. 그 때문에 대만에서는 크고작은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721년에 일어난 주일귀(朱一貴) 민란, 1787년 임상문(林爽文)이 일으킨 민란, 1862년 대조춘(戴潮春) 민란이 대표적인 3대 민란으로 당시 대만의 상황을 말해준다.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대만에 각국의 영사관과 병원 등이 설치되어 근대화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하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1895]에 의하여 212년간 계속되었던 청나라의 통치를 벗어나 타이완은 일본의 최초 해외 식민지가 되어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그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중국에 복귀할 때까지 타이완은 51년 간 일본 치하에 놓여 있었으며, 1949년에는 중국공산당과 내전(內戰)에서 패배한 국민당(國民黨)의 장제스[蔣介石]정권이 타이완으로 이전하여 그 지배체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반일 감정이 높았던 국민당 정권은 대만에서 일제에 협력하였던 친일세력을 색출하면서 폭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2.28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비극을 초래했다.

 

타이완은 최고기관인 국민대회 및 총통 아래 입법원(국회), 행정원(내각),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의 5권분립제를 택하고 있다. 국민당 1당지배정치를 펴온 타이완 정부는 1949년 이래 계속 실시된 계엄령을 1987년 7월 해제하였으며, 1988년 1월 13일 총통 장징궈[蔣經國]가 사망한 후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1월에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으며, 같은해 12월의 입법원 선거에서 야당세력이 예상외의 의석수를 차지함으로써 집권 국민당에 타격을 주었다.

 

1991년에는 타이완 수비사령부를 해체하고 진먼섬 계엄을 종식하였으며, 1992년에는 사상경찰제 및 타이완 경비사령부를 폐지하였다. 1993년 11월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 1994년 7월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던 총통직선제 개헌안 승인을 거쳐, 1996년 3월 총통 리덩후이가 최초의 직선총통이자 제9대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3월 야당인 민진당(民進黨)의 후보 천수이볜[陳水扁]이 롄잔을 꺾고 총통으로 선출되어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국민당 체제가 중단되었다. 2001년 12월 1일 제5기 입법위원 선거 결과 민진당이 제1당으로 도약하였으며 그후 2004년 3월 20일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 총통이 50.12%의 지지를 얻어 연임에 성공하였다. 이때 야당은 3월 19일의 천수이볜 총통 피격 사건으로 국가안전체제가 발동되어 군인과 경찰의 투표권이 박탈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최고법원에서 모두 기각 패소하였다.

 

2004년 12월 11일 실시된 제6대 입법위원 선거에서 야당(국민당, 신민당, 신당)이 입법원내 과반수(113석)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民進黨 89석, 國民黨 79석, 親民黨 34석, 台聯 12석, 新黨 1석, 기타 10석)되고 이에 2005년 6월 7일 국민대회에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입법위원수 1/2 감축, 소선거구제 채택, 헌법 개정안의 국민투표 실시, 국민회의 해산 등 헌법 개정 내용이 확정되었다. 국민대회는 동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천수이볜 총통의 측근 비리혐의로 국민당, 친민당 주도 하에 타이완 정치사상 최초로 총통파면안이 입법원에 제출되었으나 2006년 6월 27일 부결되었다. 2008년 3월 마잉주[馬英九]가 제12대 총통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