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수필 -서부유럽여행기-

[ 이탈리아 * 피렌체 - 4 ]

高 山 芝 2009. 12. 10. 17:47

 

 

 [ 단테의 생가 ]

  1265 이탈리아 피렌체~1321 이탈리아 라벤나.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서(西)유럽 문학의 거장

 - 단테의 상 아래 순례자로 분장한 사람이 모델을 해주며 돈을 받는다 -

[ 단테 - 1 ]

후에 〈신곡 La divina commedia〉으로 제목이 바뀐 기념비적인 서사시 〈희극 La commedia〉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위대한 중세문학작품은 인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寓話)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 단테 - 2 ]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박학다식함, 당대 사회문제의 예리하고 포괄적인 분석, 언어와 시상(詩想)의 창의성 등은 놀라울 정도이다.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를 시어(詩語)로 선택함으로써 단테는 문학발달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상어). 그는 조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시가(詩歌) 문화에 표현능력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가 수 백년 동안 서유럽에서 문학어로 쓰이게 되는 데 기여했다. 시 이외에도 중요한 이론적 저술들을 썼는데 그 범위는 수사론에서부터 도덕·철학 및 정치사상에까지 이른다. 고전전통에 매우 정통한 사람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보에시우스의 작품들을 인용했으나 비전문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당대 최신의 스콜라철학과 신학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박학다식함과 당대의 뜨거운 정치논쟁에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건들로 인해 중세정치철학의 주요 논문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 De monarchia〉을 썼다

[ 단테 - 3 ] 단테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대부분 그 자신의 입을 통해서이다. 1265년 피렌체에서 해가 쌍둥이 성좌를 운행하고 있을 때(5. 21~6. 20) 태어났으며 평생 고향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황제를 지지했다 하여 추방당한 피렌체(귀족)파인 기벨린 당에 대항하여 기병으로 싸운 이야기, 위대한 스승 브루네토 라티니와 재능있는 친구 구이도 카발칸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또한 처음으로 예술적인 모험을 시작한 시(詩)문화를 비롯하여 시작(詩作)을 하는 과정에서 구이도 구이니첼리의 도움을 받았음을 기술하고 그의 가문은 고조부인 카차구이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카차구이다는 〈천국편〉에 나오는 노래 중편에 등장하며 단테의 성(姓) 알리기에리는 카차구이다의 부인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그의 먼 조상들이 아르노강 둑을 따라 정착했던 로마 병사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에서 긍지를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 단테 - 4 ] 어머니는 단테가 14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이름은 벨라였지만 가족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는 라파 디 키아리시모 치아투피와 재혼하여 아들 프란체스코와 딸 가에타나를 두었다. 단테의 아버지는 1283년 이전에 죽은 듯하며 당시 성년에 들어선 단테는 고아로서 아버지 소유의 재산을 팔 수 있었다. 아버지 알리기에리는 자식들에게 피렌체와 시골에 있는 소유지를 물려주어 대단하지는 않지만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재산을 남겼다. 이 무렵 단테는 이미 1277년부터 약혼한 사이였던 젬마 도나티와 결혼했다

 - 단테의 생가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 -

[ 단테 - 5 ] 단테의 인생은 황제파인 기벨린 당과 교황파인 구엘프당 사이에 벌어진 오랜 대립의 역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구엘프와 기벨린). 13세기 중반 이후 그들의 대립관계는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 두 파는 번갈아가며 우선권을 획득했는데 그때마다 상대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했고 유형을 내렸다. 1260년에는 얼마동안 지배권을 쥐고 있던 구엘프당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패했으나(〈지옥편〉 10곡, 32곡), 1266년에는 교황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베네벤토에서 기벨린당을 물리치고 그들을 영원히 피렌체에서 쫓아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단테는 전후(戰後)의 긍지와 영토 확장주의의 분위기로 가득찬 도시에서 토스카나 전역에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열망을 품고 성장할 수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로마와 고대 도시국가의 문명과 비교했다

 [ 단테 - 6 ] 피렌체는 정치력을 신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피렌체의 지적 우월권을 확보하는 데 지도적인 인물은 망명에서 돌아온 브루네토 라티니였다. 〈지옥편〉에 묘사된 단테와 위대한 스승의 만남은 단순히 한 학생과 선생의 만남이라기보다는 한 세대 전체가 그들의 지성적 사부와 만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티니는 젊은 세대 가운데 구이도 카발칸티, 포레세 도나티, 단테를 포함한 우수한 인재들에게 새로운 민중 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지식과 작가로서의 역량을 조국 피렌체를 위해 쓰라고 격려했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단테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천국편〉(8곡, 117)에서 단테는 사람이 도시국가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사정은 인간에게 훨씬 더 나빴으리라는 생각은 어떤 논쟁의 여지도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 단테 - 7 ] 당대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라티니를 "피렌체인들을 순화시키고 그들에게 좋은 화술(話術)을 가르치고 우리 공화국을 정치 철학, 즉 정치론(la politica)에 따라 지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선도자이자 스승"이라고 불렀다. 라티니의 가장 중요한 저서 〈보전(寶典) Les Livres du Trésor〉(1262~66)은 라티니가 망명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기에 프랑스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전 인용문의 보고였으며, 그책에 담긴 교양은 바로 단테의 교양이었다. 이 저서 제2권의 첫 부분에는 일찍이 라틴어가 아닌 근대 유럽 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Ethics〉의 일부가 실려 있다. 라티니는 철학·윤리학·정치학 분야의 거의 모든 논제나 주제를 다루는 데 키케로와 세네카의 작품을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통치 문제를 다룰 때는 자주 〈구약성서〉의〈잠언〉을 인용했는데, 이는 단테도 마찬가지였다. 라티니의 저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성서,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의 글들이 초년의 단테에게 문화적 지주가 되었다. 특히 로마는 가장 고무적인 동화(同化)의 원천을 제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키케로가 숭배되기 시작했고, 키케로는 시민으로서의 지식인의 존재를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좋은 본보기가 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단테의 교양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된 라티니의 유산에서 또 하나의 로마적 요소는 영광에 대한 사랑, 즉 전력을 다해 남보다 뛰어나려는 노력을 하면서 명성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라티니는 〈지옥편〉(15곡)에서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방법을 단테에게 가르쳐주는 인물로 찬미된다. 작별을 고하며 라티니는 그의 저서 〈보전〉을 읽으라고 권하는데, 그는 자신이 그 책을 통해 계속 기억되리라 믿는다.

 [ 단테 - 7 ] 단테에게는 뛰어난 지적·미적 자신감이 있었다. 〈신생〉(3장)에서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18세가 되었을 때 이미 혼자 시작(詩作) 기술을 터득한 상태였고, 〈신생〉의 첫 시가 된 초기 소네트 1편을 당대의 가장 유명한 시인들에게 보냈다. 그가 받은 여러 답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카발칸티에게서 온 것이며, 그로 인해 두 사람의 위대한 우정관계가 시작되었다.위대한 정신들의 만남이 모두 그렇듯이 단테와 카발칸티의 관계도 복잡한 것이었다. 〈신생〉의 제3장에서 단테는, 그가 첫번째 책을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쓴 것은 카발칸티의 권유에 따른 일이었다고 말한다. 뒤에 이탈리아어로 쓴 〈향연 Convivio〉과 라틴어로 쓴 〈속어론(俗語論) De vulgari eloquentia〉에서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현지 토속어를 변호하는 첫번째의 위대한 르네상스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은 그에게 현지 토속어로만 글을 쓰라고 설득하였던 카발칸티와의 논의에서 점차 무르익은 것이었다. 단테는 그에게 이런 지적인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신생〉을 가장 훌륭한 친구(primo amico)인 카발칸티에게 바쳤다.그러나 뒤에 단테가 피렌체의 6인 통령(統領)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을 때 카발칸티를 추방하려는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카발칸티는 망명생활 동안 말라리아에 걸려 1300년 8월에 사망했다

 [ 단테 - 8 ]〈지옥편〉(10곡)에서 단테는 그의 위대한 친구에 대한 기념문을 썼는데 이것은 라티니에 대한 추도문과 마찬가지로 비통한 찬사였다. 두 경우 모두 단테는 그들에게 입은 은혜와 그들에 대한 애정을 기록했고, 그들이 지닌 위대한 장점들을 평가했지만 각각의 경우에 마찬가지로 그들과 헤어진 사실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위해서 옛 친구와 스승들이 주었던 것과는 다른, 더 강력한 미적·지적·정신적 후원을 찾아야만 했다. 카발칸티의 평가와는 달리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정신적 안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단테가 창조한 베아트리체의 형상은 모든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허구의 여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단테의 사상이 변화하고 경력의 부침(浮沈)을 겪음에 따라 베아트리체 역시 그의 작품에서 크나큰 변화를 겪는다. 〈신생〉에서는 신성한 존재였으나 〈향연〉에 나오는 칸초네에서는 세속적 여인으로 나오며, 〈신곡〉에서 더욱 깊은 이해력을 지니고 등장하여 단테를 '속된 무리'로부터 인도 해준다.〈신생〉(1293경)은 단테가 생전에 만든 2권의 시집 가운데 첫번째 것이며, 2번째 작품은 〈향연〉이다. 둘다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작품(prosimetrum)인데, 두 작품에서 산문은 약 10년의 기간을 두고 지은 시들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신생〉은 1283년 이전부터 대략 1292~93년에 쓴 시들을 모은 것이고 그보다 더 규모가 크고 야심적인 작품 〈향연〉에는 1294년 직전부터 〈신곡〉을 쓸 때까지 쓴 가장 중요한 시들이 실려 있다

 [ 단테 - 9 ] 단테가 '작은 책'(libello)이라 부른 〈신생〉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책은 42개의 짤막한 장(章)으로 나뉘고 25편의 소네트, 1편의 '발라타', 4편의 칸초네에 관한 주석이 실려 있다. 5번째 칸초네는 베아트리체의 죽음 때문에 극적으로 중단되고 만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시 자체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산문으로 된 주석이 제공해주는데, 그 이유는 일부의 시들이 실제로는 거기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시기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단테가 9세였을 때 동갑인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일, 18세가 되었을 때 그녀가 단테에게 건넨 인사,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감추기 위해 단테가 강구한 여러 방편, 그녀가 더 이상 아는 체하지 않았을 때의 위기감, 그녀가 그를 경시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갖게 된 고뇌, 결국 그 고뇌를 초월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미덕만을 노래하기로 한 결심 등을 다루고 있다. 또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한 젊은 친구의 죽음, 베아트리체 아버지의 죽음, 단테 자신의 예언적인 꿈) 끝에 마침내 베아트리체가 죽고,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일시적으로 베아트리체를 대신하여 호감을 주는 젊은 여인 '고귀한 부인'(donna gentile)이 유혹의 손길을 뻗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베아트리체에게로 돌아가게 되며 그녀를 영원히 찬양하게 된다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단테는 시간이 좀 흐른 뒤 그녀에 대해서 "일찍이 어떤 여인에 대해서도 쓴 일이 없는" 시를 쓰리라 결심한다.

 [ 단테 - 10 ] 그러나 이처럼 자서전적인 목적으로 씌어진 듯이 보일지라도 〈신생〉은 기이할 정도로 개인과는 관계가 없다. 이 책의 배경을 살펴보면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세부적인 묘사를 피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래서 베아트리체가 실제로 누구인가를 따지는 일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주석에 사용된 언어는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고수하며, 사람의 이름이 명시된 일도 드물다. 예를 들면, 카발칸티는 단테의 '가장 좋은 친구'로 3번 언급되며, 단테의 누이는 '가장 가까운 혈연으로 연결된 여인'으로 언급된다. 단테는 감정적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를 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감정적 반응이 보이지 않게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인다. 단테가 10여 년에 걸쳐 쓴 시들을 배치해 넣은 시집은 좀더 큰 전체 구조라든가 시어(詩語)의 보편성 등을 지방 시인들의 작품수준을 능가해보겠다는, 초기부터 변함없이 견지해온 그의 야심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 단테 - 11 ] 단테의 〈신곡〉은 650여 년 동안 인기를 누려온 시이다. 놀랍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착상이 주는 소박한 힘으로 끊임없이 여러 세대에 걸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구세계의 모든 고등교육에서 주요 교과목으로 쓰였으며 계속하여 현대에 와서도 중요한 시인들에게 지침이 되었고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단테를 "그리스도교적인 최고의 상상력"이라 불렀으며 T.S. 엘리엇은 "근대세계는 셰익스피어와 단테가 나눠 가졌다.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근대에서 단테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밖에 없다고 하여 그를 발군의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사실상 근대사상과 관련을 맺으며 세계에 등장시킨 전형들을 창조하는 데 두 사람은 쌍벽을 이룬다. 단테는 셰익스피어처럼 역사적인 인물들로부터 보편적 전형을 창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신화의 보고(寶庫)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지오토의 종탑 :높이 82m의 이종탑은 도오모와 같이 세가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해 만든 탑으로 1334년 화가

지오토에 의해 설계착공되었다가 그가 죽은 뒤 1359년 타렌티에 의해 완공되었다

 산 조반니 세례당 : 두오모성당 앞에 있는 피렌체의수호성인에게 바처진 8각형의 건물

 106m의 높이 대원개(쿠폴라)는 필리포 부루넬레스키에 의해 1437년 완성되었다, 성당 왼쪽 입구에서

 463계단을 올라가면 대원개의 옥상에서 피렌체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