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방황의 길
- 고산지 서사시 <독립 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다>
채수영(시인.문학비평가)
1.역사와 서사시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강 변에 우르크를 126년 동안 통치했던 왕 길가메쉬는 약 4800년 전쯤의 서사시 <<길가메쉬>>의 일대기를 점성토로 기록했고, 중국에서는 죽간으로 유럽에서는 파피루스로 인류문화의 기록이 시작되었다. 서사시 길가메쉬 이후 약 2천 년 뒤에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가 나왔고 그 이후로 문학의 태동은 갈래를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구한 세월 동안 남자의 전유물인 pen에서 1940년 이후 컴퓨터의 변화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문화를 구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29년이면 AI가 인간의 지능에 접근하고 2045년이면 로봇이 인간을 앞서는 특이점에 도달한다는 예언은 우리 앞에 서 있다.
이런 문화의 발달 추세는 결국 인간의 삶에 대한 변화를 전제로 한다. 기계와 인간의 역사가 공존으로 접어들었고 여기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생활진전이 예상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역사는 곧 문학의 소재가 되고 이 소재의 바탕은 다시 삶의 변화를 수용하는 쪽으로 갈래를 형성할 것이다. 또한, 서사시는 곧 역사 속에 있었던 인물이나 사건을 시적 상상의 옷을 입을 때 비로소 문학으로의 표정을 감지하게 된다. 그 때문에 역사는 곧 문학의 바탕을 구성하는 절대 인자(因子)로 불가분의 관계망을 설정하게 된다.
2. 문학과 서사시
서사시의 구축은 영웅의 일대기였고 이로부터 소설이 길을 개척하게 된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소설은 비로소 인간의 리얼한 현상을 묘사나 설명으로 혹은 심리적 방법으로 인간문화의 한 굴대를 감당해왔다. 그러나 소설은 미구에 소설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혹은 비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질 것을 예고한다. 줄거리를 입력하면 한 편의 소설을 써내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조선일보> (2018.811)에 ‘비서와 CEO’키 워드를 주니 AI가 로멘스 소설을 완성했다는 기사에는 산업경영공학과 박사과정의 학생이고 3600자 소설을 단 1초에 완성했다는 보도는 이제 시나리오나 소설의 구조는 인간의 곁을 떠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문학의 땅에도 변화가 몰아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에도 상상의 산물이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예상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 문화는 <사서삼경>의 주석(註釋)이나 외우는 지식의 한계로, 중국 역사인 25사나 자치통감 혹은 통감절요를 배우고 외우는 일에 집착하여 우리의 역사는 뒷전이었으니, 문학의 꽃인 시(詩) 또한 시경(詩經) 305수에 매달려 우리의 정서를 창조로 연결한 것은 거의 없었다. 이는 앞사람의 문화를 금과옥조로 떠받들면서 오로지 창조보다는 선대의 문화를 ‘계승’(繼承) 하는 것을 학문으로 알았기 때문에 문학에서도 위대한 창작문학- 비극을 겪었어도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같은 전쟁문학이 없고 뛰어난 연애소설이 없다. 다시 말해서 선인들의 문학에 대한 계승을 절대의 가치로 신봉하는 풍조는 상상(想像)의 차단을 가져왔고 이런 이유로 <시경>은 시에 절대적인 교과서- 벽을 넘지 못한 마치, 시의 전범(典範)처럼 신봉했던 것을 반성할 필요는 없을까. 사서삼경에 주석(註釋)을 다는 것으로써 오로지 학문의 본질로 생각한 우리 문화의 특성은 우리만의 것에 부재를 가져왔다. 서사시의 경우,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등 특수분야에 한정하는 표현의 빈약성을 노증했으니, 이런 현상은 결국 상상력의 고갈 풍조-즉 문학의 바탕에 찬양가에 한정하는 것은 우리 학문의 풍조가 만든 반성의 목록일 것 같다.
3. 현대사 그리고 서사시
일제 36년은 우리 민족에게는 암흑기라 칭한다. 주권이 침탈되었고 자주권이 상실된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유약한 역사적인 현상을 지적하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의 최종 책임은 곧 그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의 풍조는 외세의 침탈 앞에 아무런 대비도 없었던 사실이 곧 암흑기를 가져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왕조의 몰락뿐만 아니라 정신(精神)의 몰락을 가져온 근원은 지도자들의 어긋난 판단에서 미래를 위한 대비를 소홀히 한 죄명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여, 36년의 질곡(桎梏)의 세월은 참담한 비명을 삼키는 결과 앞에 다가온 칠흑의 어둠은 자생력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미국, 중국, 소련이라는 외세의 협의로 일시에 다가왔으니 이는 극심한 혼란의 지경을 초래한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 과정의 불합리와 모순 그리고 반성의 목록으로 치부된 역사적인 사실이 중견 시인 고산지의 냉엄한 판단에 의해 서사시의 길을 재촉한다. 문학사에서 해방인 1945년 8월 15일에서 김일성의 남침인 1950년까지를 혼란의 시대로 정리한다. 이 시대의 정치적인 혼란은 이념의 대립으로 치달아 혼란이 극에 달했고 결국 북은 소련의 사주를 받은 33세 살의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했고, 남한은 이승만의 집권으로 정부수립- 1948년을 기점으로 이데올로기가 서로 간에 대결로 치달아 강을 마주 보는 삿대질의 비극에 물살이 흐르고 있다.
해방은 빛나는 햇살이었지만 우리 자신이 가져오지 못한 죄업은 주로 고산지 시인이 추적하는 정치사의 일별(一瞥)이 아픔으로 노래된다
4. 혼란으로 점철된 현대의 출발
우리 역사의 시대구분은 근대와 현대라는 말이 때로 혼동된다. 왜냐하면, 역사가 짧다는 데서 오는 갈등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근대 왕조의 몰락에서 이내 36년의 어둠을 지나 1894년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현대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산지의 서사시 <독립 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다>의 중요한 모멘텀이 시작되는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그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조국(祖國)을 조국이라 주장하지 못하고
우리 말과 우리 이름을 빼앗긴 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살아온 36년간의 고통을
그분이 보셨네, 그분이 들으셨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보우하신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셨네
꿈결 같이 찾아온 해방의 복된 소식
산천이 춤을 추고 돌들이 노래했네
우리 혀가 풀리고
우리 입이 우리 이름 부르니
<프롤로그> 앞부분
우선 서사시의 제목부터 살핀다. <독립 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다>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은 해방이 왔지만, 해방이 아닌 혼란을 암시하는 시어이고 이로 인해 ‘아프다’라는 말이 합리로 전개될 암시가 된다. 그러나 ‘시리도록“에서는 잠시 주저의 생각이 다가선다. 부사 ‘시리다’라는 말은 영어로는 cold이지만 우리말은 ‘차가운 것이 닿아서 춥고 얼얼하다’ 또는 ‘괴롭고 힘들다’는 의미를 공유한다. 결국, 해방은 아프다라는 말이지만 ‘독립 없는’ 사연 때문에 반가운 해방은 아픔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독립이 없는 해방은 외세에 갈가리 찢기면서 어렵게 세운 나라의 형편을 자조적(自嘲的)으로 표현한 논리인 셈이다. 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는가는 결국 귀납적인 반성문인 우리 자신의 힘이 없었다는 것과 외세의 틈새에서 희생양으로 살아야 할 숙명적인 아픔을 희화적(戱畵的)으로 표현한 셈이다. 고산지의 서사시의 내용은 자생적으로 쟁취하지 못한 혼란과 비극이 바로 우리 민족의 것으로 돌아오는 부메랑의 노래가 처절한 점이다. 그 사건들의 기록이 매우 디테일한 전개와 치밀성에 그의 또 다른 문학적인 성과를 눈 여기게 된다
‘프롤로그’는 다소 의외의 전개로 보이는 부분이 ‘그분이 보셨네 그분이 들으셨네’에서 직핍(直逼)보다는 우회(迂迴)로의 길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귀의로 모든 것을 귀착시킬 때, 결과는 ‘하느님이 보우하사’로 만사가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문학인가라는 의문이 다가든다. 내용을 읽으면 우리 자신의 부족으로 인해 좌.우라는 극심한 이데올로기의 난장판을 연출한 것은 결국 누구의 탓인가 말이다. 왜, 나라를 빼앗겼고 어찌하여 나라의 운명을 어질병으로 만들 때까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우하셨는가? 나는 여기서 나라의 운명을 신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국민의 컨센셔스를 모을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의 부재와 국민의 의식에 비판 정신이 없는 부족을 탓할 때, 바른 해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국민은 현명한 지도자를 만든다는 명제에의 가난-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지도자는 많은 예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5. 해방 전야의 혼란과 질서 구축
구한말(舊韓末)은 외세 앞에 자존의 문패를 걸 수 없는 주인 없는 집이었고, 힘없이 떠도는 표랑(漂浪)의 신세는 동가숙서가숙의 신세와 같았으니, 일그러진 조선왕조의 무기력은 급기야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주자학 사상이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자 기껏 나타나는 우물 안 위정척사사상의 고함치는 이데올로기로 쪼그라든다. 정치적인 리얼리즘이 부국강병과 군사력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이미 기울어진 배를 곧추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침략을 받고도 지도층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기에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일은 이미 예견된 사실이었다. 여기서 서양세력의 도전에 위정척사론의 시발은 천주교 박해와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의 소각사건 등에 이어 프랑스 함대의 침공으로 이어질 때, 쇄국(鎖國) 정책의 한계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고 1910년 주권의 침탈에 나라를 헌납하는 비극 앞에 민족사의 수난은 길고 긴 어둠으로 들어갔고, 36년이라는 긴 기간을 지나 일시에 다가온 해방은 독립이기보다는 강대국의 잣대에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참혹함이었다. 절망의 순간을 지나면 깨달음이 있어야 하겠지만 해방 이후의 형편은 분열과 외세의 사촉(唆囑)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의 춤이 어설펐다. 고 시인의 서사시의 출발은 여기서 그의 생각이 시작된다.
압록강을 건너 두만강을 넘어
중국대륙을 떠돌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웠으나
우리의 힘으로는 나라 땅을
한 뼘도, 한 뼘도 수복할 수 없었네
민족과 국가의 존립, 발전을 위해 인간이 존재한다는
전체주의 이념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치즘과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와
민주주의 가치를 내세우며 싸웠던 연합국의
패전국(敗戰國)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는
자본주의(資本主義)와 사회주의(社會主義)의 체제 대립으로 이어젔네
국가간의 협상 기준은 정의(正義)가 아니였네
자국(自國) 이익이 협상의 기준이였네
<해방전야>에서
국가 간의 관계는 정의의 시대가 아니라 흥정과 이즘(ism)의 인력(引力)에 끌려 중심을 일탈(逸脫)한 시대의 표정이다.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참담한 고난의 시절을 지나왔지만 힘없다는 탄식이 결론이었고 해방은 결국 다가오는 걸음이었지만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에 무기력의 절망은 점점 우리끼리 혼란을 드러내는 길이 환히 열리고 있었음을 해방전야는 기록된다.
“남한의 정치세력은 민주주의적 보수세력과
공산주의적 급진세력으로 양분되어있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그룹은 서구민주주의를 원하고
이승만과 임정의 환국을 희망하고 있다.
용공적성향의 정치적 기회주의자 여운형이 이끌고 있는
급진파는 소련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보수파에 비해 조직과 선전활동면에서 앞서있다“
기록하고 있네(09.29)
<군정의 시작-2> 중
칠흑의 어둠에서 맞이한 해방은 친탁과 반탁 등의 분열 대립은 남과 북으로 치달리는 서로 다른 생각의 일들이 지리한 욕망의 갈등이었고, 야망의 계절에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특이한 것은 군정 실시에 따라 기독교의 역할이 두드러졌고 선교사들에 의해 영명학교의 설립과 동량(棟樑) 양성에 일조했음을 기억해야 했다. 여운형의 기회주의와 민족세력의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등 많은 사람의 이름이 당시를 오르내린 지도층이었으니 시인은 이런 소용돌이의 시대상을 아주 면밀하게 추적하면서 비판의 칼날을 사용하고 있다. 문학은 어느 경우에도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몫이기 때문에 모순 앞에서는 비판의 단호함이 있어야 한다면 시인 고산지의 역사 안목은 통찰에의 산물인 셈이다.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김일성은
“북한지역을 분리하여 먼저 공산화하고
공산화된 북한을 기지로 삼아 남한까지 공산화해야 한다
이 계획을 효과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에 독자적 공산당이 조직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네
<군정의 시작-3> 중
소련군 대위 김일성은 소련 꼭두각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야욕의 발톱을 갈아 북쪽을 비교적 진정시킨 이후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음모의 치밀한 진행이 질서정연했다. 반면 남한은 들끓는 세력 간의 쟁투에 혼란의 소용돌이로 영일(寧日)이 없었다. 5년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당시의 사회 상황을 유리알처럼 기록하는 고산지의 치밀한 분석력은 다음 글로도 알 수 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긴급국무회의 소집하여(12.29)
전민족이 투쟁할 일만이 남아있다고 선언했네
안재홍 국민당 당수는 신탁통치는
조선의 적화(赤化) 기도 공작이라며 총궐기를 선언했네(12.29)
인민당(이여성)은 신탁통치는 외교로 투쟁해야한다고 주장했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시위운동을 전개하자는 광복단은
“전쟁 없는 독립은 없고 피 뿌리지 않는 자유는 결단코 없는 것이다
나가자! 너 나 없이 피의 싸움 길로“ 구호 아래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나가자고 촉구했네(12.29)
요정과 빠도 일제히 문을 닫고 신탁통치를 반대했네
법무국 민,형사과와 3법원과 3검사국 등 재야법조인은
임시정부 명령에 절대복종하여
12월29일 오후 2시, 총파업을 단행했네
<신탁통치 반대>에서
소용돌이는 다른 소용돌이를 몰고 왔고 이런 와중(渦中)에 혼란의 물결은 해방의 기쁨이 다시 서글픈 풍경화로 가슴을 짓누르는 일들이 해방공간의 모습이었다. 해방 이후 남한의 정당은 분열과 이합집산의 권력 쟁탈에서 일제의 잔재를 해소하고 민주주의를 건립하려는 기대보다 욕망에 나포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간의 권력 쟁투는 극심한 혼란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우익의 분열은 심각한 양상이었다. 우여곡절의 군정이 마무리를 고하고 UN 한국 임시위원회에 의해 결정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일이 확정됨으로써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에 따른 우파 지도자간의 정치적 분열은 가속의 페달을 밟았고,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새로 제정된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완성되었다. 작금에 문재인 정부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이승만은 확고한 정신의 길을 선택하고 공산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지도력을 보여주었으니 다음 말로도 증거가 된다.
남한 전역을 돌면서 유세하는 이승만의 연설주제는 언제나 똑 같았네
“공산주의는 무서운 전염병인 콜레라와 같다.
공산주의와는 타협이나 협상이 불가능하다.
유일한 선택은 공산 독재주의에 굴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하는 것 뿐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탁통치와 공산주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길 뿐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많은 미국인들은 이승만의 캠페인에 박수를 보냈지만
모스코바 신탁통치 협정을 이행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던
미군정과 국무부는 분개했네
<미소공동위원회>중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절절한 호소와 공산주의는 전염병과 같다는 이승만의 말을 지금 돌아보면 과연 틀렸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가정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이승만이 집권한 것과 김구가 집권한 것의 대비는 가능하다. 김구는 혁명적인 성향이라면, 독립운동의 지도자는 될 수 있지만, 행정으로의 길은 더욱 험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면에 이승만은 유연한 정치가의 스타일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우리 민족의 주인공으로의 등장은 행운인지 모르는 일이다. 이는 오늘의 세계 10위권의 부강한 자유민주국가의 토대를 닦은 것을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바라본 자유 정신은 공산주의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공고한 성주(城主)였다. 이런 정신이 제1공화국의 기반이었고 이후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주인공은 이승만과 북한의 공산주의로의 야욕을 가진 김일성과의 두 이데올로기가 첨예한 양상이 평행선으로 진행된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승만의 자유와 평화의 정신은 다음의 기도문으로 나타난다. 오늘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칼 마르크스를 신봉한 공산 사상과의 대결에서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음을 역사가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국민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이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유사 이래 가장 잘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5월 31일 오전 10시 20분, 감격적인 제헌 국회가 개원했네
최연장자인 이승만을 임시 의장에 추대했네
임시의장 이승만은 개회사에 앞서
“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는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서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요 자유 민주를 신봉하는 지성인이었다. 정치적인 야먕 이전에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0년 앞선 우국의 시 <고목가>를 노래한 선지적인 시인이었고 시조를 좋아한 또는 한시(漢詩)에 조예를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의 절절한 기도는 충심이었고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의 길이 형극의 길로 이어졌으니,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찬란한 경제발전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북한의 일당독재의 공산주의에 신음하는 현상이 극명하게 증명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은 혼란이었다. 이는 4천 년 동안 왕조 국가의 신민으로 살아온 정신의 기조가 주자학이나 유교 정신에 철저한 바탕을 이해할 때라야 해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세계사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한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 외국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과 달리 우리는 너무나 변화 앞에 무기력한 정신사가 있기 때문에 야욕으로 다가온 어둠의 일제 치하 36년을 불러들였고 타의에 의해 다가온 독립은 독립이 아니라 어둠에 눈을 뜨지 못하는 혼란상의 가중을 가져왔고 이런 결과는 극심한 삶의 고통을 국민에 가중(加重)시키는 눈물겨운 치하를 지나왔다. 다음 글은 일본 강점기의 빈민사(貧民史)를 쓴 강만길의 인용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요즘으로 치면 낯선 토막민(土幕民). 화전민, 막일꾼. 그리고 소작농 등의 실태 분석을 통해 얼마나 혹독한 가난의 벌판을 지나왔는가를 열거하고 있다.
초목의 뿌리나 잎새로 연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보풀’을 먹는 사람이 23,062호에 112,362명을 비롯하여 소나무 껍질, 머름, 칡뿌리 등 30여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약 17만3천 명인 즉 총인구의 6할이다
<동아일보 1924년 10월 12일자>
장수지방 제북면 임평리에서는 세민들이 궁한 나머지 이곳 심곡산에서 나는 백토(白土)를 식용으로 하여 이 때문에 마을 사람 다수가 변비에 걸린 실례이다
<1932년 전북경찰서가 조사한 <세민(細民)의 생활 실태조사>
위의 글에는 백성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증거가 되는 일례에 불과하다. 아울러 1930년대 나라를 찾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나 상해 등지로 유랑을 선택한 독립운동가들의 눈물겨운 활동은 모두가 끓어오르는 애국의 정신적인 펼침이었으나 다가오는 해방은 눈부신 현상에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한 3년여의 혼란은 결국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다가오는 아비규환이었으니 정신사의 계획 부족은 결국 오늘까지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는 비극의 연장선이 긴 이유는 권력층에 비판 정신이 없는 것으로 정리된다. 다시 말해서 누천년 동안 순치(馴致)와 복종 사상의 유교(儒敎)나 주자학의 신봉(信奉)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기독교의 정신이 서양 문화의 지주(支柱) 역할에서 피운 과학 우월의 결과로 나타난 부국의 현상과 동양의 정적(靜的) 권력구축의 대비는 좋은 연구대상이 될 것 같다. 동양의 사상은 정적(靜的)인 불교 문화와 유교가 중심이라면 서양은 투쟁의 역사인 기독교의 과학 정신에서 동서(東西) 차이를 가른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산지의 서사시에 처음과 마지막의 기도는 중요한 상징이자 암시가 된다.
해방(解放)이 곧 독립은 아니었네
독립(獨立)되지 못한 해방공간은
냉전(冷戰)의 전초기지가 됐네
정제(精製)되지않은 자유가
서로를 아프게 했네. 서로가 아팠네
독립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팠네
4천년동안 왕권통치에 길들여젔던 사람들
36년동안 일제 신민지 치하(治下)를 거치면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외첬지만
추구하는 국체(國體)는 저 마다 달랐네
국민(國民)이 주인(主人)인 정치(政治)를
한번도 체득(體得)해보지 못했기에
소견(所見)대로 목청을 높였던 사람들
인민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전체주의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운명은 지난 3년 동안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고 있었네
나라잃은 설움에 만주 벌판을
중국 대륙과 유라시아를 떠돌며
독립을 외첬던 선구자들이 목 놓아 불렀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혼돈(混沌)속에서
독립(獨立)은 되었으나
자립(自立)은 아직 할 수 없는
국민이 주인 된 나라, 드디어 탄생했네
상한 갈대 꺽지않고
꺼저가는 등불 끄지않는
하나님의 은혜였네, 하나님의 역사였네
<에필로그> 전문
위의 기도는 시인 고산지의 나라 사랑의 열망을 대변한다. 비록 서사시의 구성상 리얼함을 필요로 하지만, 그 치밀한 전개 양상은 가히 자료의 방대함이나 각주 56개를 살피면 압도당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물론 시를 읽는 재미와는 상관이 없는 점에서 고산지의 역량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를 견지한다. 이는 옳은 일이다.
기도는 인간의 열정을 의미한다. 그 열정이 익어가는 것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으로 일으키는 놀라운 에너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고 시인의 정신에는 고갱이 정신이 투철하다. 이는 시인의 자유 정신과 신념의 줄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임무-독자는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독자 또한 공부해야만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좋은 작가는 좋은 독자에 의해 탄생된다는 말은 나변(那邊)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6. 마무리에서
나는 고산지 시인을 볼 때면 놀란다. 시 구성을 위한 이미지의 치밀함에 한번 놀라고, 유연한 정서의 묘사나 기술(記述)에서 다시 놀라고, 또다시 서사시의 방대함과 정밀한 구성에 놀란다. 이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 사고의 깊이와 성찰(省察)의 산물이다. 고산지 시인은 의정부 영락교회의 장로로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그의 진중한 삶의 모습과 아울러 정신의 기둥이 되는 기독교 사상을 눈 여길 때면 놀람이 사실로 확인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산지 시인은 향일성(向日性)의 문학-식물의 줄기가 햇볕이 강한 쪽으로 자라는 성질의 사고에서 정의와 신념의 자유인-을 추구하는 한국문단의 귀중한 자산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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