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 - 4 * 한국문인협회 역사기행

高 山 芝 2014. 10. 10. 09:43

[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 ]

                                         - 한국문인협회의 역사기행 -

                                                            高 山 芝 시인

이도백하는 백두산의 도시다. 백두산을 가려면 무조건 이 도시를 거쳐야 한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창빠이산)이라 하며, 그냥 백산(白山)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며 자동차로 약 5분 거리(약 1km)인 백하(白河)마을과 함께 백두산 관광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장거리 버스와 열차가 오갈 뿐 아니라 저렴한 가격의 숙소나 식당이 많아 여행자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택시를 이용하거나 관광버스를 탈 수도 있어서, 백두산 관광 성수기인 6~9월에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마을 곳곳에서 보이는 미인송(美人松)도 이도백하의 명물이다. 미인송은 곁가지가 많지 않고 위로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다

 

이도백하에 도착 대하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 세미나실에서는 문인협회 직원들의 양왕용 교수의 문학특강과 시낭송회준비가 한창이다. ‘윤동주의 신앙과 시인의 길’이란 특강에서 양교수는 윤동주시인이 연희전문과 입교대학, 동지사대학의 수학과정을 통해 내면적이고 자아성찰적인 기독교 세계관에서 점점 현세적이고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현실참여적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뀌어 지고 있다면서 이러한 의식의 전환점에 놓인 시가 “서시(序詩)”라는 주장을 하였다.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福岡)형무소의 독방에 수감 생체실험의 표본이 된 윤동주시인은 1945년 2월16일 숨을 거두었다. 광복을 6개월 앞두고 생체실험에 희생된 윤동주시인의 ‘서시’를 김연선 시인이 낭송하고 정종명이사장이 ‘별을 헤는 밤’을 낭송한 백두산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3대에 걸처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하여 새벽 5시에 호텔을 나섰다. 백두산의 날씨는 눈, 구름, 안개, 폭우, 강풍, 혹한 등이 일반적이며, 연중 변화무쌍해 쾌청한 날씨를 찾아보기 힘들다. 9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가 겨울이며, 봄이 되면 곧 여름, 가을로 이어져 버린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기후가 급변하고 구름에다 안개로 가려져 백두산의 전경을 보기가 여간해서 쉽지가 않다. 이런 연유로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를 행운으로 여겨, 영조때 선비 서명응은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에 실려 있는 제문에서 "높다란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진산으로 온 백성들이 우러러봅니다. 진작부터 전모를 근참하려고 벼르다가 이제야 왔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찬 바람 찬 이슬 맞으며 갖은 고초를 겪고 왔습니다. 산신령께서는 이런 정성을 살피셔서 구름과 안개를 거두시어 마음대로 근참하게 하소서. 하늘에는 해와 별이 환하여 감추는게 없사온데, 산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하늘의 뜻을 어기면야 되겠습니까?"라고 적고 있다.

 

휴일이어선인지 수천명의 관람객이 몰린 북파산문입구에서 가이드 이건씨의 안내를 받아 서틀버스를 탈 수 있었다. 자작나무 수림을 20여분 달려 도착한 도참구삼거리정류장에서 벤츠승합차로 환승하면서 시작된 천문동정류장까지 펼처지는 아찔한 자동차레이싱은, 천지를 보기도 전에 우리들의 혼을 홀라당 빼앗아버렸다. 선착장을 빠저나와서 수십길 벼랑위의 매우 좁고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손살같이 달리던 카프리섬의 명물 미니버스가 갑자기 생각났다. 승합차의 타이어를 2개월마다 새것으로 교체를 한다는 중국인들의 승합차 운전기술만은 알아줘야할 것 같다. 천문동정류장에 도착하자 겨울옷으로 중무장한 중국인들이 자주 눈에 띤다. 천지까지 이어지는 긴 순례의 대렬에 합류하여 한걸음씩 천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군거렸다

 

용왕담(龍王潭)이라는 별칭을 갇고있는 백두산 천지는 면적 9.17㎢, 둘레 14.4km, 최대너비 3.6km, 평균 깊이 213.3m, 최대 깊이 384m, 수면 고도2,257m 의 칼데라호(caldera 湖)다. 천지 둘레에는 장군봉(將軍峰)을 비롯한 화구벽오봉(火口壁五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이 화구벽에서는 남쪽의 불목[火項]이라고 하는 파극(破隙)을 통해서만 호반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호반 일대에 약간의 평탄한 땅이 있을 뿐 그 밖에는 깎아세운 듯한 절벽뿐이다. 호수 북쪽의 한 곳이 터져서 물이 흘러나가는, 달문(闥門)이라고 하는 화구뢰(火口瀨)를 이룬다. 호수는 여기서부터 흘러내려 650m 북류하다가 용암벽에 막혀 길이 30m의 장백폭포를 이루면서 협곡을 만들며 송화강(松花江)으로 유입된다. 호반의 동안과 남쪽 산기슭의 송화강 상류인 탕수평(湯水坪)에서 온천이 솟아난다.

 

33인의 문사들의 간절한 염원을 하늘이 들어주신 것일까? 천지가 신비하고 장엄한 민낯을 드러냈다. 울컥하는 목메임으로 바라보는 쪽빛호수. 민족의 영산인 천지에 지금 내가 서 있다. 하지만 우리 땅이 아닌 중국땅에 서있다는 자괴감 때문에 천지의 저편 장군봉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얼굴은 서럽다. 천지를 보고 내려오는 길, 소천지 주차장에서 내려 장백폭포로 향했다. 달문을 빠져나온 천지의 물은 천문봉과 용문봉 사이의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승사하(혹은 통천하)를 따라 흐르다가 68m의 수직 절벽을 따라 떨어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그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 같다하여 비룡폭포라 불렀던 선조들, 국권을 찬탈당한 시대적 상황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간도협약을 공론화 시키지 못한 죄 때문에 하산하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다. 역사는 단지 기억하는 것으로 그처서는 안된다. 역사 속에 묻어있는 민족의 얼을 되살려 함께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이번 역사기행의 참 뜻이라는 울림이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물이 서해으로 흐르면 압록강이, 북쪽으로 흐르면 송화강이 된다. 동해으로 흐르는 두만강은 천지에서 발원된 강이 아니다. 백두산에서 송화강으로 흐르는 일도백하, 이도백하, 삼도백하, 사도백하, 오도백하 등 5개의 지류 중 오도백하가 중국인이 말하는 토문강이다. 1712년(숙종 38) 백두산의 귀속을 주장해오던 청나라의 오라(烏喇)(吉林)총관 목극등(穆克登)은 송화강의 가장 오른쪽 지류인 오도백하를 두만강지류로 생각을 했다. 오도백하의 발원지에서 땅 속으로 스며들어 흐르는 강물이(건천) 한참을 거처서 토출수가 되어 두만강으로 흐르는 흥토수와 석을수가 된다고 믿었던 그는,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분수령으로 삼는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는 백두산정계비를 오도백하 근처에 세우려하였지만, 조선의 관리들이 정계비에 대한 목책공사를 하면서 땅밑으로 흘러간 지류를 조사해보니 이 지류가 동쪽으로 흐르지 않고 한없이 북쪽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홍토수가 아니라 오도백하의 지류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관리들은 정계비를 몇십리 남쪽으로 홍토수쪽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훗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논쟁이 생길 때 청나라측의 중요한 문제제기의 원인이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 등이 이 일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조선과 청나라는 비석을 다시 조사했는데, 비석 내용중 ‘토문’이라는 말을 놓고 양측의 의견이 엇갈렸다. 토문강이 송화강이다는 조선과 토문강은 두만강이라는 청나라의 의견이 상충된 것이다. 1880년(고종 17) 청나라는 갑자기 <토문>이 <두만>을 뜻하는 것이라 우기고 나와 이른바 간도 문제가 일어났는데, 1909년(융희 3) 한국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청나라와 흥정, 남만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전역을 청나라에 넘겨주는 <간도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간도는 우리 영토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북한과 협약, 백두산 천지의 한가운데 선을 경계로 국경선을 정하였다.

 

                                     - 2014년 10월 1일 주간한국문학신문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