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문기행

중국인문기행 - 175 / 명효릉

高 山 芝 2015. 7. 13. 20:25

 

 

비전은 원래 향전 앞의 중문(中門)으로 효릉문(孝陵門)이라 불렀다. 다섯 개의 아치로 된 문이었으나 후에

파괴되어 버렸다. 지금의 비전은 청나라 강희(康熙 : 1654 ~ 1722)황제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1699년 세 번째로 남방순시를 하던 강희황제는 효릉이 파괴된 것을 발견하고, 그 보수를 명하였다. 이때 그는 손수 치융당송(治隆唐宋) 네 글자를 써서 비석에 새기도록 하기도 하였다. 치융당송 비 좌우의 비석 역시 강희황제의 친필이라고 하며, 비전 내에는 총 다섯 개의 비석이 있다. 치융당송비는 높이가 3.85m, 폭이 1.42m, 두께가 0.38m이다. “치융당송”은 태조 주원장의 치세가 당 태종 이세민과 송 태조 조광윤을 능가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治隆唐宋 - 청나라 "강희제"가 친필로 쓴 "나라를 다스림이 唐나라와 宋나라보다 뛰어났다"라는

 "치융당송(治隆唐宋)"이라 새긴 돌비석이 거북등에 세워져 있고

그 양쪽에는 청나라 현자이였던 "건륭황제(乾隆皇帝)"가 주원장을 칭송하는 송문이 적혀 있다

 강희황제는 6차례의 남방순시 중에서 5차례나 효릉을 참배하였다. 이것은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었던 한족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홍루몽의 저자인 조설근의 조부, 조인(曹寅)에게 명하여 치융당송비를 세우게 하였다. 효릉은 청 함풍(1850 ~ 1861)시기에 발생한 수차례의 전쟁에 휩쓸렸다. 때문에 지상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피해를 입었고, 청 강희황제가 손수 쓴 석비 역시 이때 파괴되었다. 파괴된 효릉은 1864년 9월에서야 복구될 수 있었으나, 당시 청나라의 재정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수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치융당송비 역시 부서진 비를 재건축하기 보다는 부러진 비석을 다시 세워 허리부분을 때우고, 주변에 시멘트를 채워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취했다고 한다.

문무동문 동쪽. 특별고시비 / 청나라 문종때 명효릉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석

비석 상단은 전서로, 하단은 일어,독일어,영어,러시아어, 프랑스어 등 6개국언어로 쓰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