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수필 -서부유럽여행기-

[ 이탈리아 * 베네치아 - 10 ]

高 山 芝 2009. 12. 18. 14:48

 [ 마르코 폴로의 동방여행 - 2 - ]

폴로 가족은 바다흐샨을 떠나 파미르 고원을 향해 바한(보칸) 계곡을 올라갔다. 그들은 여행 계획에 따라 결국 파미르 고원을 횡단했는데, 이 일정표는 오랫동안 많은 논의와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산맥의 북동쪽으로 내려간 그들은 오늘날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彊維吾爾自治區]에 있는 카스가르(지금의 카스)에 도착했다

  이제 폴로 가족은 실크로드(비단길)에 올라 있었고, 그들의 진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오아시스(야르칸드, 허톈[和], 카르칸, 로프노르 호)를 따라 추적해 갈 수 있다. 이 오아시스들은 오늘날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인 중국 국경 지방의 사주(沙州)로 가는 길에 징검돌처럼 놓여 있다. 폴로 가족은 사주에 도착하기 전에 주로 이슬람 교도가 살고 있는 지역을 여행했고,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교도, 불교도, 마니교도, 조로아스터 교도도 만났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전혀 다른 문명이 지배하는 드넓은 간쑤 성(마르코는 '탄구트'라고 불렀음]에 들어갔다. 폴로 가족의 여행 계획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 쑤저우[肅州]와 간저우[甘州]에 이른 다음, 닝샤[寧夏] 지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이 몽골 제국의 여름 수도인 상도로 곧장 갔는지, 돌아서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1275년(최근 일본 학자 오타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274년) 폴로 가족은 다시 몽골 궁정에 들어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유와 교황의 편지를 그들의 후원자인 쿠빌라이 칸에게 바쳤다

 [ 마르코 폴로의 중국체류 ] 그후 16(또는 17)년 동안 폴로 가족은 황제의 영토, 특히 카타이(Cathay:지금의 중국 북부)와 망기(Mangi:또는 Manzi, 지금의 중국 남부)에서 살았다. 이들은 황제가 여름 주거지인 상도에서 겨울 주거지인 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北京])로 옮길 때 함께 따라갔을 것이다. 불행히도 마르코의 책 〈밀리오네〉는 부분적으로만 전기이자 자서전이다. 따라서 이 책만 보고는 폴로 가족이 그동안 어디에 갔고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몽골족이 한족을 의심했기 때문에 외국인을 많이 고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폴로 가족이 이 잡다한 사회에 가장 훌륭하고 성공적으로 적응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정확히 얼마나 성공적이었을까? 그들은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 쓸모있는 존재가 되었을까? 이런 점들은 몇 세기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뚜렷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은 기술직에 고용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사이안푸'(지금의 샹양[襄陽]) 포위 공격 때 군사 고문으로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기록은 일관성이 없다. 마르코의 말에 따르면, 이 도시는 아버지와 삼촌의 설계도에 따라 만든 '거대한 투석기'(돌이나 화살 같은 날리는 무기를 쏘는 기계 장치) 덕분에 결국 함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스럽다

 마르코 폴로는 젊은 나이(20세 정도)에 중국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어를 전혀 몰랐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쓰이던 많은 언어들 가운데 일부(아마 몽골족이 사용하던 튀르크어, 아랍어에 동화한 페르시아어, 몽골어, 위구르 튀르크어)를 할 줄 알았다. 쿠빌라이 칸은 낯선 나라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기 때문에 마르코를 총애했다

 황제는 자주 그에게 현지조사 임무를 주어 몽골 제국의 먼 지역으로 그를 파견했다. 마르코는 이런 임무를 띠고 중국 남서부의 윈난 성[雲南省]에 간 적도 있었고, 윈난 성을 지나 미얀마의 타가웅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중국 남동부 지역을 방문하여, 몽골족이 얼마 전에 정복한 인구 밀집 지역과 '킨사이'(지금의 항저우[杭州])를 열정적으로 묘사했다. 마르코가 원(元) 제국을 제2의 고국으로 여겼다는 증거는 풍부하게 남아 있다.

 마르코는 개인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록에는 공백이 많지만, 낭만적인 영웅 숭배자들은 이 공백을 열심히 채워넣었다. 그들은 마르코가 공주들을 매혹시키고 여러 지방을 다스린 훌륭하고 젊은 궁정 신하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마르코 폴로 신화는 몇 세기 동안 널리 퍼졌고,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 및 극작가들에게 주제를 제공한 적이 많았다

 반면에 좀더 냉정한 비평가들은 당시의 중국 기록에 마르코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그러나 그는 중국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까? 16, 17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리 마터우[利瑪竇]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18세기 화가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랑 시닝[郞世寧]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중국 기록에 나오는 이런 이름들이 바로 마테오 리치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또한 마르코의 기록이 황제 측근들의 비공식 자문 위원회에서 주워 모은 정보라기보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 같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아마 그 중간일 것이다. 마르코는 황제를 위해 임무를 수행한 것 이외에 소금 및 전매행정에 관해서도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정부의 이 부서에서 책임있는 지위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밀리오네〉의 일부 판본에 따르면, 마르코는 1282~87년에 양저우[揚州:간쑤 성 소재]라는 도시를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거의 믿을 수 없고, 한 구절에서 추측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