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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인 |
아직은 이른 시간, 차의 흐름이 원활하다
앞차의 꽁무니를 물고 강물처럼 흐르는 자동차의 행렬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
보이지 않는 벨트에 실려 사내는 달음박질쳤다
서두르면서 오늘도 시간 속에
숨겨진 세월을 낚아보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초조함이 만들어낸
골 깊은 주름살엔 조급함이 배어있다
뒤돌아보면서 돌이켜야 했는데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며 자책하는
사내의 하얗게 샌 머리
마주 오는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이 시야를 가리고 경적이 울렸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팻말과 함께
유턴 표지판이 눈앞에 들어 왔다
서둘러서 핸들을 꺾고 있는 사내의 눈동자에 고인
회한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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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진 삶의 현장인 ‘Live’를 거꾸로 읽으면 악을 뜻하는 ‘Evil’이 된다.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장소이자 탐욕과 두려움,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곳이 우리네 인생이다. 인간은 어차피 완전한 동물이 아니다. 태어나 걷기까지 수천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직립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동물이 인간이다. 이렇듯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축적의 지혜를 가진 의지적(依支的) 동물이 교만해지면 유연성을 상실한 고집불통의 의지적(意志的) 존재로 변질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원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아직도 ‘남 탓’이라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마음껏 휘두른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허신(許愼)은 ‘선(善)을 길야(吉也)’로 풀이했으나 사람들이 ‘길할 선’이라 하지 않고 ‘착할 선’이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착하다’의 어원은 ‘붙을 착(着)’에서 왔다. 붙을 착(着)은 ‘양 양(羊)’과 ‘삐칠 별(丿)’, ‘눈 목(目)’의 합성문자다. 다시 말해 양(羊)이 지팡이(丿)를 들고 지켜보고 있는 목동의 곁에 붙어있는 모습을 말한다.
목동의 곁에 붙어있어야 길하기 때문에 ‘길할 선’이라 하지 않고 ‘착할 선’이라 풀이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편(詩篇) 기자(記者)는 노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대로 살다가 저지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남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는 열병을 앓고 있다.
‘양 양(羊)’자를 허신은 ‘복 상(祥)’이라 풀이하고 ‘선야(善也)’라 했다. ‘복 상(祥)’자는 ‘보일 시(示)’와 ‘양 양(羊)’을 합친 글자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재물은 받으셨으나’(창세기 4:4)라는 성경 구절에서 알 수 있듯 하나님께 바친 양을 ‘복(福)’이라 풀이한 것이다. ‘착할 선(善)’은 ‘양 양(羊)’ 밑에 ‘다투어 말할 경(誩)’을 합친 문자로 복된 말을 하는 행위가 ‘선하다’는 의미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요즘 우리의 언어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사라지고 시비지심(是非之心)만 난무하는 세상에서 네 탓이 아닌 내 탓으로 유턴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한여름 밤의 꿈을 이 아침 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