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수필 은혼식 기념 대만행기

영상수필 - 대만여행기 / 지우펀(九汾) - 3

高 山 芝 2014. 12. 9. 16:48

 지우펀(九汾)은 타이완의 2.28 발상지이기도하다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으로 만주, 타이완 섬(臺灣島)과 펑후 제도(澎湖諸島)는 일본제국(日帝)에 할양되었다. 일제는 타이완 총독부를 설치하여 50년간 타이완을 식민지배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그 해 10월 17일 국민혁명군이 타이완에 상륙함으로써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를 영토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이 집권하던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인해 타이완에 정예 관료나 군인을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정단위인 성(省)을 설치하는 대신 천이(陳儀)를 타이완 성의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으로 임명해 이 곳을 국민혁명군의 군사점령지역처럼 관리했다. 타이완에 대한 군사통치는 현지 주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기는 커녕 일제의 식민통치행태를 답습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타이완 사회는 종전부터 타이완에 살고 있었던 본성인(本省人[2])과 1945년 광복 이후 중국 대륙에서 새로 이주해온 외성인(外省人[3])이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계층 간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겪게 된다. 특히, 일제(日帝) 식민통치자들이 빠져나간 관직을 대부분 외성인(外省人) 출신자들이 차지하면서 정치구조의 상부를 외성인들이 독점하고, 본성인들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지방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독특한 정치구조가 만들어졌다.[1] 이러한 현상은 국공 내전으로 영토의 대다수를 잃은 중화민국 정부가 1949년 말에 난징 시에서 타이베이 시로 옮겨와 타이완이 사실상 중화민국의 중심지로 부상한 이후 더욱 심화된다

 

1946년 당시 통계에 따르면 최고위직은 모두 외성인들이 차지하였고, 천임(薦任) 이상의 중상위직에 임명된 본성인(本省人)의 수조차 전체의 20%에 미치지 못했다. 본성인들은 외성인의 절반에 불과한 월급을 받았는데, 이는 일제 식민시기에 본성인이 일본인 월급의 60%를 조금 넘게 받았던 것보다도 더 극심한 차별이었다. 또한 식민지 시기 일본인 가옥들을 외성인이 대부분 차지하면서 외성인과 본성인 사이에 거주지역의 구별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공 내전 막바지에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 온 약 60만의 하층계급 군인들이 도심 주변에 거주하게 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은 1949년 이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유지시킨 국민당의 절대적 지지기반이 되었다. 1949년 미국 국무부에서 나온 《중국백서》에 따르면 "정복자의 지배가 다시 시작되었다"라는 인식이 타이완 사회 내부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