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과 호남은 고경명과 김성일의 본을 받으라.
영호남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다르게 항상 갈등 속에 살아오고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더욱 깊은 골이 패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왜 그럴까?
필자가 진정으로 궁금하여 삼국시대부터 2011년 현재까지 역사적인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뜻밖인 것은 서로가 미워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에 놀랐다.
이유가 있다면 2000년 동안 정치인들과 학문하는 위선자들의 농간에 양쪽지역 사람들이 이용당한 것이다.
기회가 되면 “영호남의 갈등” 역사적 자료를 매우 객관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할 생각이다.
원인을 알아야 치료가 될 것이 아닌가.
나는 학자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정사(正史)에 의하면 조금도 “쪽”팔리는 것이 두렵지 않다.
유명한 분들과 높으신 분들은 “욕”먹을까 무서워 절대로 역사적 내용을 발표하지 못한다.
명예만 팔아먹는 위선자들이다.
아래 내용은 영호남간에 아름다운 정을 나누는 역사의 미담을 소개한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전남 광산군 대촌면 원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조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란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생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퇴계(退溪)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이다.
1590년(선조 23) 52세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
당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주장하고 김성일(金誠一)은 “전쟁 염려가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호남지역 선비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이는 호남과 인연이 별로 없었던 다른 영남출신 선비들의 행적과 비교해볼 때 매우 이채로운 일이었다.
학봉 김성일은 3년간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냄으로써 전라도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학봉은, 그가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에 이 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나주 금성산의 대곡동에 대곡서원(大谷書院, 나중에 경현서원(景賢書院)으로 개명)을 세웠다.
대곡서원은 나주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전까지 나주에는 서원이 없었다. 나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는 서원보다는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 일대에 분포해 있는 수백여 개 누각과 정자가 말해 주는 것처럼 호남에서는 서원보다 누정이 발달해 있었던 반면, 영남지역에는 서원(書院)이 발달해 있었다.
학봉이 대곡서원을 세움으로써 영남의 철학, 즉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호남의 가사문학(歌辭文學)과 영남의 퇴계철학(退溪哲學)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 바로 대곡서원이었다.
대곡서원에 처음 배향(配享)된 5명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의 거유들로 이른바 “동방오현”으로 꼽힌다. 그 얼마후 유일하게 호남출신인 기대승(奇大升)이 추가로 배향되었고, 또 그 100여 년 후인 1693년에는 학봉 자신이 배향 인물에 추가됨으로써 대곡서원은 영남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경상도 출신인 학봉이 객지인 전라도에서 영남학풍의 근거지인 대곡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주나씨(羅州羅氏) 집안사람들의 협력 덕분이었다. 나(羅)씨들이 나주의 밑바닥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서원이 설립·운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학봉집안과 나주 나씨 집안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16세기 후반 대곡서원 설립 당시에는 대단히 보기 좋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 노인으로 아들 셋 가운데 두 아들을 전쟁터로 데려가서 삼부자(三父子)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고, 셋째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안동의 학봉집안으로 보내 대를 잇도록 했던 것이다.
그만큼 고경명과 학봉은 인간적인 신뢰가 깊었다.
이때 고경명의 셋째아들을 비롯한 고씨 가족 50여 명을 받아들여 수년간 보살펴준 사람이 학봉의 부인과 아들들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절박한 시기에 학봉의 가족들과 제봉의 가족들은 동고동락한 것이다.
난리중이라 먹을 것도 변변찮았지만 같이 죽을 먹고, 산나물을 먹으면서 고생을 함께했다. 그 와중에서 고용후는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와 형님의 소식을 접하였다.
얼마 후 학봉이 호남의 관문이 되는 진주성을 지키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는 기별이 왔다. 호남으로 진입하는 요충지인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학봉과, 역시 호남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제봉 두 집안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가 되었다.
고용후와 비슷한 연배였던 학봉의 손자 김시권(金是權)은
“자네나 우리나 두 집이 다 같이 난리를 만나서 자네는 아버님 상을 당하고, 우리는 조부님 상을 당했으니 피차에 일반이네,
그렇다고 학문에 힘쓰지 아니하면 나중에 옷 입은 짐승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학문에 힘썼다.
학봉집에서 4년 동안 피난하였던 고씨 일가는 광주로 되돌아왔고, 1605년의 과거시험에서 고용후와 김시권은 나란히 합격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1617년에 고용후는 안동부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안동부사 고용후는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학봉의 부인과 큰아들인 김집을 관아로 초청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두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읍니까?”
하고 울먹이면서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 영.호남의 대쪽 같은 선비집안들이 보여 주었던 아름다운 우정과 미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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