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문기행

비수지전[ 淝水之战, Battle of Fei River ]

高 山 芝 2015. 7. 21. 14:33

 비수지전[ , Battle of Fei River ]

오호십육국 시대인 서기 383년 북방의 전진()이 남방의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남하하였다가 지금의 안후이성() 서우현(寿, 수현) 동남방 화이하() 지류인 비수()에서 80여만의 전진()이 동진()의 사현()이 이끈 8만의 군사에 대패한 전투.

화베이의 패권을 장악했던 후조()가 멸망한 후 저족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전진()이 점차 성장하여 화베이의 패권을 차지하였으며 부견()은 357년 제위를 탈취하여 3대 황제가 되어 한인 왕맹()을 중용하고 국력이 강대해져 단기간에 동쪽의 전연(), 남쪽의 양()과 익() 2개 주()를 획득하였으며 북쪽으로 선비() 탁발씨()의 대(), 서쪽으로 전량()을 점령하고 서역(西)까지 정벌하며 376년 화베이의 통일을 이루었다. 왕맹()은 죽기직전 부견의 남진정책을 반대하였으나 부견은 조기에 중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왕맹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의 사후 바로 동진()의 공격에 나섰다.

동진은 전진의 남침에 대비하여 376년 태원() 원년 효무제() 사마요()가 친정()을 시작하고 사안()을 중서감(), 록상서사()로 승진시켜 조정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사안은 조카 사현()을 연주자사()로 임명하여 광릉(广)에 배치하며 사안이 관할하던 양주(), 예주(), 서주(), 연주(), 청주()의 5개 주()의 군을 통솔하며 창강(, 장강)하류 강북일선의 방위를 총괄토록 하였다. 사현은 광릉(广)에 머물며 훌륭한 장수와 정예병을 양성하여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군대를 양성하였고 이들은 북부병()으로 칭해졌다.

378년 4월 전진은 정남대장군() 부비()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7만을 이끌고 양양()을 공격하게 하였고 부견은 별도로 10만여 군대를 3개로 나누어 함께 양양을 포위하여 총 17만 병력으로 공격하여 1년여 만인 태원() 4년(379) 2월 이를 함락시켰다. 부견은 이어 팽성()을 공격하였고 양측 간의 회남지전()에서 사안()은 건강()에서 수비하며 사현에게 5만의 북부병을 광릉에서 출병토록 하여 사현이 4전4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사안은 건창현공(), 사현은 동흥현후()에 봉해졌다.

태원 8년(383) 5월 동진은 먼저 한충경()에게 10만의 형주() 병력을 동원하여 진()을 공격하여 진군()을 견제토록 하자 부견은 부예(), 모용수(), 요장() 및 모용위() 등으로 전투에 임하게 하고 자신이 친히 60만 병력을 인솔하여 기병 27만을 동생 부융()으로 선봉을 삼아 8월 대거 남침을 시도하였다. 이에 사안은 사석()을 전선대도독(线)으로 삼고 사현을 선봉으로 하여 8만 병마를 3개로 나누어 진군()을 맞아 출병시켰다.

11월 사현은 유뇌지()로 하여금 5천의 정병으로 기습하여 진군() 10여 장수를 죽이고 5만 주력을 격파시켰다. 12월 쌍방은 비수에서 결전하기에 이르렀다. 사현, 사담() 및 환이()는 진군() 7만을 이끌고 부견과 부융이 통솔하는 전진의 15만 대군에 전승하며 부융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부견은 혈혈단신으로 도망쳐 모용수에 의해 보호받으며 12월에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로 중국의 남북 분립의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되게 되었다. 동진은 이 전투의 승리를 호기로 삼아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 이남의 옛 영토를 되찾았으나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후에는 수세로 일관하였으며, 전진은 이 전투의 패배로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부견은 385년 치앙족(, 강족) 요장()에게 붙잡혀 선양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며 살해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부비가 뒤를 계승했으나 서연에게 대패 후 도망 중 동진군에게 죽었다. 이후에도 일족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394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모용수()는 도중 부견과 헤어진 후 업에서 384년 자립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은 동생 모용충과 합세하여 전진의 요장을 격파하고 장안의 함락을 도모하였으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그 뒤를 모용충이 계승하여 서연(西)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에게 패한 요장은 치앙족(,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을 세웠다. 전진의 장군 여광()은 서역 원정후 복귀 중에 비수의 패전을 듣고 간쑤에서 자립하여 후량()을 건국하였다. 이와 같이 화베이는은 혼란 속에 빠져들어 전후 10개국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혼란은 386년 탁발규에 의해 부활한 대국()이 북위로 이름을 바꾼 뒤에 세력을 확장해 최종적으로 화베이를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