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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임진전쟁 26. 제1 차 금산성 전투<1592.7.9>

高 山 芝 2011. 7. 2. 00:23

임진전쟁 26. 제1 차 금산성 전투<1592.7.9>

 

제1 차 금산성 전투<1592.7.9>


60세의 나이로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담양, 태인을 거쳐 북상하면서 병력을 모았다.
그는 6월 11일에는 전주에 진출하였는데, 여기에서 남원에 있던 의병을 흡수하여 모두 7천 명으로 병력이 불어났다.
6월 22일 고경명은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전주를 출발하여 한성을 향해 북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여산에 도착하였을 때 일본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를 침입하는 일본군을 먼저 무찌른 다음에 북상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고경명은 6월 27일에 여산을 떠나 은진을 거쳐 7월 1일에 연산에 도착하여 충청 의병장인 조헌에게 글을 보내 금산에서 합류하자고 제안하였다.

한편 고바야가와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 7번대는 7월 8일 전주로 진출하려다가 이치에서 권율 군에게 크게 패하고 그날 밤에 금산으로 철수한 상태였다.
고바야가와는 연산 쪽에 조선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수성 태세를 갖추었다.

고경명의 의병군은 7월 8일에 연산을 출발하여 이치와 금산 사이에 있는 진산에 도착하여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그 휘하의 영암 군수 김성현이 거느린 관군과 합류하였다.
관,의병 연합군을 편성한 조선군은 9일에 하오에 금산에 도착하였고, 곧바로 금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였다.
고바야가와 군은 성 위에서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려고 할 뿐 적극적인 대항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 날 이치전투에서 병력 손실이 많아 미쳐 전열을 재정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경명은 30여 명으로 돌격조를 편성하여 성 밑에 접근시켜 성문을 파괴하는 한편, 민가를 불태워 연기를 내게 하여 일본군의 시야를 가리게 하였다. 또 진천뢰를 쏘아서 성 안의 창고와 건물을 불태웠다. 이렇게 종일토록 접전을 벌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고경명은 포위를 풀지 않고 경계를 강화하여 적의 야간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야음을 틈타 복병을 배치하려고 나왔다가 의병의 경계망에 발각되어 수명의 사상자를 버리고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밤사이 방어사 곽영이 고경명을 찾아와 공성의 어려움을 내세우며 철수하기를 청하였으나, 고경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고경명은 금산성 서문을 공격목표로 삼고 의병의 주력을 서문 공격에 투입하였다. 그 때 고바야가와는 조선군의 관군이 허약한 것을 알고 동문으로 출성하여 관군을 먼저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은 관군은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방어사 곽영마져 사력을 다해 싸우기를 포기하고 후퇴해 버렸다.
'관군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의병 진영에 전해지자, 의병군도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의병들이 당황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가해왔다.
의병의 진영이 무너지자 휘하 막료들이 억지로 고경명을 탈출시키려고 하였다.
먼저 탈출했던 유팽로가 고경명이 아직 진 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돌아오자, 고경명은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으니 그대는 먼저 이 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며 유팽로에게 퇴각을 권했으나, 유팽로 역시 후퇴 할 뜻을 버리고 고경명을 호위하였다.
이어서 일본군이 벌떼처럼 공격해 오니 유팽로와 안영등이 고경명을 호위하며 싸웠으나 세 사람 이후 지휘부 모두가 전사하였다.

고경명의 차남인 인후 역시 선두에 서서 용감히 싸우다가, 의병군이 무너지자 부하들을 수습하여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전사하였다.
고경명의 큰아들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전사을 알지 못한 채 휘하 의병들을 수습하여 안전지대로 후퇴하였으나, 곧이어 비보를 듣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전사자 시체 속에서 부자를 찾아내 가까운 산사로 시신을 옮겼다.

고종후는 이후 남은 의병군을 수습하여 전국을 누비며 싸웠고, 다음해 제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순국하니 3부자가 모두 의병으로 순국하였다.

출처 : 푸른바다
글쓴이 : 나라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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