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 보이니?’
예수님 찾아와 말씀하네
바로 보지 못한 나를 향해
‘너 나 보이니?’
맹인으로 태어났다면 죄가 없을 것을
본다고 하니 네 죄 크다며
청맹과니가 맹인을 인도하는
위험한 세상 두고 볼 수 없다 하네
나의 눈 만지고
‘무엇이 보이느냐?’
‘눈을 뜨고 바로보라’
예수님 말씀 하네
청맹과니 눈을 뜨면 예수님이 보이고
눈 뜬 장님 보게 되면 이웃과 교감 하네
복음이 보이고 긍휼이 보이고
사랑이 보이고 은혜가 보이네
‘너 나 보이니?’ 예수님 말씀 하네
‘무엇이 보이느냐?’ 지금도 묻고 있네
겉으로 보기엔 눈이 멀쩡한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청맹과니’ 또는 눈뜬 ‘당달봉사’라고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는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태복음 15:13~14). 여기서의 맹인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견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제대로 보지 못하면 올바른 소통 또한 할 수 없다. 이러한 편견은 독선으로 굳어져 이웃과의 소통을 거절하면서 막무가내로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인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예수께 질문했다. 이에 예수는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된 것이 아니고 그를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는 다음 말씀이 중요하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요한복음 9:4~5). 예수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사역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그들의 지식의 저주를 풀어줘 올바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사역이 바로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라는 욥의 감격을 체험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크리스천부터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최후의 심판 때 나오는 일곱 교회 중 마지막인 라오디게아교회를 예수님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 3:17~18)고 질타했다. 이 책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맹인인 줄 아는 크리스천은 문제가 될 게 없으나 맹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청맹과니로 세상이 요란하기 때문이다.
회의문자인 볼 시(視) 자는 보일 시(示)와 볼 견(見) 자가 결합된 문자다. 그러나 갑골문자는 시(示)와 눈 목(目) 자를 이미지화했다. 갑골문의 시(示)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그린 것으로 ‘보이다’란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 목(目)이 결합돼 ‘신이 보이다’란 뜻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단순한 의미의 ‘보다’나 ‘~로 여기다’, ‘간주하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시(視) 자에는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이 함의돼 있다. 보암직한 것만 보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罪性) 때문에 시끄러운 세상. 복음의 안약을 바르고 세상과 올바른 소통을 하는 사회를 소망하면서 이 새벽 실로암 연못에 내 눈을 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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