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2]
- 한국문인협회의 역사기행 -
高 山 芝 시인
점심식사 후 하얼빈 중앙대로를 찾았다. 하늘이 어두어지더니 천둥번개가 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산을 쓰고 걷는 하얼빈 중앙대로는 하얼빈 철도기지를 건설하면서 형성된 러시아인 거주지역으로서, 총길이 1.4km의 화강석 거리 양편에는 러시아풍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1977년부터 보행자 전용거리로 지정된 하얼빈의 대표적인 거리이자, 최대의 번화가인 중앙대로의 끝자락에서 지하도를 건너자 송화강이 나타났다. 아! 파인 김동환이 노래했던 송화강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송화강은 우리 민족의 강이다. 동명왕 신화에 나오는 하천의 신 하백이, 해모수와 통정한 딸 유하를 버린 청하가 바로 이 강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드넓은 만주땅을 굽이굽이 1,972㎞를 흘러서 흑룡강(러시아 지명 아무르강)과 합류한다. 송화강은 한족식 한자 지명 같지만 천하(天河)라는 뜻을 가진 여진말 '송알라울라'를 한자로 음역, 훈역한 것이다. 송알라는 송화로 음역, 울라는 강으로 훈역됐다. 1854년에 만주에 침입한 러시아 차르군을 물리치기 위해 만주로 갔던 조선군의 한 장령은 송화강을 송가라(宋加羅)라고 적고있다. 비내리는 송화강을 바라보면서 파인의 시 ‘송화강 뱃노래’를 읊던 시인의 눈자위는 붉어지고 눈물이 빗물에 섞여 흘러내렸다.
새벽 하늘에 구름장 날린다.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구름만 날리나
내 맘도 날린다.
돌아다보면은 고국이 천리런가.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온 길이 천 리나
갈 길은 만 리다.
산을 버렸지 정이야 버렸나.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몸은 흘러도
넋이야 가겠지.
여기는 송화강, 강물이 운다야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강물만 우더냐
장부(丈夫)도 따라 운다. - 송화강 뱃노래 / 김동환 -
1957년 일어난 송화강 대홍수를 기념하여 만든 방홍기념탑(防洪紀念塔)아래서 송화강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고 다음 일정을 위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피아 성당은 하얼빈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으로 53.35미터 높이에 전체면적이 721평방미터로 주변 극동지역에서는 최대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배전정(拜占庭)양식 건축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1996년 11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었다. 1997년 6월 성당의 내부까지 예전의 원래모습으로 복원한 후 '하얼빈 건축 예술관'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현재는 성당 내부에 하얼빈의 역사가 담긴 흑백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1903년 중동철로가 개통되면서 제정 러시아의 보병사단이 하얼빈에 들어오게 되었고, 제정 러시아는 멀리 고향을 떠난 사병들의 군심을 달래기 위해 1907년 나무 구조로 된 병사들을 위한 군 예배당으로 성소피아 성당을 건축하였다. 이후 1923년 9월 27일 재건축을 위한 시공식을 열고 장장 9년간의 심혈을 기울인 공사로 화려하면서도 전아한 건축예술품 성소피아 성당이 재탄생하였지만 내부의 벽화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건물 외벽에 둥지를 틀고있는 수백마리의 비둘기떼들과 어우러저서 다정하게 여가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한쪽에서는 웨딩촬영을 하고 있다. 날아오르는 비둘기떼의 비무(飛舞)가 갑자기 펼처지자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는 아이들, 덩달아 나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상차(上車)를 할 때는 만두를 먹고 하차(下車)를 할 때는 면(麵)을 먹는다는 중국의 속담과 같이 저녁식사에는 여려 종류의 만두가 나왔다. 음식이 푸짐하여 많이 남아돌자 열차에서 간식으로 먹자면서 싸시는 이순원 선생님, 한국의 여느 할머니와 똑같은 정겨운 분이다. 연길행 침대열차를 타기 위하여 하얼빈 역에 모였다. 가이드가 열차표를 나누어 주는데 차인호시인과 이승직 아동문학가. 그리고 내 이름이 호명되지 않는다. 염려할 것 없다면서 티켓이 없는 3명을 데리고 일행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가이드 김해련씨. 그곳에서 문신을 한 어깨출신(?) 같은 장정의 안내로 바로 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티켓 없이도 열차를 탈 수 있느냐는 나의 말에도, 역 공안들과 이야기가 되어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던 김해련씨가, 열차가 도착하자 식당칸으로 우리를 인도해 놓고는 사라저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열차여행은 5박6일간의 여정 중 우리들에게 가장 긴박한 상황을 연출한다.
10여분이 지나자 식당칸의 자리가 중국인들에 의해 만석이 되었다. 만석이 되자 찾아와서 무어라 말을 하는 승무원. 그러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절해의 고도에 떨어저서 막막했던 우리들에게 조선족 공안이 나타났다. 열차표가 없는 사람들이 음료수 등 식사를 주문하고 식당칸에 앉아서 여행을 하고 있으니, 출입문에 서서 기다리라 한다. 부부와 생이별을 한 차인호 시인은 의외로 담담하고. 앉아있게만 해주면 좋겠다는 이승직 아동문학가, 피곤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시간 쯤 지난 후 정종명 이사장과 차윤옥 실장에게 ‘식당칸에 티켓도 가이드도 없이 3명(유기되어)있읍니다’는 문자를 보냈다. 식당칸과 침대칸을 이어주는 출입문을 열쇠로 잠가놓고 통제를 하는 열차공안들. 하얼빈 가이드 최성록군과 연변부터 일정을 책임지고 있는 이건씨의, 공안과 협상이 어렵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 차윤옥 실장과 정인호 수필가가 찾아왔으나 출입구에 막혀서 돌아갔다. 협상이 결렬되자 자신의 침대칸 티켓 한 장을 내놓는 가이드 이건씨, 이승직 선생에게 침대칸을 양보한 우리는 일반객차칸으로 자리를 옮겠다. 덕분에 완행열차의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열차바닥에 누어있는 여자들과 상의를 탈의한 남자들만 빼면 60년대 호남선 완행열차 모습 그대로였다. 밤 10시 30분 열차는 오상(五常)에 도착했다. 하얼빈에서 급히 달려 온 여행사의 승용차. 승용차는 세일여행사 부사장의 남편이 직접 운전을 하고 왔다. 연길까지 동행하면서 불편함없이 안내하겠다는 가이드 최성록군. 비록 황당한 일이 벌어젔지만 수습하는 자세에서 진정성이 묻어나 우리들 마음을 훈훈케한다.
"공미(貢米, 임금님에게 바치는 쌀)"로 유명한 오상시는 흑용강성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현급 시 중 하나로, 3만8천여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소고기꼬치. 건두부꼬치로 맥주를 사는 가이드 최성록군. 이제 연길까지는 승용차로 약 5시간 정도 가야한다. 승용차에 오르자 금방 코를 골기 시작하는 차인호 시인을 따라 잠을 청했다. 새벽 4시20분 경 막 먼동이 트고 있는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에 들어와 숙소를 찾아 헤매기를 1시간 정도, 연길역 앞에 있는 호텔 환락궁에 방을 잡았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 마자 침대에 들어눕는 차인호 시인. 침대칸을 타고 온 동료들 보다는 그나마 세욕를 할 수 우리가 어쩜 운이 좋은 것 아닐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한결 가볍다. 6시 30분 경 동료문인들이 연길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헌데, 이승직 아동문학가가 연길역 전역에서 잘못 내려서 택시를 타고 오고있다는 소식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이승직 선생이다. 문제는 있었으나 사고로 연결되지않았는 것은 애국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보우하심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주간한국문학신문 - 2014년 9월 17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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