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문기행

중국인문기행 - 223 / 부자묘

高 山 芝 2015. 7. 21. 10:27

 

 

간신을 장원급제시킨 옥토천

송나라 간신 진회(秦檜 : 충신 악비를 무고죄로 죽인 중국 10대 간신의 한 명)가 판 우물이다. <지정금릉신지(至正金陵新志)>에 따르면 부자묘 학궁에서 공부를 하던 진회는 우연히 토끼가 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진회는 사람을 시켜 토끼가 사라진 땅을 파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샘이 발견되었다. 그 후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그는 샘이 발견 된 것을 길하게 여겨 우물을 만들고 직접 “옥토천(玉兎川)” 세 글자를 써 넣었다.

 1984년 부자묘 복원공사 중에 미처 복원하지 못했던 것을, 공자탄생 2560주년을 기념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    

 

부자묘가 처음부터 공자사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동진(東晉)의 학궁(學宮)이었던 것을 확장해서 공묘로 만든 것이다. 사마예(司馬睿)는 서진(西晉)말기, 세 명의 황제를 보필한 바 있는 대신 왕도(王導)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진(東晉)을 세웠다. 제위에 오른 사마예는 무신인 대막(戴邈)의 상소를 받아들여 태학(太學)을 세웠는데, 이것은 유학을 가르치는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사마예는 인재육성에 뜻을 두어 곧 왕도에게 명하여 진회하 부근에 태학을 세우게 하였고, 이 태학을 “동남제일학(東南第一學)”이라 불렀다. 동남제일학은 원나라 때는 집경노학(集慶路學), 명대에는 응천부학(應天府學)이었고, 청대에는 두 현(縣)의 교육을 담당하는 장부학(將府學)이었다. 당나라 이후부터는 태학을 국자감(國子監)이라 불렀다.

 고대에 학당을 지으려면 반드시 공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래서 각지의 공자사당은 국가 제례의 일부로 종속되고는 했다. 사당은 학궁(學宮)의 앞이나 옆에 위치했다. 남경 부자묘는 사당이 앞에 있고, 학당이 뒤에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남경의 부자묘는 공묘, 학궁, 공원(貢院 : 고사실)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거 공묘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격식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