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 - 9 ]
- 한국문인협회의 역사기행 -
高 山 芝 시인
중국인들의 민속신앙인 재신(財神)의 생일이 어제였다. 폭죽의 붉은 잔해들이 거리에 여기저기 널부러저있다. 점심을 먹은 후 걸어서 도착한 압록강변. 두만강보다는 훨씬 수량이 많았다. 혼강으로 불리는 비류수가 이곳에서 압록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유입된다. “졸본주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초가를 비류수 가에 엮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至卒本州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고 적고있는 삼국유사. 삼국사기는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고 기록하였다. 비류수가에 도읍을 정한 주몽(朱蒙)은 비류수(沸流水)에 채소잎이 떠내려옴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고 사냥을 하면서 비류국을 찾아가 국왕 송양(松讓)을 만났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 동안 이곳에서 왕 노릇을 해왔으나,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 어려우며 그대가 도읍을 정한 지 오래지 않으니 우리의 부용(附庸)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분노하여 송양과 활쏘기 등으로 겨루었으나 송양이 항거하지 못하고 이듬해 항복하였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비류수(혼강) 강변에는 옥황산 공원이 있다. 시간 때문에 차창으로만 볼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심양으로 향하는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심양으로가는 5시간의 여정, 휴게소 등 편이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때로는 노상방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인협회 홍보위원장을 맡고있는 홍성훈작가, 자칭 섹스홍의 구연동화와 19금 만담은 지루할법한 버스여행에 즐거운 추억거리를 재공하였다. 김종분시인의 시낭송과 공주박물관 엄기영님의 백제역사이야기.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을 아직도 외우고 있는 차윤옥시인과 가이드 이건씨의 연변노래는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기었다.
“엄마 곱니? / 아빠 곱니? / 누가 누가 더 곱니?
엄마없던 날 / 하루종일 비빔밥 만 먹었지요
아빠없던 날 / 밤새도록 도깨비불 만 주었지요
엄마야! 아빠야! / 우리 우리 같이살자
해도 있고 달도 있는 / 푸른하늘 아래서“
환향녀(還鄕女)와 호로자(胡虜子). 그리고 삼학사의 기개가 숨쉬고 있는 심양은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심양을 점령, 1625년 후금의 수도가 되었다. 1634년에는 성경(盛京)(만주어: 묵던)으로 이름을 개칭하였다. 청나라로 이름을 고친 후금은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북경으로 변경하지만, 심양은 제2의 수도로 대접을 받으면서 1657년부터는 봉천부로 불렀다, 1905년 3월 10일 일본군이 봉천에 입성하였고, 12월 3일에 서울에서 봉천까지 협궤선이 개통되었다. 1924년부터 대한민국의 독립군 삼부 중의 하나인 정의부가 길림성과 심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독립 지사가 망명하여 활동했던 '만주 봉천'이 바로 심양이다.
삼학사와 함께 소현세자·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간 삼전도의 비극, 청 태종은 내심 삼학사(윤집.오달제.홍익한)의 절개와 인품을 흠모하여 어떻게든 이들을 자신의 신하로 삼고자 갖은 회유와 설득을 하였으나 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몸바쳐 나라를 구하려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며 완강히 거절, 끝내 처형당하고 말았다. 삼학사의 이러한 절개와 기개에 청 태종도 감탄했다는 기록이 『승정원 일기』 『인조실록』 등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들 척화론자(斥和論者)와 함께 청나라의 군대가 철수하면서 전리품으로 끌고간 수십만명의 조선인 포로들, 시집간 부녀자(婦女子)와 처녀들이 대부분이였다. 심양으로 끌려간 딸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를 구해달라는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인조(仁祖)는 청(淸)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의 부녀자를 돌려보내 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포로들의 등급을 정하고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청나라, 수년 후에야 인조는 돈을 마련 그들을 데려왔으나 그때는 이미 겁탈당하고. 유린당한 우리의 딸 며느리들이였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천신만고(千辛萬苦)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녀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큰 아품이었다. 훼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환향녀는 환향년으로 오랑캐의 씨를 잉태한 환향녀가 낳은 아이 호로자(胡虜子)는 호로자식으로 낙인이 찍혔다. 냉대와 질시를 견디지 못한 수많은 환향녀들이 자진을 하는 등 민심이 흉흉해지자 인조가 내린 조서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 환향녀(還鄕女)가 절개를 잃은 것은
음행(淫行)때문이 아니라 전란 탓이다
대동강,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등
전국 각지의 강(江)을 내 친히 지정하노니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환향녀들은
이 강물에 심신을 정결하게 씻어낼 것을 명하노라.
강물에 몸을 씻어낸 환향녀들은 잃어버린 정조를
다시 되찾은 회절(回節)여인 으로 간주할 것이니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집안은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지 3년 후, 심양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만나게 되는 김상헌(斥和論者)과 최명길(主和論者), 16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나라에 충성했던 두사람은 지난 7년 동안의 오해를 풀고 자신의 심회를 시로 남기었다.
成敗關天運(성패관천운) - 성공과 실패가 천운에 달렸다면
須看義與歸(수간의여귀) - 모름지기 모든 것은 의(義)로 돌아가야 한다네.
雖然反夙暮(수연반숙모) - 아침과 저녁은 바꿀 수 있을망정
未可倒裳衣(미가도상의) - 웃옷과 아래옷을 거꾸로 입을수야 없지.
權或賢猶誤(권혹현유오) - 권도(權道)는 어진 이도 그르칠 수 있으나
經應衆莫違(경응중막위) - 정도(正道, 經)는 사람들이 어길 수는 없나니.
奇言明理士(기언명리사) - 이치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造次愼衡機(조차신형기) - 급한 때라도 저울질은 신중하게 하시게나.
김상헌의 운에 화답하는 최명길, 두사람의 시(詩) 속에는 명분과 절개 현실과 실리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재공하고 있다
靜處觀群動(정처관군동) - 고요한 곳에서 여러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眞成爛漫歸(진성란만귀) - 참되게 합의점을 이룰수 있다네.
湯氷俱是水(탕빙구시수) - 끓는 물과 얼음 모두 같은 물이고
裘褐莫非衣(구갈막비의) - 털옷도 삼베옷도 옷 아닌 것이 없느니.
事或歸時別(사혹귀시별) - 혹 일이야 상황에 따라 달라질지라도
心寧與道違(심녕여도위) - 어찌 속마음이야 정도에 어긋날 수 있으리오.
君能惜斯道(군능석사도) - 그대도 능히 이 이치를 깨달아 알고 있으니
語黙各天機(어묵각천기) - 묵묵히 각기 하늘의 이치를 지켜 나갑시다.
- 주간한국문학신문 2014년 11월 05일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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