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 운수대통마을엔 태극기 두개가 휘날린다.
운수대통마을기와 태극기, 그리고 분명 태극기는 태극긴데 좀 거무튀튀한 또 한 태극기가 같이 펄럭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태극기위에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박혀져 있다.
전붓대에도 불원복태극기는 펄럭이고 있다. 대체 무슨연유에 운수대통마을에 불원복(不遠復)태극기가 휘날릴까?
운산정 앞에 세워져 있는 의병전적지 알림 석비
그렇다 운산마을이 한말 고광순의병장께서 거사를 모의 하고 1차본영, 2차본영으로 삼으면서 무기도 제조하고 훈련하였던 곳 그리고 동복, 능주, 옥과를 넘나들면서 일제와 맞섰던 역사적인 장소가 아니었던가 그럼 고광순의병장에 대해 알아보자.
고광순의병장 초상화
고 광 순(高光洵)
(1848. 2. 7 ~ 1907. 10. 16)
見義捨身如大腫一針
義를 보고 몸을 버림은 종기에 침 놓은 것 같고
見利殉身卽穿踰一轍
利益 따라 몸을 달림은 도둑과 같다.
1. 고경명의 혈손으로 태어나다
고광순은 헌종 14년(1848)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장흥고씨(長興高氏)의 명문 후예로 태어났다. 그는 자를 서백(瑞伯), 호를 녹천(鹿川)이라 하였다. 창평이 남쪽 고개를 녹갈(鹿渴)이라 하고, 계곡물을 유천(柳川)이라 불렀는데, 고광순이 그 위에 거주 하였으므로 여기서 호를 취하였다고 한다. 생부는 정상(鼎相)이고 생모는 김씨였으며, 양부(養父)는 경주(慶住)이고 양모(養母)는 허씨였다.
그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錦山)에서 순국한 고경명(高敬命).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仁厚) 3부자의 가문이었다. 고광순은 그 중에서도 특히 학봉(鶴峰) 고인후의 봉사손(奉祀孫)이었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절의정신(節義精神)에 남달리 깊이 배양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상월정(上月亭)에서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면서도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남다른 데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덕을 좋아하는 군자로 칭송되었다.
고광순은 젊은 시절 한때 과거에도 응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리와 부정이 난무하던 과거장이 실태를 목도하고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대로 귀향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일제 침략세력과 권세가들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혼란한 시국상황을 개탄하고 울분의 나날을 보내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2. 호남의병의 선봉에 서다.
고광순에게는 그가 의병전선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가지 명분이 주어져 있었다. 그 첫째는 일제의 극심한 경제침탈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을사늑약 체결 후 광무황제의 밀칙이 내려와 있어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순국한 저명한 의병장의 직손으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도 의병을 일으켜야 했던 것이다.
일제는 침략을 노골화 하는 과정에서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이라는 두번의 대변고가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고광순은 드디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게 된다.
고광순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창하였다.
을미사변에 뒤이어 그 해 11월 17일(음) 단발령이 내려지고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적국을 요동치게 되자, 고광순은 호남지방 유림계의 명사들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성재(省齎) 기삼연(奇參衍) 등과 함께 연락을 취하며 각 고을로 격분을 전파하면서 처음으로 의병규합에 나섰다. 이 때는 제천, 춘천, 강릉, 진주, 안동, 홍성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 정국상황과 인심의 향배가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요동치던 무렵이었다.
1896년 2월(음) 광주와 나주 등지에서 의병 규합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게 되자, 기우만을 주축으로 한 의사들이 광주향교에 집결해 규칙을 정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숙의하였다. 기삼연도 이때 300여백의 의병을 이끌고 광주로 합세했다.
이어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등과 함께 나주로 가 주서(注書) 이학상(李鶴相)을 주축으로 일어난 나주의병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광주,나주, 담양 등지에서 규합된 의병은 기우만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2월 30일 광주를 본부로 삼아 집결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결집된 호남의병은 관군의 탄압과 회유로 인해 곧바로 와해되고 말았다. 영남지역의 의병을 격파한 여세를 몰고 호남으로 행군해 온 이겸제(李謙濟)가 거느린 관군의 공격을 받아 의병측에 가담한 해남군수 정석진(鄭錫振)이 희생되는 등 강력한 탄압을 받은데다,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이 내려와 해산을 명하게 되자 의진은 더 이상 항거할 명분을 잃고 자진 해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의사들은 형식상 임금의 명령인지라 의진을 해산하기는 했지만 그 명이 국왕의 본심이 아니고 적신(敵臣)들의 협박 때문에 내려진것임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광순과 기우만 등의 선비들은 비분강애하여 그뒤부터 전국 각지를 전전하고 동지, 지사들을 규합하면서 재기의 기회만 노리게 되었다.
3. 가슴 속에 갑병(甲兵)을 품고
고광순의병장 존영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킨 이후 집안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 재기의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명분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실천을 우선시하는 강직한 선비로 성장하였다. 특히 촌수로는 집안 할아버니뻘이 되지만 나이는 한 살 아래였던 고제량(高濟亮)과는 의기가 상합하는 사이였다. 고제량은 어려서부터 기량이 활달하여 병정놀이를 할 때도 항상 주장이 되어 진용을 벌이거나 대오를 편성하곤 하였다. 말하자면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었던 셈이다.
한번은 고제량이 농담조로 고광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은 건넸다.
" 왜적들이 나라를 삼키려 하는데 그대같은 유술(儒術)을 장차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이 말을 들은 고광순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서생의 가슴 속에는 저절로 갑병이 들어있는 법이니 그대와 같은 호기(豪氣)는 다만 모퉁이를 감당할 뿐이외다."
이 대답으로 미루어 고광순의 대쪽같은 절의정신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광순의 나이 58세 때인 1905년 러일전쟁일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러한 망국조약이 체결된 직후부터 그동안 비교적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국 인심이 크게 격동되어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호남지방에서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항일전선에 동참한 최익현이 의병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최익현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여기에 동참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주장 최익현 이하 참모들이 남원, 전주에서 출동한 진위대에 의해 체포당하고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
울분을 참지 못한 고광순은 그해 11월에다시 광양의 백낙구(白樂九), 장성의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 모여 의병을 일으켰다. 백낙구는 원래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초토관(招討官)으로 실전을 치른 경험이 있었으며, 이 무렵 전남 광양 산중에 은거하던 중 동지 10영인과 함께 수백명의 주민을 모아 의진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고광순은 백낙구 등과 함께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1월 6일 순천읍은 공략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 날 모인 군세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백낙구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진의 순천 공략천을 실패로 귀착되었다.
이후 고광순의 더욱 분발해 의병전선에 전력을 투입하게 되어다. 더욱이 그는 이 무렵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받고 감격해 하며 토적복수를 스스로 맹약하였다. 그는 드디어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인근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놓고 담양군 저산(猪山)(현재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127-1)의 전주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하엿다. 이때 모인 인원이 모두 5백여명에 이르렀고 의병장에는 고광순이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
부장(副 將)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高光秀). 좌익장 고광훈(高光薰). 우익장 고광채(高光彩) . 참모 박기덕(朴基德). 호군(護軍) 윤영기(尹永淇) 종사(從事) 신덕균(申德均) 조동규(曺東圭).
고광순이 의진을 편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할 무렵, 때마침 남원에서 일어난 양한규(梁漢奎) 의병으로부터 남원읍 공략을 위한 연합작전 제의 받게 되었다. 이에 호응해 그는 즉시 부하 의병을 이끌고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양한규는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영,호남지역으로부터 1천여 명의 병력을 모아 활동에 들어갔던 인물이다. 그 휘하의 정예병 1백여명은 1907년 2월 13일 밤 남원성을 기습 공격하여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날이 설날이었으므로 진위대군의 거의 휴가중이어서 경비가 허술하여기 때문에 손쉬비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원성의 4대문은 의병의 수하에 들어가고 진위대의 무기 군수품 일체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공성(空城)직후 달아나던 진위대 군사들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의병장 양한규가 전사하고 말았다. 사기가 저하된 의병은 이튿날 관군의 반격을 받고 참패를 당햐 성을 탈출한 뒤 지리산 일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아가 양한규의 처남 박봉양(朴鳳陽)을 비롯해 참봉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의 간부들은 체포되어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말았다.
고광순이 남원에 당도하였을 때는 양한규 본진이 이미 와해된 뒤였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의진은 남원읍 공략을 단념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고광순의병은 비홍치를 넘어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 저심마을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후 고광순의병은 저심마을을 다시 본영으로 삼고 능주의 양회일(梁會一), 장성의 기삼연 등과 힘을 합해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고 전전하였다. 특히 4월 25일에는 화순읍을 점령함으로써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평소 원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호를 소각시켜 버렸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동복으로 진군한 의진은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교전한 끝에 사방으로 패산하고 말았다.
4. 피아골의 붉은 단풍으로 지다.
육순 노구의 고광순은 이퍼럼 오로지 충의에 의지하여 10연년간 고군분투하였다. 그 결과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초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항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근는 1907년 9월 의병전략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일제 군경과 임기응변식의 즉흥적인 전투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ㅣ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 축예지계(蓄銳之計)를 택한것이다.
고광순은 지리산을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피아골은 특히 입지 조건이 좋았다.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엔 화개동, 서쪽으론 구례, 그리고 북쪽에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험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더없이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골의 중심인 연곡사에서 민간의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강력한 일제의 군경과 맞설 만큼의 전력을 축적할 생각이었다.
이에 1907년 9월 11일 고광순을 도독으로하고, 그 아래에 박성덕과 고제량을 도총 및 선봉으로 삼고, 신덕균, 윤영기 등을 참모로 정하는 등 편제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행군길에 올라 곡성군 구룡산 아래에 당도하였다.
진용을 강화한 고광순 의병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항전할 것을 계획하고 그에 앞서 무장을 보충하기 위해 동복을 공략키로 하였다. 동복은 오래된 군현으로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의 처척(妻戚)관계로 정치적으로는 얼룩진 고장이지만 보성에서 남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산중 도회지였다. 북쪽 옹성산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자연동굴이 많고 동쪽 운월산도 순천과 경계되어 있어 우복동(牛腹洞) 같아 점령만 하면 당분간 견딜 만한곳이었다.
이에 고광순 의진은 9월15일 새벽에 헌병분견소를 공격했지만 일제 군경의 반격으로 도포사(都炮士) 박화중(朴化中)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지루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전투상황에 대해 일제측 정보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로해 놓았다.
9월 15일 오전 6시 폭주 약 60명이 동복분파소를 습격 했는데 보조원 2명이 교전했으나 중과부적이라 광주로 철수하였다. 미야가와(宮川) 보좌관은 보좌관 6병. 순검1 명을 이끌고 특무조장 1명, 병졸 7명과 협력 토벌했으나 적은 시체 한 구를 버리고 도주한 뒤엿다.[전남폭도사]
의병은 그 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선봉장 고광수의 집이 있는 남원군 이백면 효기리에 숙영한 다음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갔다. 즉 남원에서 곡성, 광양, 굴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거이다. 이 즈음 그는 또한 지리산 부근의 영남,호남 각지로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를 연이어 발표하기도 하였다.
고광순은 지리산 연곡사를 의진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서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추어 갔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 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불원복(不遠復)태극기
한편 고광순 의병이 지리산에 들어올 무렵 전북 순창읍의 우편취급소 및 분파소를 김동신(金東臣) 의병이 습격하였다. 충남 회덕출신의 김동신은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무주 덕유산과 정읍의 내장산, 그리고 장성의 백양사 등지를 주로 전전하며 기우만, 고광순 의진과 긴밀한 연계하에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의병은 순창을 거쳐 구례군 토지면 문수골에 있는 문수암으로 들어왔다. 문수암은 고광순이 주둔한 연곡사에서 북쪽으로 산봉우리 하나를 넘어가면 나온다. 김동신 의병을 추격해 온 일제 군경은 문수암까지 이르렀으나 의병이 자취를 감춘 뒤라 화풀이로 귀중한 문화재인 문수암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일본군은 하개동으로 내려와 주둔하였다.
화개동은 연곡사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연곡사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다. 화개를 일제 군경이 장악하게 되면, 영남지방 의병과의 연락이 끊기게 되므로 고광순 의병이 활동하는데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고광순 휘하의 윤영기와 고광수가 주축이 되어 10월 9일 화개동의 일제 군경을 기습하러 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경은 화개동에 집결하지 않고 쌍계사로 향하였다. 화력을 집결시킨 일제는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의병세력에 대해 대탄압을 가할 심산이었다. 곧 지리산이 영.호남 의병의 활동 본거지로 변모하자, 일제 군경은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고 대대적인 탄압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동원된 일제 군경은 진해만의 重砲大隊에서 파견된 소대 병력, 광주에서 출동한 1개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의 순경 등으로 의병측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감지한 고광순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
이에 부장 고제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죽음을 함께 할 것을 맹약하였다.
'당초 義로써 함께 일으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는가!"
일제 군경은 총공격을 가하며 피아골을 유린한 끝에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다. 의병도 만만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화승총 심지에 불을 붙여 완강히 저항한 것이다. 그러나 의병과 일제 군경의 정면대겨에는 워낙 전력차가 컸다.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25~6명의 의병이 연고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일제 군경은 고광순의 본가에 불을 질렀듯이 연곡사 안팍을 모두 불사를고 퇴각하였다. 연국사가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서 이용될 수 없게 한 것이다. 결국 고광순의 희망이었던 '축예지계' 전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연곡사 동백나무 아래에 있는 의병장고광순순절비
5. 나머지 말
고광순이 순국한 지 며칠이 지나서 우국시인이자 당대의 기록자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연곡사를 찾아갔다. 그는 고광순 무덤의 봉분을 돌보면서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추모시 한편을 남겼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 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연곡사 교전 직후에, 어느 한 농부가 고광순과 고재량의 시신이 불에 타지 않도록 채마밭에 옮겨 솔가지로 덮어두었다. 나흘 뒤에는 고광훈이 상포(喪布)를 준비해 가지고 연곡사 터를 찾아갔다. 솔가지로 덮어둔 두 의사의의 시신을 절 부근에 임시로 묻고 봉분을 만들어 놓았다. 황현이 연곡사를 찾았던 것은 임시 성분(成墳)한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이렇게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두 의사의 유해는 창평(고광순)과 화순(고제량)의 향리로 옮겨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광순의 부인 오씨는 남편이 순국한 다음 해에 세사을 떠나 창평향리 뒷산에 묻혔으며, 장자 재환은 벙어리로 3년 뒤에 죽었고 , 차남 역시 장가도 들기 전에 죽었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고광훈의 아들을 양자로 맞아 종가의 대통을 잇게 하였다.
1962년 정부에서는 고광순의 이러한 공적을 기리어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엿다. 1958년에는 고광순이 산화한 연곡사 옆 서부도 근처 동백나물 숲 아래에다 순절비를 세워 오늘에 전하고 있다. 또한 불탄 그의 생가 터에는 1969년에 포의사를 세우고 한글로 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포의사 앞에 건립한 사적비에는 고광순이 평소 좌우명처럼 삼았던 말을 노산 이은상이 가사체로 만들어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다.
'義를 보고 몸을 버림은 종기에 침 놓은 것 같고(見義捨身如大腫一針)
이익따라 몸을 달림은 도둑과 같다.(見利殉身卽穿踰一轍) 하셨네. 녹치(鹿峙) 연곡(鳶谷) 님의 발자취 어느적에 사라지리까? 그 뜻 그 이름 이 겨레 하냥 만고에 전하리다.
한편 고광순 의진의 선봉장 고광수는 당시 33세의 진사로서 천석꾼의 부자였지만 재산을 모두 의병전선에 바쳤다. 뿐만 아니라 고광순 의진이 머물고 간 뒤 일제 군경이 쳐들어와 집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그도 잡혀 남원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여 강원도 산골과 충청도 해변을 유랑하며 숨어 살았다. 일제하에 숨어 살면서도 의병 가족끼리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고광수의 딸은 임실의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의 아들과 결혼하였고 고광순의 딸은 오적암살단으로 유명한 의사 기산도(奇山度)와 혼인하였다.
현재 담양군 창평의 월봉산 기슭에는 학봉(鶴峯) 고인후와 더불어 녹천 고광순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학봉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최후를 마쳤고 녹천은 지리산 피아골에서 장렬히 순곡하였다. 다같이 왜병을 상대로 한 의병장이었던 12세 조손(祖孫)이 잠든 이곳 창평 유천은 민족의 정기가 서린 성지 가운데 한 곳인 셈이다.
또한 대덕면 운산리 저심마을에 휘날리고 있는 불원복(不遠復)태극기는 임진왜란과 한말 외세를 몰아내고자 했던 선열들의 정신을 올 곧게 이어가려는 정신적 정표이며 미래의 길라잡이다.
의병모의와 1차본영, 2차본영이 있어던 대덕면 운산리 저심마을 전경
본영으로 삼았던 전주이씨 제실은 6.25전쟁때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살림집만 있은 운산리 127-1번지
100주기 추모제 때 고광순의병장 묘역
창평읍내가 휜히 보이는곳에 위치한 고광순의병장 묘
100주기 추모제때 국민의례를 하는 참석자들
100주기 추모제
순천대 홍영기교수는 100주기 추모제 강연을 통해 있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배운사람으로서의 행동하는 조선에서 노불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명문가중의 한곳이 장흥고씨 일문이라고 하였다. @www.urikong.net
이상의 글은 녹천 고광순의사 기념사업회에서 얻은 자료와 우리마을 연구를 통해 나온 자료를 혼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출처] 불원복태극기가 휘날리는 마을|작성자 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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