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연자시편 - < 목우도(牧牛圖) > - 한국문학신문 3월 16일(제537)

高 山 芝 2022. 3. 28. 12:00

< 목우도(牧牛圖) >

 

()를 치네

막대기로 치네

 

수양(修養)하는 것도

사육(飼育)하는 것도

 

치면서

때리면서

 

길들이네

조율(調律)해 가네

 

마음을 다스리네

- (졸시 ()’)

 

 

()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한 십우도(十牛圖)는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도해한 그림이다. ()는 인간의 본성(本性), 목동은 불교의 수행자(修行者)를 뜻한다. 마음 닦는 수행법을 소치는 일로 비유하는 것은, 불교 경전 아함경(阿含經)’지도론(智度論)’에도 나오며 선가(禪家)의 여러 조사들도 소를 치는 방법을 마음의 다스림에 비유했다.

 

당나라의 선승(禪僧) 보원(普願 748-834)은 호가 남천(南泉)이고 속성은 왕씨(王氏)이다. 왕노사(王老師)로 불리는 보원(普願)10세에 출가하고, 30세에 숭산(嵩山) 회선사(會善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안휘성(安徽省) 지양(池陽) 남전산(南泉山)30여 년 동안 머물며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보원(普願)의 공안(公案 화두)인 목우(牧牛)는 선사(禪師)들의 수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남천(南泉)은 선()의 이치를 형상화 하였다. 물소를 기르는 행위를 심성(心性)을 함양(涵養)시키는 일로 비유하였다. 시내의 동쪽과 서쪽은 이쪽과 저쪽과 같다. 이쪽은 색계(色界)를 대표하고, 저 쪽은 공계(空界)를 대표한다. ()에 집착하고 공()에 집착하여 도()를 깨닫기를 구한다면 공부는 고향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분별심(分別心)을 일으켜서 색계(色界)는 환상이고 공계(空界)는 진실이며, 이쪽은 범()이고 저쪽은 성()이라 생각하면 이 또한 오류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 왕의 수초를 먹은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분수에 따라 조금만 받아들이는 것만 못하다. 즉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지 않으면 평상심(平常心)이 도()에 합치된다.

 

남천(南泉) 스님과 백장(百丈) 스님은 마조(馬祖) 선사 문하의 뛰어난 제자다. 백장(百丈) 스님은 남천(南泉) 스님과 마찬가지로 마조(馬祖) 선사의 법제자인 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이다. 백장(百丈) 스님은 백장산(百丈山)의 제1대 방장(주지)이다.

 

당나라의 대승 나안(懶安=福州大潙大安; 793-883) 스님은 복주(지금 복건에 속함)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속성은 진이며 호가 나안이다. 원화 12(817) 건주 포성(지금 복건에 속함) 건원사(乾元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스님이 된 후에 나안(懶安)은 백장(百丈) 스님에게 나아가 절을 하고 물었다. “학인(學人)이 부처를 알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백장(百丈) 스님이 말하길 그것은 소를 타고 소를 찾음과 매우 흡사하다.” 나안(懶安)이 묻기를 알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백장(百丈) 스님이 말하기를 마치 사람이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다나안(懶安)이 묻기를 시작과 끝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임(保任)해야 합니까.” 백장(百丈) 스님이 말하길 이는 소를 치는 사람이 지팡이를 작대기를 들고서 남의 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과 같다나안(懶安)이 깨달음을 얻고 밖으로 나간 후에 더 이상 구하지 않았다.

 

백장百丈 스님이 나안(懶安)의 문제에 답한 것은 남천(南泉) 스님의 뜻을 밝힌 것이지만 그 내용은 약간 다르다. 사람마다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를 향해 구하지 않고 바깥으로 치달리는 것은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스스로 마음을 깨달은 후에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도()와 더불어서 함께 돌아간다. 그러므로 부처를 안후에는 사람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수행인이 도를 깨달은 후에 깨달음의 경지를 잃지 않으려면 아주 오랜 수행 기간을 가지고 깨달음을 통해 얻은 것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를 <보임>이라고 한다. 백장(百丈) 스님이 나안(懶安)에게 일러준 것은 소를 치는 사람이 채찍을 들고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심의 부림을 받아서 색계(色界)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안(懶安)은 백장(百丈)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행하여 나중에 위산(潙山) 영우(靈祐)를 대신하여 위산(潙山)의 방장(주지)가 되어 소를 쳐서 마음으로 얻은 것을 밝혔다.

 

나안(懶安) 스님는 위산(潙山)에서 30년 동안 편히 있으면서 위산(潙山)의 밥을 먹고 위산(潙山)의 똥을 누었지만, 위산(潙山)의 선()은 배우지 않았다. 단지 소를 한 마리 돌봤는데, 만약 길을 벗어나 풀밭으로 들어가면 곧 끌어내고, 남의 논에 침범하면 채찍질을 하였다. 길들이기를 오래 하였는데 가련하게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으나 오늘 날에는 공터에 있는 흰 소로 변하여 항상 면전에 있으니 종일 멀리 데리고 다니면 쫓아도 멀리 가지 않는다. 이는 나안(懶安) 스님이 30년 동안 <보임>한 후에 그의 수행경지를 으른 말이다. <공터의 흰 소>는 소가 이미 길들여졌으며 아울러 <순수한(일색)> 경지에 이르러 도()와 하나 됨을 비유한 것이다. 항상 면전에 있어 쫓아도 떠나지 않는 다는 것은 미혹하여 잃어버림이 없다는 말인데 당연히 그가 보임한 결과이다. 길을 벗어나 풀밭에 들어가면 끌어내고 남의 밭에 들어가면 곧 채찍질한다는 것은 그가 보임하는 노력을 하였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