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수필 -서부유럽여행기-

[ 이탈리아 * 베네치아 - 11 ]

高 山 芝 2009. 12. 18. 14:57

[ 마르코 폴로의 베네치아 귀환 ] 

1292년경(오타기의 주장에 따르면 1290년)에 몽골족의 한 공주가 바닷길로 페르시아에 가서 아르군 칸의 왕비가 될 예정이었다. 폴로 가족은 공주를 수행하여 페르시아로 가겠다고 제의했다. 쿠빌라이 칸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허락을 내렸다. 당시 쿠빌라이 칸은 거의 80세에 가까웠고, 그가 죽으면(그결과 정권에 변화가 일어나면) 소규모 집단으로 고립된 외국인들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그들이 고향 베네치아와 가족들을 보고 싶어한 것도 당연했다

 600명의 궁정 신하와 선원을 거느린 공주와 폴로 가족은 1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취안저우[泉州] 항구를 떠나 남쪽으로 항해했다. 함대는 참파('참바', 지금의 베트남)에 들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섬과 말레이 반도에도 들렀다. 수마트라 섬(작은 자우아)에서 5개월 동안 머문 것은 우기의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마르코는 북극성이 수평선 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후 함대는 니코바르 제도(네쿠베란) 근처를 지나, 실론(세일란) 섬에서 다시 육지에 닿았다. 중국 배들은 그후 인도 서해안과 페르시아 남쪽을 지나 호르무즈에 닻을 내렸다. 그후 원정대는 호라산으로 갔지만, 아르군 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마흐무드 가잔에게 공주를 넘겨주었다. 폴로 가족은 결국 유럽을 향해 출발했지만, 이 시점에서 그들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아마 타브리즈에 몇 개월 머물렀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몽골을 떠나 그리스도교도의 땅인 트레비존드에 도착하자마자 힘들게 벌어들인 수입을 거의 다 빼앗겼다. 그들은 좀더 지체한 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1295). 그들이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여긴 친지와 이웃들이 그들을 극적으로 알아본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폴로 전설의 일부이다.

 [ 밀리오네의 편찬 ]

마르코가 돌아온 직후,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경쟁 관계에 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1298). 마르코는 베네치아 해군 함장의 고문관으로 참전했다가 9월의 크루조라 해전에서 패함으로써 포로가 되어, 결국 제노바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이 감옥에서 절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가 피사 출신의 포로인 루스티첼로(또는 루스티차노)를 만난 것이다

 10년쯤 전에 멜로리아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여겨지는 루스티첼로는 저명한 모험소설 작가이며 당시 가장 인기있는 주제인 기사도와 그 전승의 전문가였다. 마르코는 아시아에서 지낸 25년에 대해 보고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베네치아어나 프랑스-이탈리아어(13, 14세기에 유행한 이상한 복합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집필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루스티첼로가 곁에 있기 때문에, 마르코는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쓰게 할 수 있었다

 채택된 언어는 프랑스-이탈리아어였다. 이리하여 위대한 책이 한 쪽 완성되었다(기행문학) 다행히 마르코는 곧 풀려나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법률 서류의 증언을 통해 부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그는 그리 많지 않은 재산을 관리하면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70세 때 세상을 떠났다. 마르코 폴로가 죽을 때 책에서 날조한 '거짓말'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자신이 실제로 본 것의 절반도 채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대꾸했다. 그가 유언장에서 '타타르인 노예' 한 명을 해방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노예는 아마 동아시아에서 베네치아까지 줄곧 마르코 폴로를 따라다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