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臨 淸 閣

高 山 芝 2011. 6. 14. 16:50

 

臨  淸  閣 /조혁해


  영남산(嶺南山)은 안동 시내를 어머니 품같이 감싸 않은 산이다. 산이란 우리에게 포근하고 아늑함을 안겨 주기에 그 넓은 품에 안긴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인지 안동사람들은 대쪽같이 꼿꼿한 절개로 학문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항상 마음이 넉넉하다. 넉넉한 산인 영남산은 소백산(小白山)에서부터 시작된다. 소백산에서 남진한 용맥(龍脈)이 학가산(鶴駕山)을 만들고 다시 머리를 동쪽으로 틀어 영남산의 한 봉우리를 이루더니 낙동강 반 변천과 합수되어 임청각(臨淸閣)을 만들었다. 임청각은 숲이 우거진 야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좌측에는 작은 계곡을 있고 앞에는 넉넉히 낙동강이 흐르는 (용)用자형 형국이다.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임청각은 하늘에서 일월(日月)이 지상에 내려온 형국을 하고 있다. 풍수학(風水學)에서 일월이란 무슨 뜻일까? 일은 양(陽)을 상징하고 월은 음(陰)을 상징하기에 임청각은 풍수적으로 보면 음양의 기운을 가득히 받을 수 있는 지형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임청각은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임청각은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1368~1429년)의 여섯 째 아들 영산현감 이증(李增)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기질 때문에 안동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의 셋째 아들 형조좌랑 이명(李洺:1519년)은 지금의 임청각 자리에 별당형 정자를 지은 것이다. 초기 임청각은 원래 99칸의 대저택이었으나, 일제의 중앙선 부설로 33칸 정도의 행랑채와 마당 일부가 헐려 중앙선 선로와 도로에 편입되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등의 건물을 동쪽으로 35도 정도 기울게 배치하였다. 가로로 길게 형성된 대지내의 모든 채들이 같은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치는 자연과 조화를 고려하여 지어진 것 같이 보였다. 각 동(棟) 사이에는 크고 작은 5개의 마당을 두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인 것 또한 이색적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엔 정침이 있었고, 그 우측엔 담장을 사이에 두고 군자정(君子亭)이 있었다. 군자정에 올라 낙동강을 바라보니 저 멀리 낙타산(駱駝山)이 정답게 조아리는 것처럼 보였다. 문필봉인 낙타봉이 저렇게 정답게 마주하니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님과 같은 유명한 인재를 탄생하게 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군자정은 ‘정(丁)’자형 건물로서 맞배지붕과 팔자지붕으로 건축되어 있어 그 배치가 적당히 절제되어 있는 것 같았다. 창방 위에는 ‘군자정(君子亭)’이라고 조그마한 편액이 걸려 있었고, 방안 좌측 편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님이 쓴 ‘임청각(臨淸閣)’이라는 편액이 눈에 뛰었다. 본래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에서 따온 말이라고 전해져오고 있다. 이 편액을 본 나는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 선비의 운치를 느끼게 하였다. 편액 밑에 석주 선생님의 영정이 걸려 있었으며, 방안 우측 편에는 거국령(去國呤)이 걸려 있어 그때의 일을 짐작하게 하였다. 특히 방안 맞은편에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선생님이 쓴 편액을 보니 선비의 꼿꼿한 삶을 살다간 자취에는 언제나 명분과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題臨淸閣             

  

快閣凌敲朓望新      

(헌칠한 누각 하늘을 찌를 듯 조망이 새로운데)

藏山小雨更留人      

(깊은 산속 가랑비 내려 다시금 객의 발길 머물게 하네.)

華筵卜夜歡悰洽           

(좋은 밤 성대한 자리, 기쁘고 즐거워 흡족한데)

勝事聯倫喜氣津           

(훌륭한 일에 형제가 나란히 있어 기쁜 마음 진진하구나.)

雲樹抱村開活畵           

(구름에 걸릴만한 높은 나무는 마을을 싸안고 살아 있는 그림들을 펼치며)

絲簧咽座擁嘉賓           

(관악기와 현악기의 소리는 좌중에 울어대며 기쁜 손님을 끌어안는다.)

題詩不用知名姓           

(시를 지어 쓰지 않아도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

過去天台賀季眞           

(지난날 천태산 신선도인이 ‘계진’이라는 사람을 치하함과 같다네.)


萬曆辛卯夏 高苔軒      

(만력 신묘년(1591) 여름 고태헌)


  이 시는 제봉 선생님께서 임청각에 올라 누각의 아름다움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시로 승화시킨 것 같았다. 특히 그의 시에서 “훌륭한 일에 형제가 나란히 있어 기쁜 마음 진지하다”는 시구에서 어려웠던 그때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제의 침략기에 석주 선생님은 사돈인 제봉 선생님을 만나 사돈을 넘어 형제애를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의인들은 가고 없건만 집 앞을 지나가는 기차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군자정 바로 옆에 방형(方形) 연못을 보니 옛 영화를 짐작하게 할 수 있었고, 오른쪽 언덕 위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당에는 원래 불천위와 함께 4대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던 곳이다. 석주 선생님이 일제를 피해 서간도를 떠날 때 모든 위패를 땅에 묻어, 현재 봉안된 위패는 없다는 것이다. 위패는 현대를 사는 나에게 많을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조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크던 작던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더 큰 것으로 승화된다는 것을……

 

임청각(臨淸閣)
 
(寶物 제 182호)
 
  임청각은 중종14년(1519년)에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시 법흥동의 고성이씨 종택(宗宅)이다. 세칭 99칸 이라는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君子亭)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임진왜란(1592년) 때는 명(明)나라 군대가 주둔 하였는데 이때 일부가 소실되어 난(亂)이 끝난 후 1626년 복구하였다.
 
  1763년 4월 4일에 당시 臨淸閣의 주인이던 허주(李宗岳1726-1773)공이 그린 그림이 남아있어 옛날의 윤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중앙선철도 부설 때 독립운동가의 소굴이라 하여 전체가 없어질 번하다가 일부 부속건물이 철거당하고 마당으로 철로가 지나가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고도 이렇게 남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1950년 6, 25를 전후하여서는 안동철도국 노무자 집단 주택으로 사용되어 훼손됨이 심했는데 안동철도국이 영주로 옮겨진 후 1975년 해체복원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집의 연혁은 세종 때 좌상을 지낸 용헌공(李原)의 여섯 째 아들(李增)이 영산현감(李增) 지냈는데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손위(遜位)함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자리 잡으므로 입향조(入鄕祖)가 되었고, 그의 셋째 아들인 이명(李洺)또한 의흥 현감을 지내다가 일찍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지은 별당 형 건물이다.

 임청각 이라는 당호는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 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애서 지를 짓는다.”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는 시구(詩句)에서. (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지에 이하면 “ 임청각 은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樓)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등의 건물을 배치하여 어느 방에서나 오전 오후 언제나 햇빛이 들도록 채광효과를 높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 집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에 정침(正寢)이 있고 우 측에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군자정이 위치한다. 군자정 바로 옆에는 방형(方形)의 연못이 있고 연못 언덕위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침 마당에는 바닥이 보이는 한길가량 되는 우물이 있는데 흙으로 된 바닥이 아니고 청석(靑石)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우물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바위위에 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각동사이에는 크고 작은 5개의 마당을 두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고 단충이면서도 이층구조로 설계되어 위쪽으로는 다락이나 다용도실로 이용하였다.
 
  임청각에 딸린 별당 형 정자인 군자정은 사대부가의 별당 형 정자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정자(丁字)형 건물로 대청에 올라서면 천정에 단청을 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1767년 허주공이 대대적으로 중수를 하고 중수기를 남겼는데 이에 의하면 칠대조가 단청을 하였고 병인년이라고 하였으니 이때가 임진왜란 후인 1626년이다. 벽에는 聾巖(李賢輔) 高苔軒(高敬命) 松崗(趙士秀) 白沙(尹暄) 의 시판이 걸려 있다. 특히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인 으로    당시 임청각 주인(李復元)과는 사돈(長子 高從厚가 李復元의 사위)이 되니 오늘날 입으로 영호남 차별해소 운운(云云)하는 것과 한번 비교해 볼 문제이며 불행이도 다음해 발발한 임진왜란 때 삼부자(霽峯 高敬命 隼峯 高從厚 鶴峯 高仁厚)가 순국(殉國)하였다.
  정자 옆에 연지(蓮池)를 조성하여 군자를 표상하는 연꽃을 심었다. 연못에 핀 연꽃을 바라보면서 군자로서의 심성을 닦고자 하였다. 정자 옆 방지(方池)를 지나면 정면 3칸 축면 2칸 크기의 사당이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사당에는 원래 4대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 옆에는 불천위를 모시는 별묘(別廟)가 있었으나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1858-1932)선생이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가 없어졌는데 사당(祠堂)만 지킬 수 없다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장주(藏主) 하여 현재 봉안된 신위가 없다.
 
 집을 짓는 데 있어 그 평면구성을 일. 월. 길(日 月 吉) 등의 글자를 취해 지으면 좋다고 하는데 임청각의 평면구성을 보면 일(日)자. 월(月)자 또는 그 합형(合刑)인 용(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일(日) 형과 월(月)형, 용자 형은 하늘의 일월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生氣)를 받으려는 의미를 가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팔작지붕은 한 마리의 새가 날개 짓 하는 형상을 한 것이다.
 
  그동안 이 집에 소장되었던 유물과 문적들은 주인 따라 임청각과 선영을 오르내리다가 석주 선생에서부터 주손(冑孫) 3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敍勳)을 받은 독립투사의 집으로 이로 주손 4대가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희생된 후 주인 잃은 유물들이 수십 년간 지키는 이 없는 선영(안동 시 와룡 면 도곡리 ; 현재 수몰지역이 되었음)서실에서 분실 혹은 훼손되다가 유족이 철이 들 무렵에 안동 땜 건설이 진행되어 문집종류는 1973년에 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에 기증 되어 있으며 남은 고문서와 유물. 간찰들은 1990년대에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기탁되어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임청각 우물 방에는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속설이 있으나 본 손은 없다. 그러나 나라가 암울(暗鬱)한 일제강점기 그 방에서 국가원수인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石洲 李相龍 선생과 아들(東邱 李濬衡) 손자(小破 李炳華) 등 9명의 애국지사가 태어났다.  
 
 * 일제의 영향아래 간섭을 받던 시기(1895-1910)와 직접 지배를 받던 시기(1910-1945)가 50년이나 되었고 광복을 맞은 지도 60년이 넘었으나 이 집의 곳곳에는 항일투쟁의 상흔(傷痕)이 너무 깊게 파여 있다. 소유권(건물 대지 임야)이 갈기갈기 찢어져 회복되지 않고 있으며 임청각 대지를 가로지른 중앙선철로 등 아직도 일제강점기에서 치유되기도 전에 세계정세는 백 년 전의 재판(再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이 집은 앞으로 대한민국과 함께 영구히 보존되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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