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 淸 閣 /조혁해
영남산(嶺南山)은 안동 시내를 어머니 품같이 감싸 않은 산이다. 산이란 우리에게 포근하고 아늑함을 안겨 주기에 그 넓은 품에 안긴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인지 안동사람들은 대쪽같이 꼿꼿한 절개로 학문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항상 마음이 넉넉하다. 넉넉한 산인 영남산은 소백산(小白山)에서부터 시작된다. 소백산에서 남진한 용맥(龍脈)이 학가산(鶴駕山)을 만들고 다시 머리를 동쪽으로 틀어 영남산의 한 봉우리를 이루더니 낙동강 반 변천과 합수되어 임청각(臨淸閣)을 만들었다. 임청각은 숲이 우거진 야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좌측에는 작은 계곡을 있고 앞에는 넉넉히 낙동강이 흐르는 (용)用자형 형국이다.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임청각은 하늘에서 일월(日月)이 지상에 내려온 형국을 하고 있다. 풍수학(風水學)에서 일월이란 무슨 뜻일까? 일은 양(陽)을 상징하고 월은 음(陰)을 상징하기에 임청각은 풍수적으로 보면 음양의 기운을 가득히 받을 수 있는 지형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임청각은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임청각은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1368~1429년)의 여섯 째 아들 영산현감 이증(李增)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기질 때문에 안동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의 셋째 아들 형조좌랑 이명(李洺:1519년)은 지금의 임청각 자리에 별당형 정자를 지은 것이다. 초기 임청각은 원래 99칸의 대저택이었으나, 일제의 중앙선 부설로 33칸 정도의 행랑채와 마당 일부가 헐려 중앙선 선로와 도로에 편입되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등의 건물을 동쪽으로 35도 정도 기울게 배치하였다. 가로로 길게 형성된 대지내의 모든 채들이 같은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치는 자연과 조화를 고려하여 지어진 것 같이 보였다. 각 동(棟) 사이에는 크고 작은 5개의 마당을 두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인 것 또한 이색적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엔 정침이 있었고, 그 우측엔 담장을 사이에 두고 군자정(君子亭)이 있었다. 군자정에 올라 낙동강을 바라보니 저 멀리 낙타산(駱駝山)이 정답게 조아리는 것처럼 보였다. 문필봉인 낙타봉이 저렇게 정답게 마주하니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님과 같은 유명한 인재를 탄생하게 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군자정은 ‘정(丁)’자형 건물로서 맞배지붕과 팔자지붕으로 건축되어 있어 그 배치가 적당히 절제되어 있는 것 같았다. 창방 위에는 ‘군자정(君子亭)’이라고 조그마한 편액이 걸려 있었고, 방안 좌측 편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님이 쓴 ‘임청각(臨淸閣)’이라는 편액이 눈에 뛰었다. 본래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에서 따온 말이라고 전해져오고 있다. 이 편액을 본 나는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 선비의 운치를 느끼게 하였다. 편액 밑에 석주 선생님의 영정이 걸려 있었으며, 방안 우측 편에는 거국령(去國呤)이 걸려 있어 그때의 일을 짐작하게 하였다. 특히 방안 맞은편에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선생님이 쓴 편액을 보니 선비의 꼿꼿한 삶을 살다간 자취에는 언제나 명분과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題臨淸閣
快閣凌敲朓望新
(헌칠한 누각 하늘을 찌를 듯 조망이 새로운데)
藏山小雨更留人
(깊은 산속 가랑비 내려 다시금 객의 발길 머물게 하네.)
華筵卜夜歡悰洽
(좋은 밤 성대한 자리, 기쁘고 즐거워 흡족한데)
勝事聯倫喜氣津
(훌륭한 일에 형제가 나란히 있어 기쁜 마음 진진하구나.)
雲樹抱村開活畵
(구름에 걸릴만한 높은 나무는 마을을 싸안고 살아 있는 그림들을 펼치며)
絲簧咽座擁嘉賓
(관악기와 현악기의 소리는 좌중에 울어대며 기쁜 손님을 끌어안는다.)
題詩不用知名姓
(시를 지어 쓰지 않아도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
過去天台賀季眞
(지난날 천태산 신선도인이 ‘계진’이라는 사람을 치하함과 같다네.)
萬曆辛卯夏 高苔軒
(만력 신묘년(1591) 여름 고태헌)
이 시는 제봉 선생님께서 임청각에 올라 누각의 아름다움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시로 승화시킨 것 같았다. 특히 그의 시에서 “훌륭한 일에 형제가 나란히 있어 기쁜 마음 진지하다”는 시구에서 어려웠던 그때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제의 침략기에 석주 선생님은 사돈인 제봉 선생님을 만나 사돈을 넘어 형제애를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의인들은 가고 없건만 집 앞을 지나가는 기차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군자정 바로 옆에 방형(方形) 연못을 보니 옛 영화를 짐작하게 할 수 있었고, 오른쪽 언덕 위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당에는 원래 불천위와 함께 4대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던 곳이다. 석주 선생님이 일제를 피해 서간도를 떠날 때 모든 위패를 땅에 묻어, 현재 봉안된 위패는 없다는 것이다. 위패는 현대를 사는 나에게 많을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조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크던 작던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더 큰 것으로 승화된다는 것을……
임청각 이라는 당호는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 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애서 지를 짓는다.”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는 시구(詩句)에서. (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지에 이하면 “ 임청각 은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樓)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청각에 딸린 별당 형 정자인 군자정은 사대부가의 별당 형 정자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정자(丁字)형 건물로 대청에 올라서면 천정에 단청을 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1767년 허주공이 대대적으로 중수를 하고 중수기를 남겼는데 이에 의하면 칠대조가 단청을 하였고 병인년이라고 하였으니 이때가 임진왜란 후인 1626년이다. 벽에는 聾巖(李賢輔) 高苔軒(高敬命) 松崗(趙士秀) 白沙(尹暄) 의 시판이 걸려 있다. 특히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인 으로 당시 임청각 주인(李復元)과는 사돈(長子 高從厚가 李復元의 사위)이 되니 오늘날 입으로 영호남 차별해소 운운(云云)하는 것과 한번 비교해 볼 문제이며 불행이도 다음해 발발한 임진왜란 때 삼부자(霽峯 高敬命 隼峯 高從厚 鶴峯 高仁厚)가 순국(殉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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