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원인]
1945년 10월 25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은 중화민국 소속 국민혁명군에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이날부터 타이완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복귀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타이완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들의 통치는 본토에서와 다르지 않았고, 일제(日帝)의 식민통치만큼 가혹했다.
“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
— 미국무부, 중국백서
외성인(外省人)에 비해 본성인(本省人)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요직은 장제스(蔣介石)를 위시한 외성인들이 차지했고, 정부가 본성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펴자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타이완을 억압하기만 할 뿐 타이완의 민심에는 관심이 없었고, 타이완을 대륙에서의 전쟁을 위한 일종의 군사기지처럼 취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이완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팽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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