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원의 시작
국립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중국 송대와 원대, 명대, 청대 네 왕조의 궁정유물을 계승한 것으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상당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근대 중국사회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 속에 발전해왔다.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13년 후, 청왕조의 마지막 황제 부이(溥儀)가 자금성 밖으로 나가게 되면서, 궁중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정리를 시작되었고, 고궁박물원이 새롭게 설립되었다.1925년 10월10일 고궁박물의 설립으로 역대 황실소장의 궁정 유물은 전 인류의 문화 유산이 되어 세세대대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며,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페이지(易培基, 1880-1937)선생이 초대 원장에 취임하였고, 1925년부터1931년까지는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초창기라 할 수 있다
국보를 사수하기 위한 만리길 여정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면서 북경과 천진지역은 전쟁상황에 처하고 화북지역의 상황이 급박해졌다. 고궁박물원은 사전대비의 차원에서 중요한 유물을 상자에 담아 보관하여 수시로 운반할 수 있도록 피난준비를 시작하였다. 1933년1월, 전세가 악화되고 일본군이 산해관을 넘어오자 1934년1월 31일 고궁박물원의 유물들은 다섯 무리로 분류되어 총 19,557상자에 담겨졌다. 그 중에는 유물전시실을 비롯한 이화원(頤和園)과 국자감(國子監) 유물 6,606상자가 포함되었으며, 몇 차례에 나뉘어 남쪽으로 옮겨졌다. 1934년2월, 국민당정부는"국립 베이징 고궁박물원 임시 행정조직 조례"를 발표하여 고궁박물원을 행정원 소속으로 하고, 마헝(馬衡, 1881–1955)을 초대 원장에 임명하였다. 이 시기 상하이로 운반된 유물과 베이징에 남겨진 유물에 대한 조사정리가 실시되었다. 1935년 고궁박물원은 상하이에 있는 유물 중 대표적인 작품을 선별하여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중국예술 국제 전시회(International Exhibition of Chinese Art)"에 전시하였다. 1936년12월, 난징(南京)에 분원이 건립되고 고궁박물원의 유물은 상하이를 거쳐 난징의 차오티엔궁(朝天宮)에 새롭게 지어진 수장고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1937년, 77사변의 발발과 고궁박물원 난징분원
행정원의 지시에 따라 유물들은 각각 남로, 중로, 북로로 나뉘어 후방으로 옮겼다. 일차적으로 옮겨진 유물은 모두 80상자로, 대부분이 런던"중국예술 국제 전시회"에 참가했던 중요한 유물들로 우한(武漢)을 거쳐 창사(長沙)에서 꾸이양(貴陽)과 안쑨(安順)을 통해 쓰촨(四川)의 빠시엔(巴縣)으로 운반되었는데 이것이 남쪽 노선이다. 중앙노선을 통해서는 총 9,331상자의 유물이 운반되었다. 한코우(漢口)와 이창(宜昌)을 거쳐 총칭(重慶)과 이빈(宜賓)을 통해 마지막으로 쓰촨(四川)성의 러산(樂山) 안구샹(安谷鄉)으로 운반되었다. 북쪽노선은 진푸(津浦)철도를 따라 북상하여 쉬조우(徐州)에서 롱하이(隴海)철도로 갈아타고 바오지(寶雞)에 도착한 다음, 다시 한쭝(漢中), 청뚜(成都)를 거쳐 마지막으로 쓰촨(四川) 어메이(峨嵋)에 도착하였는데 운반된 유물은 모두7,287상자였다. 항일전쟁 기간동안 유물의 보존과 보호가 고궁박물원 업무의 중심이 되었지만, 전시도 여러차례 개최되었다. 1939년7월, 고궁박물원은 꾸이조우(貴州) 안쑨(安順)의 화이엔똥(華嚴洞)에 보관되어있던 유물 중에서 상(商)과 주(周)시대 청동기 10점과 옥기 40점, 서화 48점, 송대와 원대 테피스트리 각 1점 등 모두 100점을 선별하여 러시아 모스코바로 운반, 레닌그라드에서 열린"중국예술전시회"에 참가하였다. 1942년12월, 이 유물들은 총칭(重慶)에서 개최된"제3회 전국 미술전시회"에 전시되었으며, 전시회를 마치고 다시 안쑨(安順) 수장고로 돌아왔다. 본원 소장품의 토대가 된 다른 한 갈래는 1933년 베이징 유물진열소 소장품을 중심으로 난징에 설립된 중앙박물원 준비처의 유물들이다. 1937년 11월 중앙박물원 준비처 소장 유물들 또한 전란을 피해 수로를 통해 서쪽으로 운반되어 총칭(重慶)으로 옮겨졌다. 1939년, 다시 콘밍(昆明)과 러산(樂山)으로 운반되어 최종적으로 쓰촨 난시(南溪)의 리좡(李莊)에 도착하였다. 1945년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후방으로 옮겨졌던 유물들은 천신만고 끝에 다시 난징(南京)으로 돌아오게된다
대만국립고궁박물관 정문에서 집사람과 한 컷
바다를 건너 타이완으로, 박물관을 다시 열다
1948년 가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황이 역전되면서 중앙정부는 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준비처의 핵심유물들을 타이완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이때 중앙도서관과 중앙연구원산하 역사언어 연구소, 그리고 외교부와 교육부의 관련 유물과 문서 등이 함께 운반되었다. 1948년 말, 일차적으로 운반된 유물은 난징으로부터 해군 함정에 실려 지롱(基隆)에 도착하였다. 다음해, 두 번째와 세번째로 운반된 유물들이 타이완에 도착한다. 운반된 고궁박물원 유물 총2,972상자는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옮겨진 유물의 22퍼센트 밖에 되지 않지만 중앙박물원 준비처 유물 852상자와 더불어 상당히 중요한 유물들이다. 고궁박물원이 타이중(台中)에 있던 시기, 정부는"국립중앙박물원 공동 관리처"를 설립하고 고궁박물원과 중앙도서관 및 중앙박물원 세 기구에서 타이완으로 옮겨온 유물과 인원을 합병하여 교육부에 소속시키고 항리우(杭立武,1902–1991)부장이 주임위원에 겸임하였다. 타이중현(台中縣) 우펑향(霧峰鄉) 베이꺼우(北溝)에 수장고가 신축되고 유물에 대한 조사와 정리를 실시하였으며,《중화문물집성(中華文物集成)》전집이 출간되었다. 1957년에는 베이꺼우 전시실이 정식으로 문을 연다. 1961년 대표유물 253점을 선정하여"중국의 국보(Chinese Art Treasures)"란 주제로 1년간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보스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의 5대 도시를 순회하는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그 중 50점의 핵심 유물을 다시 선별하여 뉴욕 세계박람회에 전시하였다. 1965년 타이베이 와이쐉시(外雙溪) 새박물관 건물이 완공되었다. 행정원은"국립고궁박물원 관리위원회 임시 조직조례 규정"을 공포하고 왕쉐우(王雲五)선생을 주임위원으로, 쨩푸쫑(蔣復璁)선생을 원장에 임명하였다. 신축 박물관은"중산박물원(中山博物院)"이라 명명하고, 국부 손문(孫文)선생 탄신 백주년 기념일에 맞춰 개관하였다.
좌로부터 범성이, 필자, 의영이, 원창이, 규봉이 등과 함께
'영상수필 은혼식 기념 대만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상수필 - 대만여행기 / 서문정(西門町) 거리 - 2 (0) | 2014.12.03 |
---|---|
영상수필 - 대만여행기 - 서문정(西門町) 거리 - 1 망고빙수도 먹고 (0) | 2014.12.03 |
영상수필 - 대만여행기 / 국립고궁박물관 - 2 (0) | 2014.12.02 |
영상수필 대만여행기 / 국립 고궁 박물원 - 1 (0) | 2014.12.02 |
영상수필 - 대만여행기 - 7 (0) | 2014.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