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시에 관한 감상문을 쓴 익진, 오진, 의진 3형제는 연자시의 저자 고만거의 증손자입니다. 연자시에 대한 감상문은 한자로 작성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9세손인 고영국의 번역한 글을 올립니다.
******************** 오호(嗚呼)라. 세상(世上)에는 전답(田畓)과 같이 막중(莫重)한 것이 없는데, 전답(田畓)은 자손에게 전수시키면서 농사지어서 위로는 제례(祭禮)를 받들고 아래로는 가족의 의식(衣食)을 해결(解決)하니 이것이 막중(莫重)하다는 것이다. 또 금석(金石)과 같이 오래 간 것이 없는데, 금석(金石)에다가 사실(事實)을 새겨두면 위로 백세(百世)를 보고 아래로 천년(千年)이 가도 없어지지 않고 오래 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답(田畓)도 영원(永遠)히 한 사람의 소유만 된 것이 아니라 순환(循環)의 이치가 있는 것이고 금석(金石)이 견고(堅固)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소멸(消滅)될 때가 있어 거기에다 새겨둔 공(功)이 오래 전(傳)해진다고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한번 취득하면 순환(循環)도 소멸(消滅)도 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변(變)함 없이 항시(恒時) 그대로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즉(卽) 지상(紙上)의 문자(文字)가 바로 그것이다.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의 성세(聖世)를 보지 못했어도 남아 있는 것은 예악(禮樂)과 헌장(憲章)이다. 모두 이것이 서책(書冊)에 씌어 있는 문자(文字)이니 서책(書冊)은 즉(卽) 때때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어서 하늘땅과 같이 끝이 없으니 어찌 전답(田畓)이나 금석(金石)에 비(比)할 수 있으랴! 회(탄식할 噫)라, 우리 집은 9대조(九代祖) 제봉(霽峰)으로부터 이하(以下) 56대(代)가 줄곧 지손(支孫)으로만 내려왔기 때문에 유적(遺跡)은 전부(全部) 종가(宗家)에 가있고 우리 조부(祖父)님 증조부(曾祖父)님으로부터 돌아가신 형(兄)님까지도 불과(不過) 45세(世) 종가(宗家)인데 증조부(曾祖父)도 고조부(高祖父)의 셋째 아들이라 본래(本來) 물려받은 것이 없고 다소(多少)간 증조부(曾祖父)님께서 모아 놓은 재산(財産)마저 조부(祖父)님 벼슬길에 다 써버리고 미처 증조부(曾祖父)님을 영화(榮華)로이 모시지도 못하였는데 병자(丙子)년(年) 액운(厄運)을 만나 2월(月) 3월(月) 보름 동안에 증조부(曾祖父)님 내외(內外)분이 문득 돌아가시니 이런 혹화(酷禍)가 세상(世上)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듯 한다. 이 때 조부님은 서울에 계시고 선고께서는 십세(十歲)의 어리신 나이에 상(喪)을 당하시어 집안에 유산만 없을 뿐 아니라 얼마간 전해온 기물(器物)까지도 난리(亂離)를 겪는 중에 유실(遺失)되어 버렸기 때문에 증조부(曾祖父)님 유적(遺蹟)은 한 가지도 추상(追想)할 길이 없으니 애통(哀痛)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형(兄)님 앞으로 계출(系出)된 장자(長子) 제해(濟海)가 오언시(五言詩)가 적혀 있는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오래된 상자(古笥 : 고사)를 뒤지다가 다행(多幸)히 이 종이를 발견(發見)하였다.’ 하기에 삼가 받들어 보니 우리 증조부(曾祖父)님 유묵(遺墨)이 분명하다. 영종(英宗) 계유(癸酉)는 즉(卽) 조부(祖父)님께서 재경(在京)하실 때다. 증조부(曾祖父)님께서 여러 날 중환(重患)을 앓고 계시다가 홀연(忽然) 조부(祖父)님을 보고 싶어 그 사연을 오언(五言) 고풍(古風) 시(詩)로 읊어가지고 서울로 기송(寄送)함에 조부(祖父)님께서 받으셔 가지고 품고 다니면서 항상 보시고 자경(自警)하시다가 을축(乙丑) 년(年)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할 때에 다시는 벼슬할 뜻이 없으므로 품에서 꺼내어 상자에 넣어 둔 것이라. 겉은 털이 일었어도 속은 새로 방금 쓴 것 같았다. 일희일비(一喜一悲)로 보고 또 보니 마치 옆에 뫼시고 뵙는 것 같고 읽고 외우고 하니 완연히 상좌(上座)에 계시면서 교훈(敎訓)하시는 것 같다. 황차(況且) 훈사(訓辭)와 필법(筆法)이 이와 같이 엄명단숙(嚴明端肅)하니 이것은 참으로 우리 집 전가(傳家)지(之) 가훈(家訓)이다. 한 장의 시지(詩紙)에 불과하다고 도로 상자에 넣어버려서는 안되겠기에 이에 제해(濟海), 제신(濟信) 두 아들과 더불어 절구(節句)로 오려서 순서(順序)대로 책을 만들고 이름하여 연자시집(戀子詩集)이라 하였다. 우리 제손(諸孫)들은 때때로 봉독(奉讀)하여 마음에 새기고 본받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임진(壬辰)년(年) 추(秋) 7월(月) 15일(日) 불초(不肖) 익진(益進)은 읍(泣)혈(血) 재배(再拜)하고 서(序)에 이어서 율시(律詩)를 엮는다.
시(詩) 계유(癸酉) 년(年)은 이제 여든 해가 지났는데 덧없는 세월은 장자(壯子)의 나비 꿈과도 같구나. 한 장의 유묵(遺墨)은 어제와 같이 생생하고 종이의 부연 털에 옛 흔적(痕迹)이 머무니. 청복(淸福)은 단표(대광주리 簞 박 瓢) 중에 낙(樂)이 있고 유훈(遺訓)은 충효(忠孝) 외(外)에 딴 것 없어라. 우리 청사(갤 晴 모래 沙)께서 여러 번 거두고 모은 일 느껴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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