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리 개 요 ]
수세기 동안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상거래나 학문·예술 등이 활성화된 곳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곳의 요리, 최신 유행의 복식, 미술, 문학, 지식인 사회는 특히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유명하다.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얻은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라는 별명은 파리가 교육과 지식 추구의 중심지로서 계속 중요성을 지녀왔기 때문이다. 파리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중요한 육로·수로의 교차점에 있어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BC 1세기 로마 통치하에서 시테 섬에 있던 파리의 원래 장가 파리시족의 수도 및 영토로 지정되었다.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는 AD 494년 갈리아인들로부터 파리를 탈취한 뒤 수도로 삼았다. 위그 카페(987~996 재위)와 카페 왕조하에서 우위가 확립된 파리는 프랑스가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어감에 따라 정치·문화의 중심부가 되었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였으며, 파리는 강력한 중앙정부와 동일시되면서 전국의 인재와 활력을 끌어모았다.
역사적인 파리의 3대 지역은 센 강에 의해 구분된다. 중심부에는 종교적·세속적 권위의 소재지인 시테 섬('시테'라는 말에는 고대 도시의 핵심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이 있다. 센 강의 좌안(리브코슈)은 전통적으로 지식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며, 우안(리브드루아트)에는 도시경제의 심장부가 포함되어 있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구분이 희미해지고 있다. 수세기 동안 파리는 초기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발달해왔다. 시 경계선은 일반적으로 수도원 또는 교회 주위에 세워진 주변도시들(bourgs)과 시장터를 흡수하면서 외곽으로 확장되었다.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까지는 주로 동쪽으로 발달되었다가 그후로는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파리를 구성하는 20개의 구(區)에는 각각 구장(區長), 구청사, 그리고 고유의 특색이 있다. 파리인들은 이 구들을 제1·2·3 등의 번호로 지칭하는데, 번호 매김은 파리의 심장부에서 시작되어 달팽이 껍질의 소용돌이꼴로 계속 이어져 가장 동쪽에서 끝난다. 이주, 주택문제, 사회 기본설비, 공익사업, 교외개발, 도시계획의 지역제 등과 같은 도시화의 요구에 적응한 결과 거대한 도시권이 형성되었다.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 파리북쪽의 외각도시 "샥세유"시에 있는 "아이비호텔" 앞에서 ]
* 파리의 역사 - 1 *
■ 건설 및 중세기의 발달
파리는 BC 3세기말에 센 강의 한 섬(지금의 시테 섬)에 있는 취락이었으며,
파리시 부족으로 알려진 갈리아 부족이 거주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 취락의 최초 이름은 루테티아(라틴어로 '강 중류의 거주지'라는 뜻)였다. 로마인이 들어왔을 때 파리시 부족은 자체의 금화폐주조소를 갖고 있을 만큼 부유했고 조직화되어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기(BC 52)에서 섬 주민들이 로마인에게 항복하기보다 도시를 불태워버렸다고 적었다. 1세기에 루테티아는 로마의 도시로 발달하여 센 강의 좌안까지 확장되었다. 이 지역에 있는 곧은 거리들과 광장·목욕탕·원형투기장 등 공공건물들은 전형적인 로마 유형이다. 2세기말에 이민족이 연달아 침략하기 시작했다. 강 좌안의 도시는 3세기 중엽에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섬으로 도피하여 섬 주위에 두터운 성벽을 쌓았다. 4세기초부터 이곳은 파리로 알려졌으며, 이무렵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10세기의 성사(聖事) 기록에는 성 드니(라틴어로는 디오니시우스)가 약 250년경에 파리 최초의 주교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5세기말에 클로비스가 이끄는 프랑크계 살리 지족(支族)이 갈리아족으로부터 파리를 빼앗아 메로빙거 왕조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584년에 힐페리히의 재위가 끝난 뒤 수도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 때는 파리의 백작들이 도시를 돌보는 편이었지만, 백작들은 주교들보다 행정에 대한 권한이 적었다. 파리의 백작인 위그 카페가 987년 왕으로 선출된 후,
카페 왕조의 수도로서 파리는 더욱 중요해졌다. 카페 왕조하에서 점차적으로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공공질서가 회복되면서 파리의 인구와 상업활동이 증가했다. 11세기에 최초의
길드(상인조합)가 형성되었으며, 푸주한 길드와 강(江)상인 길드도 생겨났다. 1141년에 왕실은 주요항구(시청사 근처)를 강상인 길드에게 팔았고, 이 길드의 배가 새겨진 문장(紋章)이 파리의 문장으로 채택되었다.
필리프 2세의 재위(1179~1223) 동안 파리는 크게 개선되었다. 1220년 왕실은 귀중한 권한의 하나였던 수입상품에 대한 세금징수권을 주민들에게 양도했다. 1200년에 왕이 파리대학교를 공식적으로 인가한 것은 파리가 강 우안의 상인구역, 중심부인 시테 섬, 강 좌안의 대학·학문 구역 등 3개 구역으로 자연스럽게 구분됨을 인정한 것이다. 소르본대학(1257경 설립)을 포함하여 많은 칼리지도 설립되었다.
14세기에 파리는 흑사병(1348~49)과 100년전쟁(1337~1453), 그로 인한 내부적 혼란 때문에 발달이 지체되었다. 1356년에 상인들은 파리가 북해연안저지대의 독립도시들처럼 부유하고 자유롭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지도자였던 에티엔
마르셀은 왕에게 반기를 들고 도시를 장악했다. 행정적으로 굉장한 수완을 보여주었던 그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어리석어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자크리의 반란), 침략해오는 잉글랜드인, 나바라 왕국의 야심 만만한 왕인 카를로스와 연합했다. 1358년 나바라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려던 마르셀은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1382년 세금으로 인한 폭동이
마요탱 반란이라고 불리는 봉기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큰 나무망치로 무장한 봉기자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당했고, 그후 79년 동안 도시는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왕이 도시행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533년 프랑수아 1세 때부터이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간의 뿌리 깊은 정치적 대립(1407~35)은 파리에 계속 영향을 끼쳤으며, 1413년에는 시몽 카보슈가 이끄는 푸주한과 피혁상인들이 잠시 권력을 잡았다. 1415년 잉글랜드인이 재개한 백년전쟁으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1418년 파리인들의 폭동 후 파리를 장악한 부르고뉴파가 앵글로-부르고뉴 동맹(1419)을 맺은 데 이어 1422년
베드퍼드 공작인 존 플랜태저넷이 잉글랜드 왕 헨리 6세를 대리하는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1429년에 잔 다르크는 파리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1436년에 파리를 손에 넣은 정통주의자(부르봉 왕가를 옹호한 사람)들은 1437년
샤를 7세를 기꺼이 맞이했다. 계속된 혼란 때문에 인구가 감소했으나 1444년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휴전으로 샤를은 번영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루이 11세의 재위기(1461~83)인 1469년에 소르본대학은 파리에서는 최초로 인쇄기를 설치했다. 그밖에 약간의 건축활동이 이어진 것을 제외하고 지적 침체기였다.

[ 파리관광을 조언하는 가이드는 나무를 보지말고 숲을 보라고 권했다. 도로에는 담배꽁초등 쓰레기가
있어서 지저분 하지만 전통을 고수하는 숲의 아름다움은 파리관광의 묘미인 것 같다 ]
* 파리의 역사 - 2 *
■ 르네상스로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도시건축에 미친 영향은 특히 루이 12세(1498~1515 재위) 때에 세운 회계소 건물에 잘 나타난다.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 때 이 영향은 더욱 강해져서 새로운 시청사에서 주목할 만한 모습을 드러냈다. 투렌에 거주하는 것을 더 선호했던 샤를 7세 이후의 프랑스 왕들과는 달리 프랑수아 1세는 왕실 소재지를 파리로 되돌려놓았다. 파리의 르네상스는 1549년 엄숙하게 수도로 입성했던
앙리 2세 때 절정에 달했다. 귀족과 중산계급은 저택을 건축하면서 파리를 중세기 도시에서 근대적인 도시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548년 프랑세즈가의 오텔 드 부르고뉴에서 공연된 세속적인 연극이 파리 최초의 극장공연이 되었다. 16세기 중엽에 로마 가톨릭교도들과 위그노(프랑스 신교도)들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파리에서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1572), 가톨릭 동맹이 앙리 3세에 저항하여 일어난 바리카드의 날(1588), 프로테스탄트교도인 앙리 드 나바라(1589년에 앙리 4세로 즉위)에 대한 주민들의 오랜 저항 등이 일어났다. 1590년 파리 포위 공격에 실패한 앙리 4세는 가톨릭교로 개종한 뒤 1594년에 파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루이 13세(1610~43 재위) 때 파리는 서쪽과 북쪽으로 더욱 확장되었고, 시테 섬 동쪽에 있는 2개의 작은 무인도가 통합되어 생루이 섬을 이루었다. 프롱드의 난(1648~53)은 루이 14세 시대의 유년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1661년에 추기경 마자랭이 죽은 후 직접통치를 시작한
루이 14세는 자신과 궁정의 소재지를 파리 외부인 베르사유에 두었다. 그러나 파리는 군주의 영광을 재현하는 도시가 되었고, 장 바티스티 콜베르는 도시를 새롭고 훌륭하게 설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기술적 개량과 함께 확장 또는 미화 작업이 18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자크 콩스탕탱 페리에와 그의 아버지 오귀스트 샤를이 개발한 2개의 소화용 펌프를 이용해 센 강 양안에 물을 공급했다. 수입품에 대한 세금부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1780년대에 세워진 징세청부업자의 성벽이 파리의 경계를 이루었다.

* 파리의 역사 - 3 *
-현대도시의 발전-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파리에 남아 있던 영주제도의 흔적을 없애버렸고, 중앙집권화된 프랑스 수도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파리에서 발생했던 주요사건들은 바스티유 감옥습격(1789. 7. 14), 왕과 국민의회를 베르사유로부터 파리로 이전한 일(1789. 10), 옛 수도회들의 수도원에 수많은 조직을 결성한 일, 군주제 철폐를 예고한 폭동(1792. 8. 10),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인 혁명광장에서 벌어진 왕의 처형(1793. 1. 21), 공포정치의 출현(1793~94), 그리고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 7)으로부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799. 11)를 일으키기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변동들이다.
제1제정의 출발 후
나폴레옹은 1806년 에투알 광장에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신고전양식은 로마 제국시대를 연상시키기는 했으나 증권거래소·신부두·다리·시장 등과 같은 대대적인 공공사업으로 파리 시가 현대화었다. 나폴레옹 시대에 진행된 산업화는
왕정복고시대(1814~30)와
7월왕정(1830~48) 때 급속히 진전되었다. 가스 등 도입과 함께, 1828년에는 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으며, 1837년에 파리 최초의 철도가 생제르맹앙레 근처 르페크까지 개통되었다.
파리의 일부 지역은 19세기 중엽이 되기까지 실질적으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중심지로부터 다른 중심지나 철도역으로 가는 것이 곤란했고, 인구과밀과 급속한 산업화로 비참함과 불결함을 가져와 1830, 1848년의 혁명 때 파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나폴레옹 3세(1852~70 재위)는 센 강의 지사인
오스만 남작에게 이러한 문제들을 없애도록 했다. 현대적인 파리를 창조해낸 뛰어난 도시계획가 오스만은 도시에 곧게 뻗은 간선가로들, 대칭성, 뛰어난 조망을 주창했다. 그는 빈민지역에 있는 복잡한 가로들을 없애고 현대식 하수·수로 시설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시테 섬 내부를 정리하고, 옛 시장인 알레를 재건했다. 또 센 강에 4개의 새 다리를 세우고 기존의 남은 다리 3개를 재건했다. 나폴레옹 3세 때의 파리의 번영과 탁월함이 1855, 1867년 이곳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실증되었다. 제2제정의 몰락과 파리 포위 공격을 가져왔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 이어 코뮌(1871)이 형성되어 패해를 입었으나 제3공화정 때도 오스만의 사업은 계속되었고, 만국박람회가 또다시 개최되면서 에펠 탑(1889)과 같은 기념건물들이 세워졌다. 19세기 말에 벌써 지하철 메트로가 건설되고, 상업과 공업의 발달로 예전에 주거지역이었던 곳이 병합되었으며, 날로 늘어나는 인구는 파리의 옛 경계선 너머까지 퍼져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이곳은 비교적 피해를 적게 입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요지로 그 활동은 1944년 8월 파리 시의 해방 때 절정에 달했다. 전쟁 직후에는 지적 활동이 왕성하기도 했지만 빈곤문제와 사회적 긴장이 팽배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주택부족 현상이 심각했으며, 독일군 점령의 심리적 상처는 쉽사리 치유되지 못했고, 식민지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이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점차 나아졌으며, 특히 1958년 샤를 드골이 권력을 복귀한 후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시의 경제도 호전되었고 주거지가 정비되었으며, 주거·상업 지역이 건설되었다. 1968년 5월 대규모의 학생폭동이 파리를 뒤흔들어 놓았는데, 라탱 지구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파업 및 저항으로 확대되었다. 파리의 사회·경제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후일 이 폭동은 프랑스 사회의 현대화를 재촉하는 데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다른 많은 서구 도시들처럼 파리도 높은 실직률,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테러리즘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눈부신 번영과 힘찬 자신감으로 넘치는 도시의 몇 가지 결점들에 속한다.

[ 개 선 문 이란 ]
1개 이상의 아치 통로가 있는 기념비적 구조물.
중요한 사람이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다. 외따로 세우기도 하지만 흔히 길 양쪽에 걸쳐지도록 만들며 개선행진을 위한 것은 대부분 길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개선문은 고대 로마 건축에 속하지만 그 기원과 의미는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도시 성문이나 성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립적 구조물이었으며 로마군이 승리를 거둔 뒤 로마의 성스러운 도시구역(포메리움)에 들어가기에 앞서 통과해야 했던 포르타 트리움팔리스(Porta Triumphalis)와도 뚜렷이 다르다. 개선문의 기본 형태는 아치로 연결된 2개의 기둥 위에
아티카(attica)라고 하는 상부구조를 씌운 것으로, 아티카는 조각상(彫刻像)을 놓는 대좌(臺座)로 구실했고 기념적인 문구가 새겨지기도 했다. 초기 개선문의 아티카에는 개선마차를 탄 승리자상이 많으나 나중에 만든 것은 황제상들뿐이다. 따라서 개선문은 아주 중요하고 명예로운 일을 기념하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개선문에 관해 언급했던 고대 작가인 대(大)플리니우스(AD 23~79)도 그렇게 해석한 바 있다. 공화정 이후에 지은 개선문은 거의 없으며, 조각상이 있는 3개의 개선문이 로마에 있었으나 그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의 개선문은 제정시대(BC 27~AD 476)에 세워진 것이다. 4세기초 로마에는 이런 기념물이 36개가 있었으며 이 제정 양식 구조물은 때로 높은 중앙 아치가 양쪽 아치를 거느리는 세 아치꼴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런 개선문은 정면이 대리석 기둥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아티카에는 장식된 코니스(처마돌림띠)가 붙어 있었으며 아치통로와 옆면에는 황제의 승리와 업적을 묘사하는 그림을 새겼다. 오늘날 로마에는 3개의 개선문이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승리를 묘사한 부조가 새겨진
티투스 개선문(81)과 파르티아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203~205)이 있으며 도미티아누스와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썼던 여러 재료를 뒤섞어 장식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개선문(312)이 있다. 그 밖에 수사·아오스타·리미니·폴라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개선문과 안코나·베네벤토에 있는 트라야누스 개선문, 트리폴리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선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랩티스 마그나에 있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지어진 개선문 가운데는 나폴리에 있는 알폰소 1세 개선문(1453~70), 파리에 있는 17세기의 생드니 문과 생마르텡 문, 그리고 장 샬그랭이 지은 '개선문'(1836)이 유명하다. 런던에 있는 존 내시의 마블아치(1828 설계)와 하이드파크코너아치(1828 설계), 뉴욕 시에 있는 스탠퍼드 화이트의 워싱턴아치(1895 완성)도 유명하다. - 브리테니카 사전 중에서 -

[파리의 개선문 ]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끝 12개의 방사상 대로의 중심부인 샤를 드 골 광장(1753~1970년에는 에투알 광장이라 했음)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전승기념 구조물.
1806년
나폴레옹의 명으로 장
샬그랭과 장 아르망 레몽이 설계했고, 나폴레옹이 죽은 후인 1836년에야 완성되었다. 이 개선문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는데, 그 높이와 너비는 2배 크기이다. 프랑수아 뤼드가 전면에 조각으로 장식해놓은 '1792년 용사들의 출정'(일명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이 유명하다.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각 전투에 참가했던 600여 명의 장군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안의 자그마한 미술실에는 개선문의 역사를 말해주는 그림·사진·모형 들이 진열되어 있다. 전망대로 올라가면 앞으로는 콩코르드 광장·루브르 궁이 보이고, 뒤로는 라 데팡스가 보인다. 개선문의 바닥에는 무명용사묘가 설치되어 '영원한 불길'이 언제나 타오르고 있다. -브리테니카 사전 -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의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문으로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이 1806년 승리를 기념하여 건축가 샤를 글랑에게 건축을 명령, 30년 만인
1836년에 완성되었다. 높이 49.54m에 폭 44.82m로 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4면에 설치된 부조는 주로 수많은 전쟁을 모티브로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샹젤리제
거리와 마주해 오른쪽에 새겨진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의용군의 출정을 나타낸
부조로, 뤼드(Rude)의 작품이다. 건설을 명한 나폴레옹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장례행렬이 이 문을 지나갔고,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유체도 이 문 밑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개선문 위에 올라가면 파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신도심 라 데팡스(La Defense)까지
볼 수 있다.]

[ 개선문 앞에서 집사람과 함께 ]



[ 개선문이 잘보일 줄 알았는데 가로등이 걸림돌이네 ]



[ 개선문 좌우 벽면에 전쟁에 참가한 장군들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