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 남경으로 난을 피해 도망친 명나라 조정의 개혁파들이 결성한
‘동림당(東林黨)’ 인사들은 다시 ‘복사당(複社黨)’을 조직하여 북경 정부
당시 황제 등 뒤에서 전권을 휘둘렀던 태감(太監) 위충현(魏忠賢)의
잔당으로 이미 관직에서 파직되었던 완대성(阮大鋮) 일당과 대립했다.
그때 복사당의 중견으로 있던 후방역(侯方域)이라는 사람은 진회(秦淮)의 가기(歌妓) 이향군과 우연히 만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후방역이 이향군에게 시 한 수가 쓰여진 부채와 비녀 한 개를 보냈다.
다른 한편 완대성도 역시 이름을 감추고 다른 사람을 시켜 많은 혼수를
보내 후방역을 농락하려고 했으나 이향군이 알고 단호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완대성이 마음속에 깊은 한을 품게 되었다.
남명의 황제로 새로 즉위한 홍광(弘光) 황제에 의해 기용된 완대성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후방역을 모함했다. 후방역이 화를 피해
사가법(史可法)이란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달아나자 완대성은
이향군을 강제로 다른 사람에게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이향군이 결연히
완대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머리에서 난 피가 후방역에게서 정표로 받은 부채를
적셨다. 이때 후방역의 친구 양용우(楊龍友)란 사람이 재빨리 부채에
떨어진 피를 이용하여 꽃이 핀 복숭아나무를 그렸다. 이윽고 남명이 멸망하자 이향군은 산으로 들어가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계속해서 청나라에 의해 양주(揚州)가 함락되자 후방역은 도망쳐 이향군을 찾았으나 그도 결국 출가하여 도사가 되었다. 공상임(孔尚任)의 도화선(桃花扇)이라는 희곡은 청왕조 시대 때의 최고의 걸작이다. 공상임은 도화선이라는 작품을 쓰는데 10여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공자의 64대 손인 그가 도화선을 출간하자
북경천지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서로가 관람을 먼저 보기 위해 다투었으며 낙양의 지가를 폭등시켰다. 도화선이라는 희곡의 내용은 이향군과 후방역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공상임은 작품 속 여기저기에 춘추필법을
발휘하여 세태를 풍자했는데 ‘ 연인들의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을 빌려
나라의 흥망에 대한 감상을 그려냈다. ’고 했다. 공상임은 도화선을
출간함으로 해서 강희제(康熙帝)에 의해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이향군은 명나라 말 남경의 진회(秦淮) 구역 출신의 이름난 기생이었다.
그녀는 남명정권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낭만성을 지닌 비극적인 여주인공이다. 이향군의 종적에서 축소된 남명의 비극적인 운명이 조명된다.
이향군은 어려서부터 예인(藝人)들을 따라다니며 기예, 음률, 시사,
죽사(竹絲) 및 비파 등의 악기를 배워 모두 정통했다.
특히 남곡(南曲)에 정통하여 그 목소리가 감미롭기 그지없어 천하 사방의
선비들이 사모하여 찾아왔다.
후방역은 원래 하남(河南) 출신으로 강남의 풍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금릉(金陵)으로 들어와 직업을 구했다. 풍류남아의 신분으로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기개가 높은 후방역은 재주가 넘쳐 이내 복사당(複社黨)의 명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금릉의 진회(秦淮) 강변에 살고 있던 모벽강(冒辟疆)、진정혜(陳貞慧)、방이지(方以智) 등과 교유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사공자라고 칭했다. 그들은 온 종일 진회의 기루에 앉아서 시사(詩詞)를 논하고
기녀들을 희롱하며 노래를 즐겼다. 오경재(吳敬梓)는 일찍이 자신이 진회지간의 기루에서의 방탕한 생활에 대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노래한 바가 있다. “
迩来愤激恣豪侈(이래분격자호치)
얼마 전 격한 마음으로 달려와 맘껏 호사를 부리며
千金一擲買醉回(천금일척매취회)
천금을 던져 마신 술에 정신을 잃었다
老伶小蠻共臥起(노령소만공와기)
자령과 소만을 옆에 끼고 딩굴다가
放達不羈如癡憨(방달불기여의감)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살기를 미친사람과 같았다.
싯귀만으로도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방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공자는 당시 진희의 홍등가에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와중에 후방역을 한 번 보게 된 이향군은 그 즉시 마음이 끌렸고, 후방역
역시 이향군의 재주와 미모에 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방역의 집은 가난해서 많은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못했다. 그런 후방역을 향해 이향군은 오히려 위로하며 말했다. “ 도포가 없어도, 가난해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비록
포의를 걸쳤지만 이름에 향기가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이것은 이향군이
고매한 인격과 절개를 갖춘 여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상임의 도화선은
이향군을 일개 기녀로 대한 당시의 남명 학사들이나 문인들을 오히려
비속한 영혼을 갖고 부류로 묘사했다.
대명강산에 비바람이 몰아쳐올 때, 후방역은 반청운동에 투신하여 투쟁하고 있었다. 그때 봉양(鳳陽) 독무(督撫) 마사영(馬士英)은 복사당과의
원한으로 인하여 후방역에게 죄를 되집어 씌여 체포하려고 했다.
그것을 알게 된 양용우(楊龍友)가 달려와 소식을 전하자 이향군은 눈물을
흘리며 금릉을 떠나는 후방역을 전송했다. 후방역은 그때 한 수의 시가
씌여진 부채를 맹세의 징표로 주었다.
부채의 표면에 씌여진 시는 다음과 같았다.
夾道朱樓一径斜(겹도주로일경사)
좁은 골목 경사길 옆 붉은 누각을 향해
王孫初禦富平車(왕손초어부평거)
부평거(富平車)를 타고 나타난 왕손을 처음 보았다.
春溪盡是莘夷樹(춘계진시신이수)
봄날 개울물은 모두 신이수(莘夷樹)에 빨리고
不及東風桃李花(불급동풍도리화)
동쪽에서 부는 바람은 도리화에 이르지 못했네
공상임의 도화선은 바로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러나 공상임은 도화선에서 차용하여 전조(前朝) 즉 명나라의 일을 말하려고 했다. 도화선을 집필하던 공상임은 몇 번이나 양주(揚州)를 들려 양주의 매화령(梅花嶺)에서
남명정권의 항청명장 사가법(史可法)의 묘 주위를 배회하며 도화선의 혼백을 찾으려고 했다. 도화선은 원래 명나라의 낭만적인 일을 그리려고 한 것이나 공상임의 필력으로 부채를 강조하다보니 명나라가 다소 쓸쓸하게 묘사되고 말았다. ' 적막한 옛 릉 앞에서 이름없는 신하는 눈물을 흘리고, 가을바람은 까닭 없이 옥하(玉河)의 강물을 출렁이게 하누나!' 라고 읊은 것은 일개 한 족의 입장에서 명나라 왕조에 대한 아픈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후방역이 금릉(陵後)을 떠난 후, 이향군은 두문불출하여 일편단심으로
후병역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이때 양용우(楊龍友)는
마사영(馬士英)의 천거로 남명왕조에서 예부주사(禮部主事)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영은 오히려 양용우를 박해하고 마씨들의 친척인 전앙(田仰)을 앞세워 이향군과 연분을 맺으려고 했다. 이향군이 한사코 거절하자 이향군을 직접 찾아간 마사영은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이향군을 위협하여
굴복시키려고 했다. 이에 이향군은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스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자 새빨간 핏방울이 후방역이 주고 간 부처위에 방울져 떨어졌다. 마치 낭군에게 바치는 한 곡의 순결을 위한 노래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향군의 강고한 절개에 감동한 양용우가 갑자기 영감을 얻어 붓을 들고 부채위의 핏방울을 이용하여 의연한 복숭아나무로 만들고 싯귀를 적어 넣었다.
흩뿌려진 핏방울로 도화선을 만드니
(濺血點作桃花扇: 천혈점작도화선),
나뭇가지와 사람머리가 구분되어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나!
(比作枝頭分外鮮 : 비작지두분외선)。
그러나 후방역은 후에 남명왕조를 배반하고 청나라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
이에 대단히 실망한 이향군은 강산은 이미 청나라 세상으로 바뀌어 나라가
이미 없어진 세태를 비관하여 후방역과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도화선을 찢어버리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러나 공상임은 그의 회곡
작품에서 후방역의 배신행위를 언급하지 않고 희극과 비극의 교차를
강렬하게 묘사하지 않았으며 이향군 역할 역시 그녀의 개성이나 인격을
제고시켜 예술적 경지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했다.
지금도 남경의 진회(秦淮) 강변의 미향루(媚香樓)가 다시 지어졌고
금릉(金陵)의 서하산 꼭대기에는 도화선정(桃花扇亭)이 있어
매년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도화꽃이 찬란하게 휘날리는 봄날 바람에
머금은 이향군의 미소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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