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수필 -서부유럽여행기-

[ 이탈리아 * 밀라노 - 1 ]

高 山 芝 2009. 11. 6. 19:09

 

 

[ 밀라노(이탈리아어: Milano, 밀라노 방언: Milán)는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도시로,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도시로,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 강이 이 도시를 흐르고 있다. 인구는 2001년 현재 118만 2693명이며, 도시권 내에 337만 명이 거주한다. 시내 인구는 수도 로마 다음으로 많으며, 도시권 인구는 로마를 훨씬 초과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행정적 수도라면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경제적 수도라 할 정도로 이탈리아 최대의 경제 중심지이다. 이탈리아 최대의 주식시장, 주요 은행의 본점, 여러 대기업의 본사가 집중되어 있으며, 시 외곽에는 수많은 공장이 분포하여, 유럽 유수의 상공업지대에 속한다.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매우 유서깊은 도시로 많은 문화재와 문화시설이 있어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밀라노 대성당, 라스칼라 극장이 특히 유명하며,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또한 패션디자인의 중심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

 

 

 [ 밀라노의 역사 - 1 ]

■ 초기단계
BC 600년경 갈리아족이 처음으로 정착했고 뒤이어 수세기 동안 인수브레스족으로 알려진 켈트족의 수도였다. BC 222년 당시에는 메디올라눔이란 지명으로 이미 남부 알프스의 로마인 지배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도시의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권력과 경제력이 신장되어 로마에 이어 서로마 제국의 제2도시가 되었다.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제국이 이분되면서 밀라노를 황궁소재지와 행정중심지로 삼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곳을 '이탈리아의 대리자'로 선언했다. 452년 훈족 아틸라의 침략이 있었고, 539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당했다. 카롤링거 왕조 때(774년 샤를마뉴 지배하로 통합) 밀라노는 활기를 되찾았으며, 특히 안스페르토 다 비아소노 대주교의 노력으로 9세기말에 도시의 붕괴된 성벽이 재건되었다. 아리베르토 다 안티미아노(1018~45) 치하에서 대주교의 정치적 세력은 절정에 달했다. 1,000년에 걸친 대주교의 지배는 위대한 밀라노의 근원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대주교의 권위가 실추되고 주민의 생활이 나아짐에 따라 정치구조는 자치도시(코뮌)로 바뀌게 되었다. 롬바르디아 도시들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밀라노는 그 주변의 파비아·크레모나·코모·로디 같은 덜 번영한 곳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1111년 밀라노의 로디 침공과 1118~27년에 걸친 코모의 파괴가 있은 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사태개입에 나서 밀라노를 신성 로마 제국의 직접 통치하에 둘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새로 수립된 롬바르디아 동맹의 후원으로 1167년 밀라노는 재건되어,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게르만 세력을 격퇴한 후 100년 이상 찬란한 경제적 전성기를 구가했다.
12세기초 특히 모직물·병기 제조업자 길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계층이 꾸준히 영향력을 증대시켜온 반면, 교회의 재정적 특권은 약화되었다. 스와비아의 프리드리히 2세와 관계가 악화된 후 밀라노인들은 덜 봉건적인 도시 지배 세력의 하나인 파가노 델라 토레를 그들의 보호자로 공표했다. 그러나 도시는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황제에게 패했다(1237). 토리아니 가문과 또다른 세력인 비스콘티 가문과의 투쟁의 그늘에서 공국시대가 열렸다. 새로 인기를 얻은 토리아니 가문은 구엘프라는 이름을 얻었고, 귀족 정치로 이어진 비스콘티 가문은 기벨린을 이끌었다(→ 구엘프와 기벨리). 1277년 밀라노의 대주교 오토네 비스콘티는 데시오 전투에서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1311년 그뒤를 계승한 사촌 마테오가 최고 영주로서 콤무네의 정치 형태를 대신하여 밀라노와 주변의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산업과 상업은 더 많은 세력을 가진 경제동맹체를 탄생시키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1450년 밀라노는 야망에 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66)에게 다시금 점령당했고 그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와 견직물 산업의 도입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는데, 이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시대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전쟁). 그러나 1499년 밀라노 공국은 비스콘티 가문의 먼 후손이기도 한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손에 넘어갔다. 1500년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침공했으나 패했고, 1513년 스위스의 도움을 받은 그의 아들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가 이곳을 정복했다. 루이 12세의 후계자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마리냐노(지금의 멜레냐노) 승리로 밀라노를 재정복했다. 1529년 평화조약의 조건에 따라 밀라노는 다시금 스포르차 가문으로 넘어갔다

 [ 밀라노의 역사 - 2 ]

■ 근대도시의 전개
1535년 재직중인 공작의 급서로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카를 5세가 밀라노 공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1706년까지 지속된 스페인의 통치하에서 긴 경제적 침체기와 정치적 쇠퇴기가 있었다. 1630년 엄청난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었는데, 유명한 역사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1785~1873)는 그의 소설 〈약혼자 I promessi sposi〉에서 이 재앙을 생생히 묘사했다. 1706년 9월 오스트리아의 첫번째 통치자로 사보이공 외젠이 입성함으로써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세기 전반은 무시와 압박으로 특징지워지나, 엑스라샤펠 조약(1748) 후 신임 통치자는 밀라노의 부유한 상업계층과 연합하여 계몽과 성장의 반세기를 보냈다. 이 시기는 특히 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 있었으며, 뛰어난 범죄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체사레 베카리아와 문장가이면서 행정가인 피에트로 베리 같은 인물이 활동했다. 이들과 푸니 협회 회원들은 오스트리아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 이론가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 군대가 1796년 5월 15일 밀라노에 입성할 때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797년 키살피나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1805년 밀라노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이 도시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 제국이 붕괴되고, 다음해 빈 회의 이후로 오스트리아가 롬바르도-베네토 왕국을 거의 50년간 재집권했다.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새로운 흐름, 리소르지멘토로 알려진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항한 시민 봉기가 1848년 3월에 5일간(18~22) 일어났다. 이 세력은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때까지 남아 마침내 밀라노를 독립시켰다. 마젠타 전투(1859. 6. 4) 며칠 후 밀라노인들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와 나폴레옹 3세의 연합군이 개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19년 3월 23일 호전적인 우익 그룹의 형성과 함께 파시즘이 탄생했다.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중 연합군의 집중 포격으로 심한 손실을 입었으나 열성적인 노력으로 복구되었다

 [ 두오모 대성당 - 1 ]

대성당을 중심으로 방사하는 도로와 둘러싸는 도로들을 지닌 밀라노의 도시 배치는 이 대성당이 바실리카포룸에 인접해 있던 로마 시대 도시인 메디올라눔(Mediolanum)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성 암브로시오의 '새로운 바실리카'가 이 장소에 5세기 초에 지어졌으며, 그 옆에 인접한 바실리카는 836년에 추가되었다. 화재가 이 두 건물을 1075년에 덮쳤을 때에 이 건물들은 두오모로 재건되었다

 [ 두오모 대성당 - 2 ]

1386년 안토니오 다 살루초 대주교가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에서 보편적이었던 후기 고딕 양식인 라요낭(rayonnant)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다. 대성당 건설은 대주교의 사촌인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밀라노에서 권력을 잡을 시기에 시작되었고, 이는 비스콘티 가문의 전임자였던 바르나보 비스콘티의 폭정에 대한 귀족과 노동 계급에 대한 보상을 의미했다. 실제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대주교의 궁전과 오르디나리 궁전, "봄의 성 스테파노" 세례당 이렇게 세개의 주요 건물이 철거되었다. 이 때 구(舊)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석재를 가져와 쓰고 있었다. 훌륭한 새 건축물에 대한 열광은 곧 사람들 사이에 퍼졌고, 기민한 성격의 잔 갈레아초는 그의 사촌인 대주교와 함께 공사에 대한 기부금을 모금하였다. 건설 과정은 시모네 다 오르세니고를 수석 엔지니어로 하는 고용자 300명 가량의 두오모 건축공방(Fabbrica del Duomo)의 엄격한 통제 아래 이루어졌다. 갈레아초는 공방에 칸돌리아 대리석의 독점 사용권을 주었고, 세금을 면제하였다.

1389년 수석 엔지니어에 프랑스인 니콜라 드 보나방튀르(Nicolas de Bonaventure)가 임명되어 대성당에 강렬한 고딕 양식의 외관을 부여하였다. 10년 후에 다른 프랑스인 건축가인 장 미뇨(Jean Mignot)가 파리에서 초청되어 작업을 심사하고 개선하도록 하여, 돌을 전례 없는 높이에까지 들어 올리는 데에 새로운 기술들이 필요했던 석공들을 도울 수 있었다. 미뇨는 그 전까지의 모든 작업을 무너질 위험에 있고(pericolo di ruina), 비과학적인(sine scienzia) 것으로 선언했다. 이후 몇년간 미뇨의 예측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어찌됐든 이는 갈레아초의 엔지니어들이 건설 기계와 기술을 개선할 수 있도록 자극하였다.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어 잔 갈레아초가 1402년 사망할 무렵에는 대성당의 거의 절반이 완공되어 있었다

 [ 두오모 대성당 - 3 ]

카를로 보로메오밀라노 대교구장에 착좌한 이후 모든 기념 유물들을 대성당에서 치워 버렸다. 이들 유물 중에는 비스콘티 가문조반니바르나보필리포 마리아, 스포르차 가문프란체스코와 그의 부인 비앙카(Bianca), 갈레아초 마리아루도비코 등의 무덤이 있는데, 이들 무덤이 어디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보로메오가 행한 최대의 파격은 1571년 펠레그리노 티발디를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한 것이었다. 펠레그리노를 임명한 것은 논쟁거리였는데, 그가 밀라노 대성당 소속의 수사가 아니라서 공방의 규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보로메오와 펠레그리노는 대성당에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외관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대성당에 로마-이탈리아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당시의 외국의 것처럼 보이는 고딕 양식 외관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아직 대부분 미완성이었으나, 펠레그리노는 기둥들과 오벨리스크들과 거대한 팀파눔이 있는 "로마" 양식의 외관을 설계하였다. 펠레그리노의 설계안이 모습을 나타내었을 때는, 정면 부분의 설계 경기가 열려 12개 정도의 설계안이 제출되었다.[1]

이 설계안은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실내 장식 작업은 계속되었다. 1575년에서 1585년 사이 사제관이 새로운 개축되었고, 신랑(身廊) 안에 새 제대와 세례당이 덧붙여졌다.

주 제대를 향해 있는 목재로 된 성가대석은 1614년에 프란체스코 브람빌라가 지었다.

결국 보로메오는 1577년, 전체 건축물을 구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과 (많은 논쟁 끝에 1549년에 통합된)산타 테클라 성당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 두오모 대성당 - 4 ]

17세기 초에 페데리코 보로메오프란체스코 마리아 리치니파비오 만고네에게 대성당의 새로운 외관의 기초를 놓도록 하였다. 다섯개의 입구와 두개의 중앙 창문의 건설을 포함한 이 작업은 163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649년에 새로 온 수석 건축가인 카를로 부치가 혁명적 시도를 도입하였는데, 외관을 처음의 고딕 양식으로 되돌려서, 이미 완성된 세부장식들은 거대한 고딕 벽기둥과 두개의 거대한 종탑 내부에 집어 넣는 것이었다. 필리포 유바라(1733)과 루이지 반비텔리(1745) 등이 제시한 다른 설계안들은 모두 실현되지 못하였다. 1682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의 정면 부분이 철거되었고 대성당의 지붕 덮개가 완성되었다.

1762년 대성당의 주요 부분 중 하나인 108.5m의 마돈니나(Madonnina)의 첨탑이 세워졌다. 이 첨탑은 프란체스코 크로체가 설계한 것으로 첨탑의 꼭대기에는 꼭대기에는 주세페 페레고가 대성당의 원래 구조에 맞게 설계한 여러 색으로 칠해진 마돈니나 조각상이 놓여졌다.[2] 밀라노의 유명한 습기차고 흐린 기후로 인해, 밀라노인들은 자주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마돈니나가 먼 거리에서도 보이면 날씨가 좋은 날이라고 여겼다

 [ 두오모 대성당 - 5 ]

1805년 5월 20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왕에 즉위할 무렵, 건물의 외관을 완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의욕적이었던 그는 프랑스의 회계 담당자가 건축 공방에 부동산을 지불하여 모든 비용을 부담할 것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지불이 없더라도, 단 7년 만에 대성당의 외관이 완성된다는 것을 이는 의미하였다. 새로 온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소아베는 이전의 부치의 계획안을 따라 신고딕 양식의 세부 장식을 위쪽 창들에 덧붙였다. 감사의 형상을 한 나폴레옹의 조각상이 한 첨탑의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대성당에서 이탈리아 국왕에 즉위하였다.

이후 몇년간 세워지지 않은 아치들과 첨탑들이 건설되었다. 남쪽 벽에 있는 조각상 또한 완성되었으며, 1829년에서 1858년 사이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새 것으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미적으로는 덜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성당의 마지막 세부 장식은 20세기에 완성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완성된 출입구는 1965년 1월 6일에 열린 것이다. 이 출입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된 대성당 공사의 가장 마지막 작업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아직도 조각이 되지 않은 돌 덩어리들이 여러 개 남아있다. 대성당의 주 정면은 2003년에서 2009년 초까지 리노베이션 공사가 진행되었다. 2009년 2월에 공사가 끝나 칸돌리아(Candoglia) 대리석의 색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가극장 라 스칼라는 불타버린 극장 자리에 1776년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제(당시 밀라노는 오스트리아가 통치했음)가 지었다. 1872년 라 스칼라 극장은 밀라노 시가 소유하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문을 닫았다. 1920년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회의를 소집해서 극장문을 다시 여는 데 필요한 기금을 모았고, 이 극장을 일종의 자치법인으로 조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폭격당했지만 1946년 다시 문을 열었는데, 경비의 일부는 토스카니니가 개최한 자선 연주회들에서 모집된 기금이었다. 4~5개의 다른 세계적인 오페라 하우스들에 비해 훨씬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으며, 대중적으로 알려진 몇몇 오페라 곡들만이 아니라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많은 곡들도 공연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출연진의 선정과 연습은 감독에게 재량권이 주어진다.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가 19세기에 이 극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토스카니니는 예술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이 극장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라 스칼라 극장의 부속기관으로 라 피콜라 스칼라라 불리는 소형 극장, 무용단과 무용 학교, 성악 학교 등이 있으며, 이 극장의 경비는 관람료와 지방세 및 정부 보조로 충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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