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문학[閨房文學]의 전형을 보여 주는 글들
정 종 명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나는 화월당(花月堂) 박혜남(朴蕙南) 여사를 한 번도 뵈온 적이 없다.
그러나 아드님이신 고산지(高山芝) 시인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화월당(花月堂) 박혜남(朴蕙南) 여사는 땅끝 마을인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월호리에서 한학자이자 서예가이신 시당(時堂) 박장수(朴章洙)옹의 셋째따님으로 태어났다.
화월당(花月堂)의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다.
셋째 딸인 여사의 뒤를 이어서 아들이 태어나자 터를 잘 팔았다면서
어린 시절 귀염을 독차지했다는 화월당(花月堂) 박혜남(朴蕙南) 여사.
초등학교 졸업한 후, 공주사범에 합격하였으나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학업의 꿈을 접고
집에서 규수수업을 받게 된다. 부친이신 시당(時堂) 박장수(朴章洙) 옹은 화월당(花月堂)의 학습을
매년 점검하면서 화월당(花月堂)의 쓴 글을 책으로 만들어 주면서 그녀의 영특함을 칭찬하였다.
이번에 고산지(高山芝) 시인이 편찬한‘규중보람(閨中寶覽)’과‘규중간독(閨中簡讀)’은
화월당(花月堂) 박혜남(朴蕙南) 여사의 처녀 시절 학습한 글씨로 당시 사대부집에서 사용했던
한글의 변화를 알 수 있는소중한 자료이자, 더불어 아직까지 발굴되지 아니한 이야기는
국문학사의 귀중한 사료이다.
특히‘사향곡 답’‘복선화음 녹’‘여자란가’등은 남도 규방문학(閨房文學)의 전형을 보여준다.
1949년 3월 화월당(花月堂) 박혜남(朴蕙南) 여사는 고우석(高友錫) 옹과 결혼, 5남매를 두었다.
1963년 부군인 고우석(高友錫) 옹이 별세하자 30대에 홀로 되어서 5남매를 훌륭하게 키운
화월당(花月堂) 박혜남(朴蕙南) 여사는 장한어머니상을 두 번이나 받으신 분이다.
아드님이신 고산지(高山芝) 시인은‘격동의 80년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직장인으로 기업인으로, 그리고 민주화 투사와 해외 유랑인으로 거친 세파와 힘겹게 싸우며 살아오는 동안, 자칫 좌절의 늪에 주저앉을 수 있는 고산지(高山芝) 시인을 일으켜 세운 사람도
화월당(花月堂) 박혜남(朴蕙南) 여사의 자상한 사랑이었다.
고산지(高山芝) 시인이 쓴 사모곡 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삼가 마감한다.
사모곡(思母曲)
내가 아직
간난 아이였을 때
눈 맞추며 궂은 일
마다 않으시던 어머니
가슴을 졸이게 하던 철부지 아들은
당신의 품을 떠나
제멋대로 세상을 살고 싶은
어리석은 놈이었습니다
하는 말은 언제나 날카로워서
당신의 가슴에 상처를 냈고
대못을 박기도 한
못난 사내였습니다
세상 풍파에 날개 꺾여 찾아 온 아들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 함을 탄식하며
손수 차려주신 그날의 밥상은
당신의 절제 된 마음이었습니다
주름살에 베어나는
당신의 모진 세월을
바라볼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어머니
거친 당신의 손 매디 매디에
묻어나는 눈물은
한없는
당신의 사랑이었습니다
까맣게 타버린
당신의 가슴에는
핏 망울이
여기 저기 엉켜 있습니다
눈물 보다 서러운 것이
자식들의 무관심이었음을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못난 아들이 이제 당신을 불러 봅니다.
나의 영원한
본향 이신 어머님
당신은 끝나지 않는
나의 그리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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