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洋學 第37輯(2005年 2月)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高敬命 漢詩의 風格 硏究
卞 鍾 鉉
<국문초록>
이 논문은 霽峯 高敬命(1533~1592) 한시의 風格을 연구한 것이다. 우리 선인들은
제봉의 시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있음을 인정하였고, 제봉 스스로도
자신이 이룩한 시적인 경지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제봉시를 ?平淡?․?濃麗?․?豪放?등 세 가지 풍격으로 살펴보았다
제봉의 시 가운데 平淡한 풍격을 드러내고 있는 시들은 대체로 자연의 이치를 탐색하면서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심경을 노래하는 시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제봉은 고향으로 내려간 뒤, 좋은 때를 만나면 물상의 이치를 탐색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기쁨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다.
宮詞 계열의 작품들은 궁중이나 여염에서 있을 수 있는 여인의 한을 상상을 통해 그려내었는데, 이러한 시들은 대체로 濃麗한 풍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에 쓴 시들은 시 내면 공간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내고 있다. 이외에도 궁중의 연회나 궁안에서 치루는 연례 행사 때 지은 宮體詩는 濃麗한 풍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濃麗한 시는 宮體詩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晩唐의 綺靡한 풍격의 시와도 관련이 깊다고 여겨진다.
豪放한 풍격의 시는 唐詩에 많이 드러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두보나 이백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방한 시는 천지간에 충만해 있는 浩然한 氣를 자신의 기상으로 길러낸 시인이, 어떤 적절한 계기(登臨․樓亭․醉時)에 內我에 충만한 氣를 마음껏 표출할 때 드러나는 풍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선인들은 시를 지을 때 豪放한 풍격의 시를 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특히 술을 마시거나 명승지에 登臨했을 때 이러한 시를 지었다. 제봉은 평소에 임억령의 인품이나 시적인 경지에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임억령은 이백과 장자에 심취하여 豪放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제봉도 樓亭詩나 醉時歌에서 豪放한 심경을 표출하였다.
이상의 세 가지 풍격 가운데 두드러지는 풍격은 濃麗라 할 수 있다. 濃麗한 시는 晩唐 시기의 綺靡한 풍격과 서로 통하고, 豪放한 풍격은 盛唐詩에 잘 나타나는 풍격이다. 이런 면에서 제봉 시의 풍격은 唐詩風을 띠고 잇으면서, 고향에서 소일할 때는 자연의 理法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平淡한 풍격의 시를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平淡?과 ?濃麗?는 상반되는 풍격이라 할 수 있으나, 시인이 처한 정치적 위상이나 창작의 계기에 따라 두 가지 풍격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 차>
Ⅰ. 머리말 Ⅱ. 諸家의 評 Ⅲ. 霽峯 詩의 風格 1) 平淡 |
|
2) 濃麗 3) 豪放 Ⅳ. 맺음말 |
Ⅰ. 머리말
霽峰 高敬命(1533~1592)은 光州 鴨保村에서 태어나서 선조 25년에 세상을 떠난 문인이며 의병장이었다. 명종 13년(1558)에 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하여 成均館典籍에 임명되고, 29세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명종은 문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御題를 내려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명종에게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1563년에 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弘文館 校理로서 이 논의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장인인 金百鈞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蔚山郡守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직되었다. 이 사건은 그를 顯達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였고, 그 이후 고향인 광주와 담양 등지를 오가며 그 당시 호남의 문인들과 교유하며 시와 술로 소일하게 되었다. - 20 -
선조 14년(1581) 靈巖郡守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宗系辨誣奏請使 金繼輝의 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3년에는 漢城府庶尹 韓山郡守를 거쳐 禮曹正郞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司僕寺僉正이 된 뒤 成均館司藝를 거쳐 淳昌郡守로 재직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承文院判校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東萊府使가 되었으나 곧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제봉은 이 기간 동안 호남 일대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던 것 같다.
그 당시 호남에는 長城에 金麟厚, 潭陽에 宋純 등이 거주하고 있었고, 송순의 문하에 朴淳․奇大升․高敬命․鄭澈․林悌 등이 출입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담양의 息影亭과 瀟灑園을 중심으로 林億齡․金成遠․梁子淳 등과 교유하면서 자신의 학문세계를 넓힐 수가 있었다. 특히 石川 林億齡은 그의 스승으로 제봉의 학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제봉집』에 김성원과 교유한 시가 30여제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성원과는 매우 절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성원이 1560년에 지은 息影亭에서 문인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듯 하고 이러한 배경에서 지은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제봉은 瀟灑園의 주인 梁山甫의 아들 子淳과도 오랫동안 함께 교유하며 지냈고, 鄭澈․奇
大升과도 가깝게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 21 -
특히 송강과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송강의 정치적 浮沈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양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천여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하였다.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장에 추대된 그는 의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다가 금산에서 왜적과 전투를 하던 중 전사하였다. 광주의 襃忠祠, 금산의 星谷書院, 순창의 花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시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이름을 떨쳤고, 저서로는 『霽峰集』, 무등산 기행문인 『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正氣錄』등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라 南平縣監으로 있던 白仁傑이 그를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다. 그의 남아 있는 시들을 보면 유람을 하거나 여정 중에 쓴 시들이 많다. 특히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가면서 쓴 시들은 『霽峰集』권 4에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회포를 쓴 시들이 많다.
그리고 연작시 형태의 樓亭詩와 題畵詩를 많이 창작하였는데,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는 문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하였고, 시와 그림의 상관성에 대해 관심을 많았던 것 같다. 연작 누정시로는 <俛仰亭三十詠>․<息影亭四時歌和高峯>․<晩翠亭十詠>․<息影亭二十詠> 등이 있고, 제화시로는 <應製御屛六十二詠>․<題半刺畵竹圖> 등이 있다. 이밖에 <蒼浪六詠>․<茅山八景)>․<春湖十詠>․<木浦八詠> 등도 연작시 형태로 되어 있다.
고경명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임란시 의병장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주목했을 뿐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가 이종찬의 「고경명론」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종찬은 제봉 시 가운데 제화시인 <應製御屛六十二詠>을 대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박은숙은 고경명의 交遊詩를 고찰하여 그의 시는 스승인 林億齡의 시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豪放한 시풍과 閑雅한 시풍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 학위 논문에서도 이러한 논의를 발전시켜 제봉 시의 풍격을 濃麗․富盛하고 平淡․眞率한 풍격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 필자도 제봉 시를 唐詩風的 특질에 주안하여 살펴본 바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의 연구 업적을 토대로 제봉 한시의 풍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諸家의 評
제봉에 대해 우리 선인들은 대체로 시적 형상화가 뛰어난 시인으로 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 선인들은 제봉집 서문이나 시화집 등에서 제봉이 이룩한 시적인 경지를 形象的 비유를 통해 나타내기도 하고, 두 자 내지는 네 자로 이루어진 寸評式 용어를 통해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글을 대체로 인상비평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우리 선인들의 한시에 대한 깊은 심미안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어서 면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는 제봉 시에 대한 선인들의 평을 살펴 풍격 연구의 단초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 22 -
1) 공의 시가 간행되기를 기다리며 나의 靑石床 위에 두었는데, 남은 여운이 진동하여 여러 골짜기에 울렸다. 수없이 외우니 三天에 오르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2) 고경명이 임란 때 의병장이 되었는데 양경우가 서기의 임무를 맡았다. 군사에 관한 일을 하는 여가에 그들의 대화가 시를 논하는데 이르게 되자 제봉이 이달 시의 격조를 칭송하여 ?세상에서 손곡과 짝할 이가 드물다.?고 하니, 양경우가 말하기를, ?손곡의 시는 晩唐風을 따르는 까닭에 한 편 한 구는 읊조릴만 하지만 어찌 합하의 濃麗․富盛한 풍격에 비하겠습니까??라 하였다. 제봉이 말하기를, ?그 우열에 대하여 어찌 쉽게 말하겠는가? 7언 율시나 배율 등의 작품에서는 내가 손곡에게 양보하지 않겠다. 그러나 오언율시나 절구에 이르러서는 결코 손곡에 미치지 못한다. 옛날 내가 서산군수로 있을 때 사랑방에다 손곡을 맞이해 놓고, 여러 달 묵게 하고는 더불어 시를 창화하였다네. 절구를 지을 때마다 宋人의 체를 그 사이에 섞을 수가 없어서 창졸간에 唐風을 배우게 되었으나 반은 진실되고 반은 거짓된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일세.?라고 하였다.
3) 내가 그의 물상을 읊조리고 경물을 어루만진 것을 살펴보니 生韻이 流動하는 것이 마치 촉강 봄날에 卓文君이 비단을 빨래하는 것 같고, 또 왕유의 輞川詩 중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것과 같다.
4) 苔軒은 약관의 나이에 이미 시로 명성이 있었고, 남다른 재주로 書史에 힘을 쏟은 지 오래되었다. 그의 시가 사람들의 입에 전파된 것은 俊逸하고 圓轉하여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경지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5) 바람과 이슬을 읊으며, 은하수를 밟고 노을을 오르는 듯하네
1)은 이항복의 평으로 제봉의 시가 아름다워 두루 읽어 보았는데 三天에 오르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三天은 道家에서 말하는 淸微天․萬餘天․大赤天을 말하는데, 제봉의 시에는 遊仙詞 같은 계열의 작품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2)는 『소화시평』에 나오는 기록인데, 여기서 제봉이 양경우와 나눈 대화를 보면 제봉은 이달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자 양경우는 오히려 제봉의 시가 濃麗․富盛하여 손곡의 시보다도 낫다고 평하자, 제봉은 칠언율시나 배율 등은 손곡에게 양보하지 않겠지마는, 오언율시나 절구는 결코 손곡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서산군수로 재직중에는 사랑방에다 손곡을 맞이해 놓고 여러 달 그와 더불어 시를 唱和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제봉은 손곡의 시적인 경지를 높이 평가하였고, 唐詩를 시의 절대적 경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양경우는 제봉 시의 특질을 ?濃麗․富盛?하다고 하였는데, ?濃麗?하다는 것은 제봉 시의 시 분위기가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뜻이고, ?富盛?하다는 것은 시의 내용이 넉넉하게 표현되었다는 말이다. - 23 -
3)은 明나라 莊應會가 평한 말로, 제봉의 시는 生韻이 流動하는 것이 마치 蜀江 봄날에 卓文君이 비단을 빨래하는 것 같고, 또 왕유의 輞川詩 중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제봉 시의 풍격이 곱고 아름답게 형성되어 있다는 평이다. 실제로 제봉은 제화시를 많이 창작하였는데,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는 시와 그림의 상관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4)는 유근의 평으로, 제봉의 시가 ?俊逸?하고 ?圓轉?하여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경지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俊逸?하다는 말은 시의 율격이나 형식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며, ?圓轉?은 시의 내용이 잘 구성되어 있다는 말로 여겨진다.
5)는 김석주가 평한 말로, ?바람과 이슬을 읊으며, 은하수를 밟고 노을을 오르는 듯하네(吟風吹露, 躋漢騰霞)?라 하여, 形象的 비유를 통하여 제봉 시가 맑고 아름답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南龍翼은 『壺谷詩話』에서 제봉의 시가 ‘穠富’하다고 하였다.
이상의 제가의 평에서 살펴 보았듯이 우리 선인들은 제봉의 시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고, 제봉 스스로도 자신이 이룩한 시적인 경지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제봉시의 풍격적 특징으로?濃麗․富盛?(양경우), ?俊逸․圓轉?(유근), ‘穠富’(남용익) 등의 용어들이 거론되었다. 이 가운데 ?濃麗․富盛?과 ‘穠富?은 서로 상통하는 평어로 제봉시의 내면이 곱고 아름다우면서 내용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유근이 평한 ?俊逸․圓轉?은 시의 율격이 잘 형성되어 있으면서 시의 내용이 원만하게 잘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나, 이러한 면을 실제 시 작품을 통하여 실증하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제가의 평 가운데 양경우와 남경우의 평어에 주목하여 제봉 시의 풍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 霽峯 詩의 風格
고경명이 활동하던 16세기 후반은 성리학이 우리 사상사에서 뿌리를 내리며 발전하던 시기였다. 특히 李滉(1501~1570)과 李珥(1536~1584)는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한시를 통해 구현하기도 하고, 시조 작품인 <陶山十二曲>과 <高山九曲歌>를 통해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제봉도 성리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쓴 시 작품들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시들은 대체로 觀物과 修養에 힘썼던 자신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제봉은 이량 사건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뒤, 좋은 때를 만나면 물상의 이치를 탐색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기쁨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平淡한 풍격을 띠고 있다. 또한 제가의 평에서 살펴 보았듯이 제봉의 시는 濃麗․富盛하여 시의 내면이 곱고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봉의 스승인 임억령은 이백과 장자에 심취하여 豪放하고 氣健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제봉은 임억령의 이러한 시풍에 상당히 경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이상의 몇 가지 사실들에 주안하여 제봉의 시를 ?平淡?․?濃麗?․?豪放?등 세 가지 풍격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24 -
1) 平淡
平淡은 ?平易淡泊?으로 시어를 平易하게 사용하면서 淡泊하게 쓴 풍 격이다. 따라서 이러한 풍격의 시는 수양과 성찰에 힘을 썼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나 승려들의 시에 많이 나타난다. 제봉의 시에서도 성리학적 사유체계를 드러낸 작품들이 있는데, 이러한 시에서 제봉은 만물의 이치를 탐색하고 수양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다음 <觀魚臺>와 <土亭見示所著寡慾論且戒酒邀以一言敢述鄙懷>는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觀魚臺(관어대에서)>
漣漪風定浸臺前 바람 자고 잔 물결 대 앞에 밀려 오는데
閑看遊鯈鏡裡天 한가로이 거울 속 하늘에서 노는 피라미 바라보네
雲錦靜鋪潛伏矣 구름 비단 가만히 펴며 엎드려 있다가
金俊忽擲逝攸然 금빛 북 문득 던지며 유유히 가고 있네
物爲吾與初無間 사물과 나 애당초에 간격이 없었으니
樂到想忘始是全 즐겨 서로 잊어야만 비로소 온전해지네
魚躍斷章眞喫緊 어약연비 짧은 문장 진정으로 긴절하니
濠梁休問漆園仙 호수 다리에서 장자 낙을 묻지 말아야지.
이 시는 ?觀魚?를 통해 만물의 이치가 구현되어 있는 모습을 읊조리고 있다. 즉 이 시는 『中庸』제 12장과 『詩經』大雅 旱麓편에 나오는 ?鳶飛戾天, 魚躍于淵?의 妙理를 시로 읊은 것이다. 이 시는 고려말 圃隱의 <湖中觀魚>라는 시에 나타난 시상과 비슷한 경지를 노래하였는데, ?觀魚?는 예로부터 선비들의 觀物의 한 방편으로 많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제봉은 ?鳶飛魚躍?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장자와 혜자가 호숫가 다리 위에서 문답한 내용을 배격하고 있다. 경련에서는 觀魚를 통해 체득된 성리학적 사유에 대해 읊조리고 있다. 즉 관어대에서 거울같이 잔잔한 물 속에서 노는 피라미들을 관찰하면서 만물에 구현된 이치를 체득하고, 물과 내가 간격이 없이 일체를 이루고 相忘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물과 내가 온전한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 25 -
이 시는 觀魚를 통해 觀物의 이치를 窮究하고자 하는 경지를 잂은 시인데, 이러한 <觀物>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은 소옹의 <觀物> 內外篇에 잘 나타나 있다. 소옹은 觀物의 단계를 目觀․心觀․理觀의 단계를 설정해 놓고, 참다운 관물은 目觀과 心觀을 넘어서서 이치로 사물을 관찰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천하 만물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은 곧 나의 性 속에 있는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觀物할 때는 사물의 어떤 계기(時機)를 관찰해야 物理를 알 수 있게 되고, 敬을 주로 해야 天眞함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면에서 觀魚는 物理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됨을 알 수 있고, 觀魚를 통해 鳶飛와 魚躍의 이치를 터득하고, 그 깨달음을 다른 사물에까지 확장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土亭見示所著寡慾論且戒酒邀以一言敢述鄙懷(토정이 지은 寡慾論과 戒酒文을 보여 주면서 한 마디를 요구하기에 감히 비천한 생각을 술회함)>
混然明命本無私 혼연한 밝은 천명 본래 사사로움 없으나
形氣於人有梏之 形과 氣는 사람에게 질곡이 된다네
慾到寡時方得力 人慾이 적어지면 바야흐로 힘을 얻게 되고
心才放後便成危 마음이 방종한 후엔 문득 위태로워지네
狂瀾止水非他物 미친 물결 고요한 물 다른 사물 아니며
悍馬銛鋒未易持 거센 말과 예리한 칼 지니기가 어렵다네
最是性偏難克處 성이 치우친 것 가장 극복하기 어려우니
一言終不負嚴規 한 마디로 끝내 엄한 규범 어기지 않으리.
이 시는 제봉이 고향에서 불우하게 지낼 때 李之菡이 지은 <寡慾論>과 <戒酒文>을 보고 토정의 부탁으로 지은 시이다. 이 시에서는 수련에서 미련까지 한결같이 성리학적 이치에 바탕을 둔 수양과 성찰의 자세에 대해 읊조리고 있다. 즉 天命은 본래 사사로움이 없으나 사람에게 形과 氣가 질곡이 되어 人慾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寡慾이 필요하게 되고 마음이 방종하게 되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孟子, 盡心 下』에서는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慾)?고 하였다. 욕망은 사람이 없을 수 없는 것이나 많이 하고 절제하지 않는다면 그 본심을 잃지 않는 자가 없으니,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토정은 <寡慾論>을 통해 맹자가 말한 ?養心莫善於寡慾?을 되새기면서 寡慾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제봉도 寡慾이 수양의 첫 단계임을 읊조리고 있다. - 26 -
경련은 사물의 본질과 인격 수양에 대한 내용을 비유적 표현으로 나타내었다. 狂瀾과 止水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물이며, 거센 말(悍馬)과 예리한 칼(銛鋒)은 지니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悍馬와 銛鋒는 사물의 性이 치우친 것을 나타내는데, 사람의 성품도 치우친 것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우니, 엄한 규범을 어기지 않아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는 제봉이 이량 사건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뒤 자신이 겼었던 심각한 내적 갈등과 관련이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이량 사건이 있은 후 제봉은 고향에서 그 당시 호남 문인들과 교유하며 지내게 되었는데, 이 시는 이러한 시점에서 자신이 사사로운 욕망을 줄이고 엄한 규범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제봉은 서른 한 살(1563년) 가을에 고향인 광주로 돌아가 마흔 아홉 살(1581)에 다시 등용될 때까지 18년간의 긴 세월을 심적 갈등을 겪으며 지냈다. 제봉은 이 기간 동안 담양의 息影亭과 瀟灑園을 중심으로 金成遠․梁子淳 등과 교유하였는데, 식영정과 소쇄원에서 지은 시들은 平淡한 풍격의 시들이 많다. 그리고 제봉은 자연 속에서 내적 갈등을 해소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탐색하면서 物我一體의 기쁨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다음 시는 네 수의 연작시 가운데 한 수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을 그려서 偉元 朴春豪에게 보여주고 있다.
<述懷示偉元(회포를 써서 위원에게 보여줌)>
籬落東西瀼 마을에는 동서로 물이 흐르고
溪山大小茅 시내 산엔 크고 작은 띠집들 있네
峽開帆影轉 산골 열려 돛 그림자 돌아 나가고
川抱柳陰交 냇물가에 버들 그늘 어울어졌네
倚醉烟簑脫 취한 김에 도롱이도 벗어 버리고
和眠釣竹抛 잠에 빠져 대 낚시도 버리지마는
山童能解事 산 아이는 제 할 일을 잘도 알아서
茶臼隔雲敲 구름 저편 차 절구질 하고 있다오.
이 시는 산골 마을에서 주변의 아름다운 산수 자연의 경관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수련과 함련에서는 자신이 거하고 있는 주변 풍광에 대해 읊었다. 마을 동서쪽으로는 물이 흐르고, 시내와 산에는 크고 작은 띠집이 늘어서 있다. 계곡 열려진 곳으로는 돛 그림자 돌아나가고, 시내가에는 버들 그늘이 늘어져 있다. 경련과 미련에서는 그러한 공간적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취한 김에 안개비 내릴 때 입었던 도롱이도 벗어 버리고, 잠에 빠져 낚싯대도 던져버렸다고 하였으니, 그야말로 자연과 일체감을 이루며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 모습을 잘 형용하였다. 거기다가 산 아이는 혼자서도 일을 잘 해, 차 절구질 하는 소리가 구름 저편에서 들려올 것이라 하여, 탈속적 공간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화자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 27 -
이 시에서 수련과 함련에서는 소박하고 수려한 산골 마을의 분위기를 제시하였고, 경련과 미련에서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적 주체가 자연과 동화되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노래하였다.
<詠黃白二菊(노란 국화와 하얀 국화를 두고 읊음)>
正色黃爲貴 정색으론 노란 빛이 귀한 거지만
天姿白亦奇 천연으론 하얀 빛도 기이하구나
世人看自別 세인들은 보길 스스로 구별하지만
均是傲霜枝 모두 함께 서리 이길 가지들이지.
이 시는 황색과 백색 두 국화가 핀 모습을 보고 읊은 詠物詩로 국화의 본질적인 기상을 중시하여 읊었다. 기구와 승구는 국화에 대한 일반적 얘기로, 국화의 빛깔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황색은 정색으로 다섯 방위 가운데 중앙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귀한 빛깔이고, 흰색은 천연스런 빛깔이기에 기이한 빛깔이라는 것이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色彩라는 국화의 외양적 가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노란 국화와 하얀 국화를 제 각기 다른 국화로 바라 보지만 자신이 볼 때에는 한결같이 서리를 이기고 피어난 꽃들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노란 국화를 소중하게 인식하여 국화의 가치를 외양으로 따지는데, 진정한 가치는 내적인 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국화는 다른 꽃과는 달리 무서리를 맞고서 피어나기에, 두 국화가 비록 色彩는 다르지마는 傲霜孤節의 주체로서 손색이 없기에 그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조용한 어조로 노래하였다. 여기서는 국화가 처음부터 제봉에 의해 의미있는 소재로 선택되었고, 그래서 국화에 인격을 부여하여 시의 화자는 平易하고 淡淡한 목소리로 물상의 내면적 가치에 대해 읊조리고 있다.
<雨中吟(비가 오는 가운데 읊조림)>
隨風好雨最知時 바람 따라 내리는 비 가장 때를 아는지라
桃杏舒紅柳展眉 복사꽃 살구꽃 붉게 피고 버들개지 눈을 떳네
春服欲成身亦健 봄옷이 다 되어 가니 몸도 또한 건강해져
意行何處不相宜 마음 먹고 어딜 간들 좋지 않으리.
天氣輕烟細雨時 날씨는 옅은 안개 가랑비 내리는 때
遠山濃翠泛脩眉 먼 산은 짙 푸른 채 긴 눈섭 띄워놓은 듯
行吟晩過南溪路 다니며 시 읊다가 느즈막히 앞 시내길 찾아가
問柳尋花事摠宜 버들 찾고 꽃 찾으니 일마다 모두 좋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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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 자신의 내면도 봄의 물상처럼 새로운 기운으로 유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봄날 비가 올 때 풍광을 그려내었다. 옅은 안개가 끼어있고 가랑비가 내리는 때 먼 산은 짙 푸른 채 긴 눈섭을 띄워놓은 듯 아름답다. 이러한 때 시를 읊조리며 앞 시내를 찾아가 버들 찾고 꽃 찾으니 일마다 모두 좋기만 하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봄비 오는 날 앞 시내를 찾아가 봄기운을 마음껏 누리며 봄기운에 동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봉은 이 시를 통하여 봄날의 맑고 生動하는 기운이 넘치는 물상의 모습을 완상하면서, 스스로도 맑고 깨끗한 봄날 風光의 주인이 되어 있음을 노래하였다.
<漁舟圖(고깃배 그림을 보고)>
蘆洲風颭雪漫空 갈대밭에 바람 불자 눈꽃인양 날리는데
沽酒歸來繫短篷 술을 사서 돌아왔나 작은 배가 매여 있네
橫笛數聲江月白 몇 마디의 저 소리에 강에 달빛 환한데
宿禽飛起渚烟中 자던 새는 물가에 낀 안개 속을 솟구치네.
이 시는 가을 강가에 눈꽃처럼 날리는 갈대꽃과 갈대밭에 매여 있는 고깃배, 그리고 달빛 속을 날아가는 기러기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쓴 題畵詩이다. 기구와 승구에서는 갈대밭에 바람이 불어오자 갈대꽃이 눈꽃처럼 날리고 작은 배가 갈대꽃 속에 매여져 있음을 묘사하였다. 기구의 ?雪漫空?은 문자적 의미로는?하늘 가득 눈이 날린다?는 표현이나 실제로는 하늘 가득 날리는 갈대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형용하였다. 그림 속에는 고깃배 주인이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배의 주인은 술을 사서 돌아온 것으로 형용하였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아름다운 강가의 밤 풍경을 묘사하여, 술 마시기 좋은 분위기를 설정하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몇 마디의 피리 소리에 강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자던 새도 잠을 깨어 물가 안개 속을 솟구쳐 날아다닌다고 하였다. 여기서 몇 마디의 저 소리와 환한 달빛은 그림의 경지를 孤高한 분위기로 상승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고, 갈대밭 속에서 자던 새는 기러기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림은 蘆雁圖라 볼 수 있다.
『小華詩評』에서는, ?이 시의 聲韻과 格律이 당나라 시인들에 매우 가까우니, 어찌 반쯤 거짓이라 하겠는가? 공이 대개 스스로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唐詩는 대체로 정감적인 표현에 치중하다 보니 거짓된 감정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시는 고깃배 그림에 나타난 정취가 매우 아름답고 진실된 경지를 읊었다는 평가이다. 이 시는 제화시이나 마치 눈 앞에 경물을 바라보는 듯 逼眞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데, 시의 화자는 가을 강가 갈대밭에 정박해 있는 작은 배의 주인이 아름다운 가을 정취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경지를 그려내었는데, 시 전체적으로 平淡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 29 -
이상에서 제봉의 시 가운데 平淡한 풍격을 드러내고 있는 시들을 살펴보았다. 평담한 시들은 대체로 자연의 이치를 탐색하면서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심경을 노래하는 시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제봉은 이량 사건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뒤, 좋은 때를 만나면 물상의 이치를 탐색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기쁨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다. 이러한 면에서 정치적 사건으로 심적 갈등이 심하였던 제봉에게, 시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찾게 해주고 문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게 해 주었던 것 같다.
2) 濃麗
『小華詩評』에 의하면 제봉은 唐詩를 시의 절대적 전범으로 여겼고, 李達의 시적 성취도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리고 梁慶遇는 제봉시의 특질을 ?濃麗․富盛?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南龍翼은 『壺谷詩話』에서 제봉시의 풍격을 ‘穠富’라 하였고, 金錫冑는 ?바람과 이슬을 읊으며, 은하수를 밟고 노을을 오르는 듯하네?라 하였다.
이와 같은 평들은 한결같이 제봉시의 표현과 수사가 화려하고 아름답게 형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풍격 용어는 晩唐詩의 ?綺靡?한 풍격 용어와 상통하는 면이 많다.
여기서는 제봉시의 이러한 특징을 ?濃麗?라는 풍격 용어로 살펴보고자 한다.?濃麗?는 唐나라 司空圖의 <二十四詩品>에 나오는?纖儂?․?綺麗?하다는 풍격 용어와 비슷한 평어라 여겨진다. 이러한 풍격은 대체로 晩唐詩의 풍격으로 거론된다
.
제봉은 시조 세 수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晩唐 시인 杜牧의 <泊秦淮>의 의상을 그대로 시조 형태로 옮겨 놓기도 하였다. 두목의 <泊秦淮>는 전형적으로 ?綺靡?한 풍격의 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제봉집』에는 唐나라 시인들의 시체를 본받아 지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晩唐 시인들인 李商隱․杜牧․鄭谷․許渾 등의 시체를 본받아 짓기도 하고 <集句詩> 형태로 창작하기도 하였다. 그럼 제봉의 시 가운데 濃麗한 풍격의 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 30 -
<麗情寄長沙兩娘 (고운 정을 장사 두 낭자에게 보냄)>
裊裊纖腰一搦强 한들한들 가는 허리 한 움큼 될 듯한데
秋波替劒斷人腸 은근한 눈길 던져 애 간장을 녹이누나
紗窓日墮停針後 비단 창에 해가 지자 바느질을 멈춘 후에
離恨應隨線線長 이별의 한 실오리 따라 길기도 하여라.
琅琅細語耳邊殘 낭낭한 소근거림 귓가에서 멀어지자
別淚猶痕枕上班 이별 눈물 오히려 베갯머리 얼룩지네
驚起推窓無覓處 놀라 일어나 창문 여나 찾을 길이 없는데
靑燈翳壁月啣山 푸른 등불 벽에 어둑 달은 산에 걸려있네.
위 두 수의 시는 시적 주체인 여인이 님과 이별하고 난 뒤 느낄 수 있는 이별의 情恨을 상상을 통하여 그려낸 작품이다. 첫 수에서는 미인의 아름다운 자태와 행위를 눈에 선하듯 그려내었다. 가는 허리와 은근한 눈길은 남정네들의 애간장을 녹이는데, 비단 창에 해가 지자 님과 이별한 감정을 추스리지못해 이별의 한이 실오리 따라 한없이 길어진다고 하였는데, 이 시에서 사용된 시어들이 지나치게 艶麗하다. 즉 한들한들(裊裊)한 여인의 가는 허리(纖腰), 은근한 눈길(秋波), 비단 창(紗窓), 이별의 한이 線線長하다는 표현이 환기하는 정서가 아름다우면서도 애상적이다.
둘째 수의 시점은 밤으로, 밤 시간에 떠나간 님이 그리워 애를 태우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님의 다정한 소근거림이 멀어지자 이별의 서러운 눈물이 베갯머리를 적시게 되고, 놀라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나 님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는데 푸른 등불은 벽에 걸린 채 어둑하고 달은 산에 걸려있다. 여기서 푸른 등불이나 산에 걸린 달은 시적 주체의 외로운 심경을 투영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도 낭낭(琅琅)한 소근거림(細語), 이별의 눈물이 베갯머리를 적심, 푸른 등불과 月啣山 등의 시어를 통해 님과 헤어진 뒤 잠 못이루는 여인의 애틋한 情恨을 艶麗하게 표현하였다. 이 두 수의 시는 다음 시처럼 宮詞 계열의 작품으로, 궁중이나 여염에서 있을 수 있는 여인의 한을 상상을 통하여 그려낸 작품이다. - 31 -
<效一庭風雨自黃昏體 (한 뜰에 비바람 부니 절로 황혼이 찾아든다는
시체를 본받아)>
春寒惻惻羅衫薄 봄날 추위 쌀쌀한데 비단 적삼 얇은 채로
深院無人掩珠箔 깊은 정원 사람 없어 구슬 주렴 드리웠네
雕梁燕子來不來 고운 들보에 제비는 올동말동 한데
十日東風杏花落 십일 동안 봄바람에 살구꽃만 져버렸네.
이 시는 唐나라 시인들이 즐겨 쓰던 宮詞로 시적 주체는 여성이다. 기구와 승구에서는 깊은 정원에서 봄날 쌀쌀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시적 주체의 외로운 상황을 묘사하였다. 특히 시적 주체가 여성이라는 것을 비단 적삼, 깊은 정원, 구슬 주렴 등의 화려한 시어를 통해 드러내었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좋은 봄날이 그냥 덧없이 흘러가는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었다.
해마다 고운 들보에 찾아오는 제비들은 올동말동 한데도 봄바람에 살구꽃은 벌써 다 져버렸다는 것이다. 전구에서는 고운 들보에 제비가 찾아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드러내었으나, 실은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아 애타는 여인의 심경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화자가 궁중이나 여염집에서 있을 수 있는 여성들의 삶의 애환을 상상을 통하여 재구성한 작품으로 시어 자체가 곱고 화려하다.
<步古韻贈友人以道惜別之意 (옛 운을 따라 벗에게 주어 석별의 뜻을 나타냄)>
立馬沙頭別意遲 모래톱에 말 세운 채 이별 감정 더딘데
生憎楊柳最長枝 버드나무 긴 가지가 얄밉게도 하늘대네
佳人緣薄多新態 가인은 운명 얇아 새론 교태 많이 짓고
蕩子情深問後期 탕자는 정이 깊어 훗날 기약 물어보네
桃李落來寒食節 복사 오얏 꽃이 지는 한식절이 찾아오니
鷓鴣飛去夕陽時 자고새는 이리 저리 석양 무렵 날고 있네
草芳南浦春波綠 방초 푸른 남포에는 봄 물결도 푸를테니
欲采蘋花有所思 마름꽃을 따는 것은 그리움이 있어서라.
이 시는 벗과 헤어지면서 석별의 정을 나타낸 작품이다. 수련에서는 이별하는 장소와 주변 분위기를 나타내었다. 모래톱에 말을 세운 채 작별하는 마음 더딘데, 버드나무 가장 긴 가지가 하늘대니 몹시도 얄밉다고 하였다. 함련에서는 자신처럼 나루에서 이별하는 가인과 탕자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미인박명이라 했듯이 아름다운 여인은 운명이 뜻대로 되지 않을까 봐 새로운 교태를 많이 부리고, 탕자는 정이 깊어 훗날 기약을 물어보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은 당신에게 교태도 부리지 못하고, 훗날 기약도 물어보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벗을 이별하면서 마치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는 듯한 애틋한 정을 드러내었다.
경련에서는 이별하는 시점이 아름다운 계절임을 나타내었고, 미련에서는 헤어지고 난 뒤 서로가 잊지말자고 하였다. 이 시에서 제봉은 이별하는 순간에도 의도적으로 시의 분위기를 곱고 화려하게 설정하여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 32 -
<謝林正字希仁送酒 (정자 임희인이 술을 보내온 것에 감사하여)>
松堂煮酒淡如油 송당이 빚은 술은 기름처럼 마알가서
妙處方知內法優 묘한 처방 바야흐로 비법 좋음 알겠구려
火活泉新齊氣力 불 잘 때고 샘물 갈아 온도를 잘 맞춰야
蠟香椒烈備剛柔 꿀 향기와 후추 맛인 강유함를 겸비하지
金莖瑞露濃初滴 금줄기에 좋은 이슬 짙어 처음 떨어지 듯
赤岸晨霞爛欲流 붉은 언덕 새벽 노을 찬란하게 흐르는 듯
持餉病夫應有意 병든 내게 보낸 것은 응당 뜻이 있을텐데
黃封曾識殿西頭 전각 서쪽서 하사주 마시던 때 기억해 두었던가?
이 시는 고향에 돌아온 지 10여년 뒤 正字 林復이 술을 보내온 것에 감사하여 지은 작품이다. 이 시에서 작가는 그 옛날 우리 선인들이 燒酒를 내리던 모습을 눈에 선하듯 묘사해 내었다. 수련에서는 松堂이 빚은 술은 기름처럼 맑은데, 묘한 솜씨는 바야흐로 술 빚는 비법이 좋다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다. 함련과 경련에서는 소주 내릴 때의 모습을 세밀하고도 신비스럽게 묘사하였다.
즉 불은 적당히 온도를 맞춰 주고, 샘물은 새로 갈아주면서 기력을 잘 맞추어야, 소주가 꿀 향기와 후추의 매운 맛인 독하고 매우면서도 달삭지근한 맛을 겸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소주를 내릴 때는 아래는 뜨겁고 위는 차갑게 해 주어 冷溫이 잘 맞아야 좋은 소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줄기에 맺힌 상서로운 이슬이 짙어 처음 방울 지듯 소주가 방울방울 흘러 내리고, 붉은 언덕에 새벽 노을 찬란하게 흘러가는 듯 불이 활활 타올라야 소주를 잘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金莖은 신선이 먹는 약초를 뜻하는 말이나 소주 고리의 꼭지를 미화하는 말로 쓰였다. - 33 -
미련에서는 임복이 보낸 술을 보고서 병든 내게 보낸 것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텐데, 전각 서편에서 黃封(임금이 하사주 술) 마신던 때를 기억해 두었다가 보낸 것이 아닌가라 하면서 두 사람의 사적인 경험을 떠올리면서 시상을 마무리 하였다. 『君國朝詩刪』에서는 이 시에 끝 부분에서, “시 전체가 질 좋은 울창주를 원만하게 잘 묘사하였는데, 시행 가운데 가장 좋다”고 평하였다. 명종은 臣들이 모여 연회를 할 때 御題를 내려 시를 짓게 하고 술과 상품을 내려주기도 하였는데, 제봉은 임복이 보낸 술을 보고 과거 좋았던 때를 다시 회상하고 있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제봉은 술 빚는 비법에 대해 정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함련과 경련에 나오는 火活 ․泉新․蠟香․椒烈․金莖․瑞露․赤岸․晨霞․黃封 등의 시어들이 시 전체적인 분위기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濃麗한 풍격을 형성하고 있다.
<道中望十三山 (도중에 십삼산을 바라봄)>
綰結湘鬟翠幾重 상비 머리 땋은 듯이 푸르름은 몇 겹일까?
脩眉天際畵初濃 눈섭 같은 산 닿은 선 그림처럼 막 짙구나
神鰲戴立疑三島 신령 자라 이고 있는 삼신산인 듯도 싶고
巫峽飛來剩一峰 무협이 날아왔나 한 봉우리 더해졌네
燕塞斷鴻低積縞 북방 변새 외론 기럭 비단 접듯 내려 앉고
海門殘照下高舂 바다 어귀 저녁 해는 절구 찧듯 지고 있네
恨無謝脁驚人句 한스럽네 사조처럼 사람 놀랄 시 구절로
快寫平生芥蔕胸 평생 가슴 맺힌 생각 속 시원히 풀지 못해.
이 시는 선조 14 년(1581) 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遼寧省 錦縣에서 十三山을 바라보며 지은 작품이다. 수련과 함련에서는 십삼산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상비 머리를 땋은 듯이 십삼산은 푸르름이 여러 겹으로 형성되어 있고, 하늘과 산이 맞닿은 선은 긴 눈섭 같은 모습으로 그린 듯이 푸르름이 막 짙어졌다.
여기서 수련의 ?初?는 시적 주체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낸 글자로, 십산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신령스런 자라가 이고 있는 삼신산인 듯도 싶고, 무협이 뻗어내려 한 봉우리가 더해져 열세 봉우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무협은 두 언덕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매우 험준하며 西陵峽․瞿塘峽과 더불어 長江 三峽이라 일컫는다
.
경련과 미련에서는 십삼산 주변 석양 무렵의 아름다운 정경에 대해 읊조렸다. 북방 변새의 외로운 기러기는 비단이 접히듯 사뿐히 내려 앉고, 바다 어귀 저녁해는 절구질 하듯 한 순간에 바다 속으로 빠져든다. 한 마리 기러기가 저 멀리 내려 앉는 모습을 ?低積縞?라 표현한 것과, 해가 바다 속으로 갑자기 잠겨드는 모습을 ?下高舂?이란 의태어로 표현한 것이 돋보인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이 있음에도 자신은 南齊의 謝脁처럼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싯구로 가슴 속에 맺힌 생각들을 속시원히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국조시산』에서는 이 시에 대해, “비록 골간은 없으나, 또한 절로 형체가 갖추어져 있다(雖無骨幹, 亦自膚立)”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은 십삼산이 지니고 있는 소재의 역동적이고 힘찬 기상을 담아내지 못하고 섬세한 감정으로 곱고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뜻이다. - 34 -
<翠露亭殿坐 (취로정전에 앉아)>
團團翠露泫瑤光 동글동글 푸른 이슬 옥의 광채 비치고
瀏瀏天風逗面凉 산들산들 하늘 바람 얼굴 스쳐 서늘하네
靈沼晩波涵寶座 영소의 저녁 물결에 보좌가 잠겨 있고
瓊林秋日麗宸章 고운 숲 가을 해에 御章이 아름답네
遲遲宮漏傳銀箭 똑똑하는 물시계는 은빛 화살로 시간 알리자
秩秩仙曺韻水蒼 차례차례 신선 무리 수창옥 울리며 나오네
簪筆昔曾參法從 시종신으로 지난번에 이 모임에 참여했는데
眼明猶識朶雲傍 오색 구름 곁에서 안목이 밝았었지.
취로정은 대궐 후원에 있는 정자로 명종이 자주 신하들과 모임을 갖던 장소였는데, 이 시는 宮體詩로 翠露亭에서 명종을 모시고 시를 짓던 때를 연상하며 지은 작품이다. 한시에는 궁궐에서 임금님과 관계되어 일정한 격식과 분위기를 지닌 시를 宮體詩라 하는데, 宮體詩는 화려하고 엄숙하고 경축과 사은을 주 내용으로 한다.
수련과 함련에서는 취로정 주변의 아름답고 엄숙한 궁궐의 분위기를 묘사하였다.
즉 푸른 이슬이 옥처럼 빛나고 가을 바람은 얼굴에 스쳐 서늘하다. 영소의 저녁 물결에는 보좌가 잠겨 있고, 고운 숲 가을 해에 임금님이 쓴 글이(宸章) 아름답다고 하였다. 경련과 미련에서는 취로정 주변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모임을 갖던 때를 연상하였다. 즉 대궐 물시계가 은빛 화살로 시간을 알리자 신하들이 佩玉을 울리며 모여들고 있다. 여기서 화 자는 물시계 바늘을 은빛 화살로, 신하들을 신선의 무리로, 그리고 大夫들이 차던 佩玉을 水蒼玉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미련에 나오는 오색 구름은 상서로움을 상징하는데, 오색 구름 곁(朶雲傍)이란 표현을 써서 임금을 모시고 있었던 때를 나타내었다. 즉 天文은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을 가르키지마는 임금을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지상세계인 궁궐 풍경을 옥황상제가 있는 천상세계화함으로써 작품의 분위기를 장엄․화려하게 표현하여 전형적인 宮體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봉은 이 시를 통하여 취로정에서 명종을 모시고 지낼 때 명종에게 시로 인정받았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제봉은 재출사하여 선조 14년(1581)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천자를 朝會하고 지은 시에서도 이러한 宮體詩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제봉시 가운데 濃麗한 풍격의 시들을 살펴보았다. 우리 선인들로부터 제봉시는 濃麗하거나 예술적 형상화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宮詞 계열의 작품들은 궁중이나 여염에서 있을 수 있는 여인의 한을 상상을 통해 그려내었는데, 이러한 시들은 대체로 濃麗한 풍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에 쓴 시나 천자를 朝會하고 쓴 시들은 시 내면 공간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내고 있다. 제봉은 이외에도 궁중의 연회나 궁안에서 치루는 연례 행사에 대해 지은 宮體詩에서도 濃麗한 작품의 시를 많이 남겼다. - 35 -
3) 豪放
豪放은 ?豪邁放縱?이다. ?豪?는 내적인 것으로 말한 것이고, ?放?은 외적인 것으로 말한 것으로, ?豪?는 내가 세상을 덮을 수 있는 것이고, ?放?은 외물이 나를 구속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唐나라 司空圖(837~908)는 二十四詩品에서 豪放에 대해, ?앞으로는 일월성신을 부르고 뒤로는 봉황을 끌어오듯이 해야하며, 새벽에 여섯 마리 자라를 타고 부상에서 발을 씻듯이 형용해 내야 한다?(前招三辰, 後引鳳凰, 曉策六鰲, 濯足扶桑)고 하였다.
따라서 작가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 내면의 시․공간의 영역을 확대시킨 시를 지어야 호방한 풍격의 시가 될 수 있다. 호방한 시는 唐詩에 많이 드러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두보의 登臨詩인 <望嶽>․<登岳陽樓>나 이백의 飮酒詩인 <月下獨酌>․<將進酒>에서 호방한 풍격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시들은 登臨詩․樓亭詩․醉時歌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들은 대체로 시적 주체의 豪放한 심경을 표출하게 된다. 따라서 호방한 시는 천지간에 충만해 있는 浩然한 氣를 자신의 기상으로 길러낸 시인이, 어떤 적절한 계기(登臨․樓亭․醉時)에 內我에 충만한 氣를 마음껏 표출할 때 드러나는 풍격이라 할 수 있다. 제봉도 樓亭詩나 醉時歌를 지었는데, 이러한 시에서 豪放한 풍격을 드러내고 있다. - 36 -
그리고 제봉의 스승인 임억령은 이백과 장자에 심취하여 豪放하고 氣健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제봉은 스승의 이러한 시풍에 상당히 경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用前韻書石川題畵鷹詩後>라는 작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시에서 제봉은 임억령의 문학적 능력과 창작 태도를 서술하고, 임억령 시의 풍격을 매의 형상과 중첩시켜 豪放하게 묘사하였다. 그럼 豪放한 시풍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을 살펴 보자.
<記夢 (꿈을 기록하며)>
笑閱東溟滿屋籌 동명을 돌아보니 집 가득 산 가지인데
扶桑低拂鷫鷞裘 부상에서 숙상 갖옷 구부려 털고서
應携水府三千侶 응당 수부의 삼천 무리 거느리고
共謁虛皇十二旒 함께 허공의 십이 면류관 쓴 황제를 뵙네
灝氣白藏天闕冷 아득한 기운 하얗게 쌓여 하늘 대궐 차가운데
朶雲紅傍玉繩浮 오색 구름 붉은 곁에 옥색 끈이 떠 있네
渺然笙鶴無尋處 아득하여 피리 학은 찾을 길이 없는데
人在蓬萊最上頭 그 분은 봉래산 가장 높은 곳에 계시네.
제봉은 석천 임억령이 관동지방에 안절사로 있을 무렵 호음 정사룡과 왕래하면서 수창한 작품이 매우 많았는다. 그 중에 ?峯高八萬山皆骨, 水闊三千界盡浮?(봉우리 높아 팔만산이 모두 뛰어나고, 물이 넓어 삼천 경계가 다 떠 있는 듯 하구나)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대개 왕유의 <早朝大明宮>시의 韻을 사용한 것이었다. 제봉은 일찍이 그의 奇敻超邁하여 운에 구속되지 않는 경지를 사랑하여 여러 번 그러한 경지를 본받으려 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시는 제봉이 꿈에 星山을 유람하다가 석천과 호음이 시를 짓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제봉에게 ?浮?字韻으로 시를 화답하라는 부탁을 받고 지은 시이다.
제봉은 꿈속에서 석천과 호음을 뵙고 두 분을 신선인양 묘사하였다. 즉 두 분은 동해 바다를 두루 돌아보며 부상에서 神鳥인 숙상새의 갖옷을 털고 水府의 삼천 무리를 거느리고 함께 십이 면류관을 쓴 황제를 알현하고 있다. 아득한 기운이 하얗게 쌓여 있는 하늘의 대궐은 차가운데, 오색 구름이 붉은 곁에 옥색 끈이 떠 있다. 아득하여 피리소리도 들리지 않고 仙鶴도 보이지 않지만 그 분은 三神山의 하나인 봉래산 제일 높은 곳에 계신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제봉은 성산에서 두 분을 신선처럼 묘사하여 두 분이 仙界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습을 통해 豪放한 심경을 마음껏 드러내었다. - 37 -
<百祥樓次韻 (백상루에서 운을 빌어)>
醉躡梯飇十二樓 취한 채로 바람 타고 신선 누각 올라보니
晴川芳草望中收 맑은 시내 꽃다운 풀 한 눈에 들어오네
水宮簾箔疑無地 수궁 위로 드리운 발 아래로는 가물가물
蓬島烟霞最上頭 봉래도 낀 내와 노을 가장 높이 떠 있구나
天外梅花飛玉笛 하늘 저밖 옥피리는 매화곡을 불어주고
月邊蓮葉渺仙舟 달가에선 신선배가 연잎처럼 아득하네
臨風欲浥浮丘袂 바람 맞아 부구공의 소매 자락 잡으려니
笙鶴飄然戱十洲 생황소리 학을 타고 훌쩍 십주 노니는 듯.
이 시는 제봉이 중국으로 사신 가는 길에 關西八景의 하나인 평안도 安州 淸川江가에 있는 百祥樓에 올라가서 읊은 시이다. 백상루는 중국 사신이 오갈 때 들르는 명소로 중국 사신과 우리 시인들의 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수련과 함련에서는 백상루가 아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였다. 즉 취해 회오리 바람을 타고 십이루를 올라가니 맑은 시내와 꽃 풀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하였다. 백상루 주변 수면 위로 발을 드리우니 높아서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하고, 蓬萊島에 낀 안개와 노을이 가장 높이 떠 있다고 하였다.
경련과 미련에서는 현장의 공간을 仙界인양 표현하였고 작자 자신도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마음껏 느껴보고 있다. 하늘 끝에는 신선이 옥피리로 落梅花曲을 불어 보내는 듯 하고, 달가의 연잎인양 아스라이 신선이 탄 배가 떠 다니고 있다. 바람 맞아 皇帝 때 신선인 浮丘公의 소매자락을 잡으려니, 생황소리에 학을 타고 훌쩍 십주에 노니는 듯 하다고 하였다.
『國朝詩刪』에서는 ?이 작품이 江西派를 힘껏 씻어내고 唐詩의 경지에 들어서려 하였다. 그 때문에 자못 流麗하고 淸遠하다?고 하였다. 이 작품이 江西派를 힘껏 씻어내려 했다는 것은, 故事 사용이 적절하게 이루어져 시상의 전개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의미하며, 唐律의 경지에 들어서려 하였다는 것은, 이 시의 律格과 風格이 唐詩風을 띠고 있다는 평이다. 그리고 이 시가 ?流麗?하다는 것은 시의 聲律이 잘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고, ?淸遠?하다는 것은 시에 표현된 내용들이 속세의 想念을 떨쳐버린 맑고 심원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樓亭詩나 醉時歌는 시적 주체의 豪放한 심경을 표출한 작품이 많은데, 이 시에서 제봉은 백상루에 올라 ?望中收?하는 주변 시내와 섬과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거침없는 기상을 표출하였다. 특히 함련과 경련의 표현을 통해서는 백상루 주변을 仙界인양 표현하였고, 미련에서는 이러한 공간에서 자신이 신선이 된 듯 마음껏 기상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백상루에 올라가서 자신의 淸遠한 심경을 드러내면서 豪放한 기상을 마음껏 표출한 시이다. - 38 -
<次南時甫諸君韻題藏義洞人家 (남시보 제군의 운을 빌어 장의동 인가에 씀)>
酒罷動高興 술 끝내자 높은 흥취 한껏 일어나
策馬山中來 말 재촉해 산중으로 들어 왔는데
入門見幽事 문에 들자 그윽한 일만 보게 되는데
石澗爭縈廻 산골물은 다투듯이 돌아 흐르네
蒲荇間芰荷 부들 마름 사이 사이 연꽃 피었고
天風久徘徊 하늘 바람 오래도록 배회하누나
丹訣久未試 연단 비결 오래도록 시험 못해서
海嶽瑤華摧 바다와 산 구슬들이 꺾였겠지만
迢迢碧城子 아스라한 푸른 성서 사는 신선은
迎我笑顔開 나를 맞아 웃으면서 얼굴을 펴니
何當乘月夕 그 언제쯤 달이 뜨는 저녁 무렵에
更倒流霞杯 다시 한번 유하 술잔 기울여 볼까?
이 시는 五言古詩로 藏義洞에서 술을 마시고 일어나는 흥취를 표현하였다. 1․2구에서는 술자리 끝나자 높은 흥취가 일어나 그 기분을 더 누리기 위해 말을 채찍질하여 산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3구에서 6구까지는 장의동 인가 주변의 그윽한 풍경을 노래하였다. 산골물은 다투듯이 돌아 흐르고, 부들과 마름 사이로 연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데, 바람은 오래도록 불어오고 있다.
7구에서 12구까지는 술을 마시고 豪放한 기분이 되어 신선인양 노닐고 있음을 노래하였다. 즉 練丹의 비결은 오래도록 시험도 해보지 못하여서, 바다와 산에는 다려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아름다운 구슬이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멀리 아스라한 푸른 성에 사는 신선이 나를 맞아 웃으면서 얼굴을 펴니, 언제쯤에나 달이 뜨는 저녁에 신선들이 마신다는 流霞酒를 다시 기울일 수 있을까라 하였다. 여기서 장의동 인가의 주인을 신선 같은 인물로 설정해 놓고, 그 언제나 다시금 당신 집을 다시 찾아와 오늘같은 심정으로 다시 술을 마실 수 있을까라 하였다.
이 시에서 작가는 장의동 그윽한 공간에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마치 자신이 신선이나 된 듯한 심정으로 상상의 세계에서 마음껏 노닐고 있다. 술을 마신 뒤 豪放한 심정을 읊은 시로는 장편 七言古詩로 된 <醉時歌>가 있다.
<至月初吉與剛叔小酌割彘肩噉之時將往烟峯寺觀獵
(동지달 초하루 길일에 강숙과 더불어 조금 술을 마시며 돼지 어깨뼈를
베어 씹을 때, 연주사에 가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려 하였다.)>
醉引靑螺啗彘肩 취해 청라 불며 돼지 어깨 씹으니까
書生心膽覺翩翩 서생의 마음 담이 날아갈 듯 하구나
烟峯校獵挑狂興 연봉에서 사냥 보려니 미친 흥이 절로 나서
自欲擎蒼坐馬? 스스로 매를 높이 들고 말 안장에 앉고 싶네.
이 시는 김성원과 함께 烟峯寺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사냥구경을 가면서 지은 시이다. 기구와 승구에서는 호쾌하게 술마시는 분위기를 묘사하였는데, 마치 鴻門宴의 樊噲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드러내었다. 漢紀에 의하면 鴻門에서 項羽와 沛公이 모이는 자리에서 항우의 신하인 范增이 項莊을 시켜 패공을 죽이려하자 張良이 번쾌를 시켜 패공을 보호하게 하였다. 항우는 번쾌의 부릅 뜬 눈을 보고 장사라고 칭찬한 후 술을 주고 돼지 어깨를 주니 번쾌는 칼로 잘라 먹었다 한다. 취해 푸른 소라를 불며 돼지 어깨를 씹는다는 표현은 스스로 번쾌와 같이 호방한 기분을 마음껏 느껴본다는 뜻이다. - 39 -
전구와 결구에서는 사냥 흥이 나는 것을 표현하였다. 즉 연봉에서 사냥하는 광경을 보려가려니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겉잡을 수 없는 흥이 절로 나서 스스로 매를 높이 들고 말 안장에 앉아 직접 매사냥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제봉은 이러한 광경을 상상하면서 호방한 기운을 마음껏 누려보고 있는 것이다.
<病中示剛叔 (병 가운데 강숙에게 보여줌)>
雷雨遙聞下界喧 우레 비 멀리 들려 하계가 시끄러우니
栖霞風露不勝繁 서하당에도 바람 이슬 많이 내리리라
何時讀罷三山記 어느 때나 삼산기를 다 읽고서
閑跨靑鸞出海門 한가롭게 푸른 난새 타고 해문으로 나가볼까?
이 시는 제봉이 아픈 가운데 김성원이 海南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지은 작품이다. 즉 우레 비가 멀리서 들려와 인간 세상이 시끄러우니, 서하당에도 바람과 이슬이 많이 내리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剛叔(김성원의 자) 당신은 지금 해남 서하당으로 갈 터인데, 병중에 있는 나는 어느 때나 삼산기를 다 읽고서, 한가롭게 푸른 난새를 타고서 바다 저편으로 마음껏 날아가 볼까라 하였다.
여기서 三山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록을 말하는 지 잘 알 수 없으나 三仙山인 蓬萊․方丈․瀛洲에 관련되는 기록이라 여겨진다. 이 시는 제봉이 아픈 가운데 상상의 나래를 펼쳐 호방한 심경을 마음껏 펼쳐보인 작품이다. - 40 -
이상에서 제봉의 시에서 豪放한 풍격의 시들을 살펴보았다. 豪放한 시는 천지간에 충만해 있는 浩然한 氣를 자신의 기상으로 길러낸 시인이, 어떤 적절한 계기에 내적인 충만한 기상을 마음껏 표출할 때 드러나는 풍격이라 할 수 있다. 제봉도 樓亭詩나 술을 마셨을 때 지은 작품인 <百祥樓次韻>․<次南時甫諸君韻題藏義洞人家>․<至月初吉與剛叔小酌割彘肩噉之時將往烟峯寺觀獵> 등에서 豪放한 기상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用前韻書石川題畵鷹詩後>․<記夢>․<病中示剛叔> 등의 작품에서도 호방한 심경을 표출하였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제봉 한시의 풍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봉은 26세 때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이양을 탄핵하는 논의를 누설한 사실이 드러나 파직되어 오랜 기간 동안 고향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 시기 제봉은 그 당시 호남 일대에 거주하던 인물들과 폭넓게 교유할 수 있었다. 제봉은 이양 사건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고향에서 지내거나 지방의 군수로 전전하였지만 시문학적 재능은 그 당시 많은 문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즉 제봉시는 濃麗하거나 예술적 형상화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제봉은 스승인 석천의 영향을 받아 豪放한 풍격의 시를 지으려 애를 썼고,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을 노래한 平淡한 풍격의 시들이 있다.
제봉의 시 가운데 平淡한 풍격을 드러내고 있는 시들은 대체로 자연의 이치를 탐색하면서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심경을 노래하는 시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제봉은 이양 사건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뒤, 좋은 때를 만나면 물상의 이치를 탐색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기쁨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다.
즉 고향에서 지낼 때 지은 시인 <述懷示偉元>․<雨中吟〉이나 詠物詩인 <詠黃白二菊>, 題畵詩인 <漁舟圖> 등이 平淡한 풍격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심적 갈등이 심하였던 제봉에게, 시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찾게 해주고 문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게 해주었던 것 같다. - 41 -
우리 선인들로부터 제봉시는 濃麗하거나 예술적 형상화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宮詞 계열의 작품들은 궁중이나 여염에서 있을 수 있는 여인의 한을 상상을 통해 그려내었는데, 이러한 시들은 대체로 濃麗한 풍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麗情寄長沙兩娘>․<效一庭風雨自黃昏體> 등이 있다. 그리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에 쓴 시나 천자를 朝會하고 쓴 시들도 아름답고 화려하다. 이외에도 궁중의 연회나 궁안에서 치루는 연례 행사 때 지은 宮體詩는 濃麗한 풍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濃麗한 시는 宮體詩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晩唐의 綺靡한 풍격의 시와도 관련이 깊다고 여겨진다.
豪放한 풍격의 시는 唐詩에 많이 드러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두보의 登臨詩나 이백의 飮酒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방한 시는 천지간에 충만해 있는 浩然한 氣를 자신의 기상으로 길러낸 시인이, 어떤 적절한 계기에 內我에 충만한 氣를 마음껏 표출할 때 드러나는 풍격이라 할 수 있다. 제봉은 평소에 임억령의 인품이나 시적인 경지에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임억령은 이백과 장자에 심취하여 豪放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제봉도 임억령과 관련이 있는 작품인 <用前韻書石川題畵鷹詩後>․<記夢>이나 樓亭詩인 <百祥樓次韻>, 醉時歌인 <次南時甫諸君韻題藏義洞人家>․<至月初吉與剛叔小酌割彘肩噉之時將往烟峯寺觀獵> 등과 <病中示剛叔> 등의 작품에서 豪放한 심경을 표출하였다.
이상에서 제봉시의 풍격을 平淡․濃麗․豪放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데, 이 가운데 두드러지는 풍격은 濃麗라 할 수 있다. 濃麗한 시는 晩唐 시기의 綺靡한 풍격과 서로 통하고, 豪放한 풍격은 盛唐詩에 잘 나타나는 풍격이다. 이런 면에서 제봉 시의 풍격은 唐詩風을 띠고 있으면서, 고향에서 소일할 때는 자연의 理法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平淡한 풍격의 시를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平淡?과 ?濃麗?는 상반되는 풍격이라 할 수 있으나, 시인이 처한 정치적 위상이나 창작의 계기에 따라 두 가지 풍격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主題語 : 風格, 平淡, 濃麗, 豪放, 綺靡, 晩唐風, 唐詩風, 盛唐風.
참고 문헌
『國朝詩刪』,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83.
『大東詩選 上』,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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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華詩評』, 국학자료원 영인본, 1993
『朝鮮朝漢詩作家硏究』, 동악어문학회, 1993..
『韓國文集叢刊 42, 霽峯集』, 민족문화추진회 영인 표점본, 1990.
『韓國詩話叢編 3, 壺谷詩評․詩』, 趙鍾業編, 동서문화원 영인본, 1989.
朴銀淑, 『高敬命 詩 硏究』, 집문당, 1999.
卞鍾鉉, 『高麗朝名家漢詩硏究』, 경남대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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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04년 11월 29일 투고 완료되어
2004년 12월 10일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2005년 1월 6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05년 1월 20일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게재가 결정된 논문임.
<Abstract>
A Study on the Refinement of the Ko, Kyung-myung's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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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un, Jong-Hyun*
The goal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poetic styles of Jebong, Ko Kyungmyung's poetry. We realize that our ancestors appreciated that Jenong's poetry was artistically beautiful and that he was also proud of his own poetic achievement which he had attained. In the paper, his poems are classified into 3 poetic styles; the poetic style of pyungdam(平淡), nongryu(濃麗) and hobang(豪放).
Among his poetry, the poems which show the poetic style of pyungdam(calmness and cleanness) usually reveal his mind to figure out the principles of the nature and to absorb it. Returning to his home, he wrote the poems to exam the reason of things in his pleasant days and to reflect the joy of the poetic subject which harmonized with the nature. In the other hand, his works of kungsa(宮詞) series depicted han(bitterness) which royal or middle class women had experienced, which came from his imagination. Theses poems show the poetic style of nongryu(濃麗). In the poems which he, as an envoy, wrote on his way to Ming(which was a dynasty of china), he used beautiful and flowery words for them. Besides, in the poetic style of nongryu(濃麗), he wrote Kungnyesi, which were poems for celebrating banquets or annual events at court. Accordingly, it is considered that his poems written in the style of nongryu show an aspect of Kungnyesi as well as kimi style of the Mantang poetry.
The poems written in the style of hobang are found in the Tang poetry more than in the Song; the poems of the style are viewed in Du Fu's and Li Bo's poetry. Our ancestors thought that it was important to compose poetry in the poetic style of hobang. Especially, they composed the poetry drinking or enjoying beautiful scenery. Jebong used to set his mind on the personality and poetic achievements of Yim-uknyung, who adored Li bo and Chuangtzu and left a lot of works written in the poetic style of hobang. He also showed his audacious mind in his works, Deunglimsi(登臨詩) or Eumzusi(飮酒詩: poetry for drinking). Among his three poetic styles, a remarkable style is nongryu(濃麗). The style of nongryu(濃麗) is connected with kimi style of the Mantang period and the style of hobang is shown a lot in the Sungtang poetry. Considering his styles, he seemed to write his poems in Tang poetic style in general and to create poems in the style of pyungdam(平淡) to live adapting the principles of the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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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s : refinement, pyungdam(平淡), nongryu(濃麗), hobang(豪放), kimi(綺靡), Mantang poetic style(晩唐風), sungtang poetic style(盛唐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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