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3(중종 28)~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장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아버지는 대사간 맹영(孟英)이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했다. 공조좌랑·전적·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홍문관부교리를 거쳤다. 1563년 교리로 있을 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양(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양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곧 파직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에 다시 기용되고 승문원판교를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박광옥(朴光玉)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마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6월 1일 북상을 개시하여 6월 13일 전주, 22일 여산, 27일에는 은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적이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북상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갔다. 7월 10일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 금산(錦山)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仁厚)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과 순절했다.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 기행물인 〈서석록 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 正氣錄〉 등이 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 포충사(褒忠祠),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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