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성지순례 영상수필

에배소 - 1

高 山 芝 2012. 7. 18. 15:11
                    에 배 소| Ephesus

Ephesus 소아시아 서해안에서 번영하였던 고대도시이다.

에베소는 유럽대륙에서 소아시아로가는 주요 길목으로서 무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로마제국의 4대도시 가운데 하나였다.(4대도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안디옥,에베소)

에베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 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사도 성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Ephesus 현재명 Selcuk
에페소는 시미나(오늘날Izmir)로 부터 7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이다. 항구도시인 에페소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도시 국가간의 각축장이 되어 혼란을 거듭하다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정을 되찾았다. 당시에 세워진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그후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리시마쿠스에 의해 도시가 다시 건설되면서 번영이 시작되고, 로마시대에는 아시아주의 수도로서 한때 인구 50만에 이르는 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였다.안토니누스(Antonius)는 자기의 애인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함께  이도시에 다녀간 정도로 유명한 무역의 도시가 되었다.카이스터(Cayster)강의 범람으로  항구가 메워져 항구도시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하고 도시에 말라리아 전염병이 번져 폐허가 되었다. B.C190년 에페소는 소아시아의기독교 중심지었고  매우 중요한 도시었다. 사도 바오로는제 2차 전도여행과 제3차전도여행때 두차례에 걸쳐 이 도시를 방문하었으며. 특히 3차 전도여행에는 약 2년 3개월간 머물고 전도를 했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당한 후, 이번에는 사도요한이 노구를 이끌고 이 도시에 와서 사도 바오로가 일궈놓은 기독교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예수님으로 부터 마리아 부양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도 요한은 역시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에 왔다. 두분 모두 말년을 에페소에서 보내다가 이 도시에서 운명하셨다. 또한 이 도시는 431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제 3차 에페소 종교회의가 열려 200명 주교들이 모여 마리아의 신학적인 위치에 관한 마리아는 "Mother of God "으로 확인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이 도시는 기독교 초기의 5대도시(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에페소)중의 하나이며, 묵시록 교회중 첫번째 언급된다.에페소에서는 희랍의 철인 탈레스(Thales)와 헤라클리트(Heraclit, 540-480 B.C)가 활동하였다.


 

아르테미스(Artemis)여신 신전 - 에페소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던 아르테미스여신(로마인들은 Diana라고 불렀다)은 본래 달의 여신이었으며 호머의 작품체서는 사냥군 여신으로 등장한다. 에페소에서  아르테미스는 다산의 여신(fertility godness)으로 숭배되었다.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에페소의 상징이었고 에페소 사람들은 스스로 "전각지기"(temple keeper)라고 불렀다. (사도행전19장35절) B.C 7세기에 창건된 신전은 B.C 356년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정신병자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바로 이때 마케도니아의 수도 Pella에서는 알렉산더가 출생하였다.왜 아르테미스 여신은 자신의 신전이 방화범에 의해서 불타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아르테미스 여신은 알렉산더 대왕이 탄생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Pella로 가서 신전을 비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패배시키고 (B.C334 ) 에페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불타버린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을 재건시켜주겠다고 제안하였다.이 때 에페소 시민들은 자력으로 신전을 복구하기를 원하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제안을 "신(알렉산더 대왕을 지칭하는말) 이 다른 신의 신전을 건설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라고 외교적으로 거절하였다.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에페소 여자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귀금속을 다 바쳤다.B.C4세기에 재건된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가 큰 규모였다.(이것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됨) 즉, 길이는 약 130m, 넓이는 약 70m, 높이 또한 20m에 달하는 127개의 Ionic식 석주(기둥)가 신전을 둘렀다.이 재건된 신전은 사도 바오로 때에 있었다. 3세기에 에페소는 침입을 받고 신전은 약탈, 파괴되었다. 비잔틴 시대에 완전히 파괴되고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 이 파괴된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의 기둥들은 이스탄불로 옮겨져 St.Sophia성당을 짓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야외 원형극장- Cladius 황제 (A.D 41-54)때 공사가 시작되어 Trajan 황제(A.D 98-117)때 완성되었다.약 24,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 극장이다. 3단 구조이며 각 단은 22계단으로 되어있다. 196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Arcadian Street -원형극장으로부터 항구(고대시대)에 이르는 530m길이의 거리 이름이다. 거리 양쪽으로는 돌기둥이 서 있고 길바닥은 대리석으로 덮혀 있다. 길의 넓이는 양편의 인도까지 포함하면 21m에 이르는 넓은 거리이다. 밤에는 길 양 옆에 서있는 돌기둥에는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시설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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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sus도서관(The Library of Clesus) - Agora옆에 있는 유명한 에페소의 도서관이다. A.D135년 Julius Aguila가 그의 아버지, 곧 로마원로원 회원이었고 아시아의 총독이었던 Clesus Polemaenanus를 기념하여 건설한 도서관으로 현재 많이 복원되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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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eion(Doncert Hall)-A.D 2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약 1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소형 콘서트 홀이다. 22줄의 원형 계단이 있다. 다른 야외 원형극장과는 달리 빗물이 흘러가는 홈통 장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성서:요한묵시록 1장11절,2장1절.사도행전 19장1-40절,18장19-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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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에베소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 점의 비문에 의존하지만,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알 수 없다.

 

역사에서 에베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히타이트 성경의 헷 족속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 들에게는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 당하게 되자 사도 바울(PAUL)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리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 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64년 사도 바울기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버가모, 서너마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해, 이곳에서 계시록을 썼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이 피살 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베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어키인 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에베소는 지진으로 황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셀슈스 도서관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24,000명수용하는 원형 극장

에베소 창녀촌으로 가는 광고판

원형극장으로 가는 길에 창녀들이 집터가 있는데 그 앞 길바닥 대리석판에 여자와 돈과 발자국이 하나

그려 있는데 여자와 돈은 여자를 만나려면 돈을 갖고 와야 한다는 것이고 발자국은 자기의 발을 대어보고

그 발보다 크면 여자를 살수 있다는 암시로 2,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광고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