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가리키면서 손가락 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을 향해 이태백(701~762)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명경같이 밝은 달……."
그는 달을 순수의 극치인 명경(거울)으로 간주하면서도 결국은 현세에서 같이 놀던 유희의 대상으로 끌어내렸다. 인간은 유희의 단계를 벗어나 거울과 같은 마음으로 차원을 높이고자 하지만 이 시는 그런 단계로 이행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실존적인 고뇌를 그리고 있다.
이태백, 그는 누구인가? 그는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아직껏 이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고 있다. 이태백이 타계한 지 1300년이 지났지만 그의 시에 관한 해설도
일부 밝혀지지 않은 채 여러 가지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일부 이란 학자들은 이태백이 이란계
중국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이태백의 출신에 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미트라'는 페르시아어로 '매흐르'라고도 하는데, 이는 태양을 뜻한다. 즉, 미트라교는 태양(빛의 신)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우도 불을 숭배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때 불은
구체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깨달음을 뜻하는 내면의 불(빛)을 의미한다.
페르시아의 고대 사상은 미트라교를 통해 기원전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 성행했으며,
페르시아 불교는 중국 초기 불교의 토대가 되면서 중국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태양과 달은 서양과 동양에서 깨달음과 욕정을 자제하는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다.
명경이란 단어가 페르시아에서 중요한 시어로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신앙이
내면 정화에 그 토대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에서 온 신선이라고 불리는 이태백은 중앙아시아의 쇄엽에서 태어났다.
쇄엽은 현재 키르키즈스탄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키르키즈스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해서 2천5백만 명 이상의 타직인들이 지금도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지역의 페르시아어를 쓰는 타직인들은 구소련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키릴 문자에도
익숙하지만, 구소련에서 독립한 90년대 이후 이 지역의 학생들은 페르시아 문자를 배우고 있다.
이란 동부의 코라손 주와 더불어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권을 합쳐 대(大)코라손권이라고 부르는데, 이태백은 당시 코라손권 출신으로 5세 때 부친과 함께 사천성의 강유(江油)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이 코라손의 지사를 지냈다는 설도 있다. 이태백은 어릴 적부터 시에 대해
조예가 깊었으며 수많은 시를 지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 하면서 25세 때 사천성을 떠나 오랜 세월 여러 지역을 돌아 다녔으며,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사회적인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744년에 낙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노년에는 방황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762년 안휘성의 당도에서 농협증으로 눈을 감았다.
중국학자들이 쓴 자료들을 통해서 이태백이 살았던 시대상을 알 수 있다.
그 외국인들 가운데에는 무역을 위해 온 사람들, 특히 페르시아 상인이 수적으로 가장 많았으며
그중 일부는 장기간 당나라에 체류하기도 하였다.
두보가 「염여 灩澦」라는 시에 "뱃사람 낚시꾼이 노래를 부르고
고객(估客) 호상(胡商, 페르시아 상인)은 눈물을 적신다."라는 시구가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사천(촉) 지방에까지 서역의 상인이 진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당의 중심부에서도 서역 상인들의 자취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구당서』 124권 '전신공'에 의하면 상원 원년(760년)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진압군과 반란군이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수많은 서민과 상인들의 재산이 약탈을 당하였고, 당시에 양주에 체재하고
있던 페르시아 상인들도 그 와중에 휩쓸려 들어가 수천 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간 사람 수만 해도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1)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무희들이 당나라에 들어왔으며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권 춤곡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역의 여성들은 대부분 페르시아 계통이었다고 알려져 있다.2)
이태백 자신의 시에도 '호희'라 불리는 술파는 페르시아인 여성이 등장한다.
이태백은 페르시아의 무희와 어울려 술을 마시며 본향의 그리움을 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호희의 미에 대해 격찬을 퍼부었으며 하얀 손(다스테 새피드, 다스테 비저)의 은유를 사용하여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지금도 중앙아시아를 포함하는 페르시아 시에서 이러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하얀 피부가 미인의 요건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여인상은 둥근 얼굴과 크고 검은 눈, 눈썹의 숯이 많아 초승달과 같이
눈을 감싸는 여인을 미인이라고 했다. 페르시아 여성의 고혹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현재 대부분의 이슬람 여성들은 정치권력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감정 표출이 자유스러웠다. 이태백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호희'는 고국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상징한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제국을 형성한 페르시아는 재상, 행정 제도를 비롯해 음식과 의복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아랍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랍의 침략으로 엄청난 사료(史料)와 작품들이 사라져 버렸다. 페르시아 역사에서 아랍과 몽고의 침략은 이란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아랍은 이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종족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페르시아 문학의 역사가 아랍의 침략 이후 9세기에 재등장하면서 낭만적 서사시는
대시인 고르거니와 네저미(1209 죽음)에 의해 다시 불렸다.
11세기 중반 고르거니의 낭만적인 장편 서사시가 애쉬커니(파르티아, 기원전 247~기원후 224)
왕조의 전설에서 생겨났으며,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가 유입되기 이전의 연애시라고 말할 수 있다. 각운 형태를 띠고 있는 시형은 델리 출신의 유명한 페르시아어 시인,
아미르 코스루(1253~1324)에 의해 계승되었다.
페르시아 종교와 철학에서는 사랑론이 등장하는데, 아랍의 침략으로 인해 방대한 자료가 소실되어 사랑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를 알 수 없다.
이후 페르시아 최고의 소네트(Sonnet, 페르시아어로 가잘이라고 하며 사랑과 술을 주제로 한
7–14행의 시) 시인 허페즈(?~1390)로 연애시의 전통이 이어진다.
페르시아의 사랑론은 한국 문학이나 중국 문학에서 보이는 사랑론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이란계 중국 시인 이태백은 페르시아의 사랑 노래를 중국의 사랑 노래와 적절하게 혼합했다.
그는 중세 페르시아와 중국의 문학사에 가교 역할을 하는 국제적인 시인이었다.
이태백과 같은 이란계 중국 시인과 당시 중국에 거주했던 수많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페르시아 종교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담론인 '사랑'이 중국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중국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런 흐름은 중국과 인도를 소통시켰다.
또한 페르시아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페르시아 문명은 인류 문명의 뿌리이자 교두보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태백과 그의 시를 재조명해 보면 좀 더 확실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의 중국 문학계에서도
그의 시에 대한 번역 작업이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이태백은 태백산으로 도사를 찾아가 비밀을 얻고자 했기에 자호를 태백이라 칭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중국의 도교와 페르시아 수피즘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수피즘(sufism, 진리를 찾는 구도승과 탁발승의 도)을 추종하는 수피(sufi, 도인)와 도사의 의미는 동일한 개념이다. 이태백의 삶의 행로는 페르시아 수피들의 일반적인 전형이기도 했다.
이태백이 말한 호인은 오랑캐와 구별할 필요가 있으며, 오랑캐는 주로 흉노와 그 일파인
투르크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은 돌궐족이라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어의 문헌에 따르면 투르크족은 아시아 아리안인과 몽골로이드의 혼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일부 우즈베키스탄과 타직키스탄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몽골로이드의 얼굴 생김새에 오똑한 코와 둥근 눈을 가지고 있어 아몬드 형의 눈을 가진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아시아인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오똑한 코를 가진 북방계 한국인은 투르크인과의 구별이 쉽지 않아 투르크인이 아니냐는 질문을
간혹 받곤 한다. 최초의 투르크계 국가로 알려진 페르시아 가즈나비(962~1186) 왕조는
노예 출신이 왕좌에 올랐던 경우로, 이 왕들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종족이 아니어서
짜릿한 전율이 오기도 한다.
중국으로 건너온 이태백의 부친이 왜 굳이 이씨 성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부친이 당나라 황실의 성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할 뿐이다.
이태백의 일가는 후대에 농서 이씨로 본을 정하였으나,
그들의 생애를 통해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당나라 황실인 이씨의 조상이 역사서의 기술대로 정말로 한족이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가령 이씨 일족이 한족이었다고 하더라도 초대 황제 이연은 반쪽만 한족, 2대 당태종은 4분의 1만
한족이었으며 3대 당고종 이치에 이르면 한족의 피는 8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순혈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당대 24명의 황제 중에서 여황제 측천무후를 제외하고는 많든 적든
이민족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3)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이태백의 부친이 자신의 성씨를 이씨로 정한 것은 이씨의 혈통이 한족이
아닌 혼혈족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되며, 이씨는 안씨처럼 당시 중국의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했던 페르시아 계통의 혈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송대까지는 이민족이 황제가 되어도 대체로 자신들의 출신을 은폐하거나 당의 황실처럼 중원의
지배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상이 한족임을 주장해 왔다.4)
이태백이 살았던 당시 중국 당나라 황실은 도교를 존중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갈 수 있는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이태백이 이사한 촉은 도교 교단 형성의 기원이 된
후한 시대의 오두미도(五斗米道)가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역 사정으로 인해 그는 도교 쪽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애르펀에도 깊이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릴 때부터 도교 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이태백이 도사(도교를 수행하는 사람)를 찾아다니며 그들과의 교분을 돈독히 했다는 사실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각주
- 1 장징, 이용주 옮김, 『사랑의 중국 문명사』(이학사, 2004), p.146.
- 2 장징, 이용주 옮김, 『사랑의 중국 문명사』(이학사, 2004), p.151.
- 3 장징, 이용주 옮김, 『사랑의 중국 문명사』(이학사, 2004), pp.195–196.
- 4 장징, 이용주 옮김, 『사랑의 중국 문명사』(이학사, 2004), p.196.
'중국인문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가(詩歌)의 흥성과 발전 / 출처 - 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0) | 2015.07.02 |
---|---|
권세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백 (0) | 2015.07.02 |
중국인문기행 - 86 / 경성산 상사천(想思泉) (0) | 2015.07.02 |
중국인문기행 - 85 / 경정산 (0) | 2015.07.02 |
敬亭山(경정산) (0) | 201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