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고인후(高因厚)의 묘갈명(墓碣銘) - 이정보撰(지음) 윤 급書

高 山 芝 2011. 6. 22. 15:53

문헌연구)                                                        

 

     墓碣銘(묘갈명-고인후)-이정보撰(지음) 윤 급書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贈)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령경연(兼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시(諡) 의열(毅烈)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무공랑(武功郞) 학봉(鶴峯) 고공(高公) 휘(諱) 인후(因厚)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나는 일찍이 선조(先祖) 울사공(月沙公) 문집에 들어 있는 정기록 서(正氣錄 )를 읽고서문득 격절탄상(擊節歎賞) 하며 수백년 아래서 감희를 일으켰더니 지금 학봉공 행장을 안(按)해 보니 가위 천지간의 정기가 고씨 일문에 모였다 하겠다. 

 

공의 휘(諱)는 인후(因厚)요, 자(字)는 선건(善建)이니 충렬공 제봉선생의 둘째 자제요 준봉( 峯) 종후(從厚)의 아우다. 

 

공은 가정(一五六一) 신유(辛酉) 오월 이십이일에 낳았으며 어려서부터 총명이 특이하여 육세에 능히 취학(就學) 하였고, 십구세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고, 이십구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명이 대단했으나 좋지않게 보는 자에게 음적인 배제를 받아서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임직 되었다. 

 

임진(壬辰)왜란이 일어나자 종묘 사직이 파천하고 열읍(列邑)이 무너지니 적의 형세가 저돌(猪突)적으로 나와서 감히 그 서슬을  거슬리는 자 없었다. 호남의 근왕병(勤王兵)이 금강(錦江)에 당도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소위 감사(監司)란 자가 허둥지둥하여 겁을 내어 진을 파하고 돌아오니 인심이 더욱 흉흉하여 도피하는 자가 많았다. 

 

충렬공이 개연히 창의를 하여 흩어진 군졸을 수합해서 준봉공( 峯公)과 공으로 하여금 영솔하게 하여 수원(水原) 권 율(權 慄)의 진에 넘겨 주고 서으로 향하여 행조(行朝)로 가려하다가 길이 막혀 더 나가지 못하게 되니 공은 드디어 충렬공을 따라 전주(全州)로 군사를 옮겨서 영남의 왜적이 호남 우도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로 했다. 

 

드디어 제도(諸道)에 격문을 띄워 행재소(行在所)로 득달하게 하고 부서를 정하여 장병을 배치하는데 공은 전항(前行)이 되었다. 그래서 나아가 금산의 적을 공격하여 토성(土城)에서 무찔러 거의 오나전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튿날 적이 진을 비우고 나와서 곧장 관군에게 범하니 방어장(防禦將) 김성헌(金成憲) 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여러 진이 그 꼴을 바라보고 스스로 무너지니 의군은 오히려 독당할 계획을 하고서 활에 살을 먹여 대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급히 외치며 「방어진이 무너졌다.」하므로 의군도 역시 따라서 무너져 형세가 제지할 수 업게 되엇다. 

 

그래서 충렬공은 마침내 순절(殉節)하고 공은 시석(矢石)을 무릅쓰면서 무너진 군사를  정돈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다가 역시 진중에거 죽었는데 바로 이 해 칠월 초 십일이었고 공의 나이는 삼십이세였다. 

 

사방에서 공의 부자가 전사(戰死) 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부르짖어 울며「하늘이 도와주지 않아서 우리 장성(長城)을 잃었다.」고 말하였다. 준봉공이 공의 유체(流體)를 쌓인 시체 속에서 찾아냈는데 죽은지 이미 사십여일이었으나 용모가 늠름하여 살아 있는 것 같았으며 옷섶에 자필로 쓴 성명이 붙었으니 역시 나라위해 죽겠다는 그 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주상 전하께서 애석히 여기어 명하여 예조참의(禮曺參議) 증직을 내렸는데 아들 부천(傅川)이 종훈(從勳)에 참예한 관계로 영의정(領議政)을 가증(加增)하고,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의열(義烈)이라 하였다. 준봉공과 함께 충렬공의 사우에 배향 되었다. 

 

아! 공의 충성과 효도는 본시 천품인데다 학행이 있고 기절을 숭상하였다. 아이 때 희롱하고 노닐 적에도 선비가 서로 보고 예하는 사상견례(士相見禮)를 만들어 읍양(揖讓)하고 주선하는 것이 엄연히 위의가 있었으며 장성해서는 대궐에 들어가 과거를 보는데 글제가 전에지어 두었던 것에서 나왔으나 그대로 써서 바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선비의 발신이 구차스러워서는 안된다」하였으니 그 지조가 정직함을 이로서도 볼 수 있다. 

 

한번 고향에 물러나와 살면서는 세간의 일제 영욕(榮辱)과 득실에 마음이 동요되지 아니하였고 가정에서 얻은 것은 오직 충의일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난리를 당하매 의(義)를 신봉하여 부자가 한 날에 순절하였고 형은 복수장(復讐將)으로 강에 몸을 던져 죽었고 두 누이는 적을 꾸짖다 죽었고 서숙(庶叔) 경형(敬兄)과 종 봉이(鳳伊) 귀인(貴人)도 역시 다 전사하였다. 

 

세상에서는 저 제갈 첨(諸葛瞻) 변 곤(卞  )에게 견주고 있으며 중국 손어사(孫御使)는 충성, 절의, 효도, 우애 네가지의 아름다움이 구비했다고 칭도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하의 정론이다. 당(唐) 나라 장 순(張巡), 허 원(許遠)이 절사하자 안록산(安祿山) 사사명(史思明)의 군사가 수양성( 陽城) 아래서 풀이 꺾여 하북(河北) 십이주가 힘입어 보전되었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공이 죽은 뒤에 의병을 규합하는 자가 계속 일어나서 적의 칼끝이 마침내 호남을 크게 유린하지 못한 어찌 금산에서 한번 싸운 공이 아니겠는가.  

 

장흥(長興) 고씨 시조는 탐라(耽羅) 성주(星主)였다. 증조는 예조좌랑(예조증 참판 휘 운이요, 조부는 부제학 증 좌의정 휘 맹영이요, 고는 충렬공 공조참의 증 좌찬성 휘 경명이요, 비는 정경부인 울산 김씨인데 부제학 백균의 따님이요, 배는 함평 이씨로 감사 경의 따님인데 공 보다 먼저 작고했다. 

 

사남 일녀를 두었는데 맏은 부림, 다음은 문과 장령 부천, 생원 부집, 진사 부량이요, 딸은 오 희일에게 출가했다. 그리고 서자는 부매였다. 두강, 두명은 부천의 소생이요, 두흥, 두환은 부집의 소생인데 두흥은 부림에게로 계후 되었고 두위, 두망, 두남, 두원은 부량의 소생이요, 오희일의 아들은 이구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하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묘소는 창평 수곡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동군(同郡) 유천(柳川) 손좌(巽坐)의 벌에 이장되었다. 부인 이씨도 예전과 같이 바른 편에 부장되었다. 공의 육대손 명겸(鳴謙)이 정기록서를 가지고 내게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므로 나는 도의상 사양할 수 없어 명을 한다.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비는 나라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 위해 죽었구려.  

 

비록 한 때는 험했지만,  

 

만고에 길이 빛나리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중추부사(行販中樞府事) 겸 홍문관 대제학(兼弘文館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이정보(李鼎輔) 찬(撰)숭정대부(崇政大夫) 행중추부사(行中樞府事) 겸 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 급(尹 汲) 서(書) 

 

이정보(李鼎輔) 1693~1766 이조 영조때의 학자.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 본관은 연안이고, 호조참판 우신(雨臣)의 아들로 영조 8년(1732)에 문과한 후 여러 청환(淸宦)을 거쳐 이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김원행, 송명흠을 유림에서 발천하여 썼다. 대제학을 지내고 문장은 특히 사륙체(四六體)를 잘 하였다. 글씨와 한시에 능하고 시조의 대가로서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윤 급(尹 汲) 1679~1770 이조 영조때의 문신(文臣). 서(書家). 자는 경유(景擩). 호는 근암(近庵). 본관은 해평이고, 영상(領相) 두수(斗壽)의 5대손이다. 영조 원년(1725)에 문관에 등제한 후 승지, 대사간, 제학, 참판, 참의, 이조판서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소장(疏章)을 잘하였고 필법이 정려하고 그 체는 독특하여 윤상서체라고 평하였는데 당시의 명사들이 다투어 비문을 많이 썼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