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학봉(鶴峰)고인후(高因厚)에 대한 諡狀(시장)

高 山 芝 2011. 6. 14. 20:03

학봉(鶴峰)고인후(高因厚)에 대한 諡狀(시장 :재상이나 유교에 밝은 사람들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임금에게 건의할 때에, 그가 살았을 때의 일 들을 적어 올리던 글.)-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金壽恒) 근장(謹狀)  

 

증(贈)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행 권지성균관학유(行權知成均館學諭) 무공랑(武功郞) 고 공(高公) 시장(諡狀). 

 

증조(曾祖) 휘(諱) 운(雲) 문과(文科) 형조좌랑(刑措佐郞) 증(贈) 예조참판(禮曹 判) 

 

조(祖) 휘 맹영(孟英) 문과(文科)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증(贈) 의정부(議政府)좌의정(左議政). 

 

고(考) 휘 경명(敬命) 문과(文科) 장원(壯元) 공조참의(工曹 議) 지제교(知製敎)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시(諡)는 충렬(忠烈). 

 

공의 휘는 인후(因厚)요 자(字)는 선건(善建)이요 호(號)는 학봉(鶴峯)이다. 고씨의 본관은 탐라(耽羅-濟州)인데 공의 선대에 장흥(長興)으로 적을 받아 드디어 장흥사람이 되었다. 충렬공이 일찍부터 문장으로 세상을 울려 좋은 벼슬을 내리 지내다가 중간에 좌절되어 크게 쓰이지 못하고 마침내 충절로 크게 드날렸다. 

 

충렬공이 울산 김씨(蔚山金氏) 부제학(副提學) 백균(百鈞)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육형제를 낳았는데 공이 그의 둘째 아들이었다.  

 

가정(嘉靖) 신유(辛酉, 1561)년에 공을 낳았는데 총명이 무리에 뛰어나서 三세에 능히 글자를 알았으며 육(六)세에 비로소 입학하자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문리가 일개월익(日開月益)하였다. 

 

또 그 지취가 고상하고 원대하여 뭇 아이와 더불어 놀이를 하면서 선비가 서로 보고 예하는 사상견례(士相見禮)를 만들어 읍양(揖讓) 주선이 엄연히 법도에 맞으니 어른들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겼었다. 

 

장성하자 가정의  교훈을 받아 지조와 행실이 돈독하였고 장가를 들자 처가는 본시 재산이 부요하였으므로 공을 매우 후대하였는데 공은 화사한 의복, 기물들을 일체 물리쳐 버리고 검소하게 몸을 가지며 오직 서사(書史)에 몰두하여 밤낮이 없었다. 

 

기묘(己卯)년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는데 나이는 겨우 십구세였고, 기축(己丑)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공의 문학은 힌원(힌苑) 호당(湖當)에 두어야 마땅하다 하여 모두가 위천(尉薦)하려고 하는데 이 때 충렬공이 당로자에게 미움을 받고 있으므로 공마저 밀려나서 성균관(成均館) 권지학유(權智學諭)로 보직되니 세상 사람들이 애석히 여겼다. 

 

임진(壬辰)년에 왜적이 대거 침략하여 열읍이 와해(瓦解)되자 적은 마침내 스승장구하여 북으로 올라가니 누구도 감히 그 서슬을 건드리지 못했다. 이때 호남의 안신(按臣)은 사변이 났다는 말을 들고 겁을 내어 움추려 들며 근왕(勤王)할 뜻이 없었는데 충렬공은 공의 형제를 데리고 방재 광주 고장에 돌아와 있는 중이라 창의하여 국난에 참전할 것을 계획 하였다. 

 

안신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서 비로소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떠나 금강(錦江)에 당도하여 『승여(乘輿)는 서도로 납시고 서울도 포기 상태에 놓여 있다』는 말을 듣자 허둥지둥 진을 파하고 돌아오니 일도 인심이 더욱 흉흉하였다. 그래서 두 번째 징병(徵兵)할 적에는 민중이 모두 의구심을 품고 도주해 숨으니 충렬공은 박공 광옥(朴光玉)과 함께 순회하며 효유하여 본주의 흩어진 군졸을 수습해서 공과 공의 백씨 임피공(臨陂公)으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그래서 수원으로 올라가 목사(牧使) 권 율(權 栗)에게 넘겨주고 서도 행재소(行在所)로 가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더 나갈 수 없으므로 도로 담양으로 돌아오니 충렬공은 이미 의기(義旗)를 세우고 대장이 되었기로 공과 임피공은 드디어 수종하였다. 

 

장차 군사를 전주로 옮기려 하는데 한 선비가 청하기를 『나는 노모(老母)가 있으니 귀성을 허해 주소서, 다음에 계원장(繼援將)이 되었으면 좋겠읍니다』하자 공은 분개하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참형(斬刑)에 처해야 한다. 사람마다 가려고 들면 어떻게 군사를 편성한단 말이냐』하니 온 군중이 두려워 하였다. 

 

급기야 전주에 주둔하자 충렬공은 공으로 하여금 휘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鎭安) 무주(茂朱)지경에 매복하여 영남(嶺南) 왜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는데 이윽고 왜적이 무주에서 도로 영남으로 향하므로 충렬공은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상(北上)할 계획을 하고서 여산(廬山)에 진주하여 여러 도에 격문을 띄워 관서(關西)로 득달하게 하였다. 

 

호서(湖西)지경에 당도하여 또 소문을 들으니 『황간(黃澗) 영동(永同)의 적이 금산으로 넘어들어 형세가 더욱 창궐(猖獗)하여 전주도 조석으로 위급하게 되었다』하므로 충렬공은 휘하 여러 사람과 상의한 끝에 먼저 금산의 적을 쳐서 본도를 구원하기로 하고 드디어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기니 전사(戰士)로 모집에 응하는 자가 더욱 많았다. 그래서 장병을 부분하여 공으로써 전항(前行)을 삼았다. 

 

금산에 당도하여 방어사(防禦使) 곽 영(郭과 嶸) 더불어 진(陣)을 나누어 좌우익(左右翼)을 만들고서 의병이 먼저 싸움을 걸어 적병을 토성에서 압축하며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이 사상자가 많이 나서 감히 나오지 못하는데 이 때 이날 저물고 관군이 또한 즐겨 싸움에 협력하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군사를 후퇴시켜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의병은 방어군과 더불어 힘을 어우러 나아가 싸움이 아직 어울리지 않았는데 왜적이 진영을 비우고 나와서 먼저 관군(官軍)에게 범하니 방어(防禦) 제군(諸軍)이 바람에 쓸려 먼저 무너지고 충렬공만이 군중에 명을 내려 모두 활에 살을 먹여 기다리게 하여 독자적으로 대항할 계획을 하였다. 

 

그러니 중에 문득 어떤 사람이 급히 왜치며 『방어진이 무너졌다』고 하자, 의병도 역시 따라서 무너지니 충렬공이 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 공은 항상 전열(前列)에 서서 무사를 독려 하였는데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부오(部伍)를 정돈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다가 필경에 진중에서 죽었다. 바로 이 해 칠월 초 십일이었다. 

 

남중(南中)의 인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부르짖어 울며 서로 조상하지 않는 자 없었다. 

임피공이 승려(僧侶)들에게 애걸하여 공의 시체를 찾아서 염하는데 죽은지 이미 사십여 일이었으나 안색이 산 사람과 같았다. 모년 모월 모일에 창평현(昌平縣) 수곡리(壽谷里) 모향(某向)의 벌에 장사하였다. 

 

처음에 선조대왕께서 공의 부자가 전몰(戰歿)했다는 말을 듣고 심히 슬퍼하여 공에게 예조참의 증직을 내리게 하였고, 을미(乙未)년에 또 유사에게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고, 신축(辛丑)년에 또 본 고을 인사가 소청( 請)을 올림으로써 명하여 사우(祠宇)를 세워 충렬공을 제사하게 함과 동시에 공을 이 사우에 배향하게 하고 포충(褒忠)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임피공은 상중(喪中)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원수를 갚다가 계사(癸巳)년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리고 공의 누이와 종매(從妹)도 역시 왜적을 꾸짖고 칼에 엎드려 죽었으며 충렬공의 서제(庶弟) 경형(敬兄)이 또한 임피공과 함께 죽었다. 

세상에서 부자의 사의(死義)를 칭할 때는 반드시 제갈 첨(諸葛瞻)과 변성양(卞成陽)을 치는데 공 같은 이는 한 집안에서 오·육명이 선후로 목숨을 바치고 부자 형제가 모두 충효 의열로 세상이 드날렸으니 어찌 고금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니랴. 

 

공의 배(配) 이 부인(李夫人)은 감사(監司) 이 경(李경)의 따님인데 사남 일년를 두었다. 장남은 부림(傅霖)이요, 다음은 부천(傅川)인데 문과로 장령(掌令)이요, 다음은 부집(傅집)인데 생원(生員)이요, 다음은 부량(傅良)인데 진사(進士)요, 딸은 오희일(吳希一)에게 출가했다.  

 

첩에게서 일남 삼녀를 두었는데 남은 부매(傅梅)이요, 장녀는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첩이 되고 다음은 참봉(參奉) 장응붕(張응鵬)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참의(參議) 유성증(兪省曾)의 첩이 되었다. 본손 외손 본증손 외증손이 수십명이었다. 

 

공은 천자(天資)가 영특하고 지기가 강개하여 세속의 영욕(榮辱)과 이해(利害)와 득실(得失)에는 항시 담담하여 조금도 동요되는 바 없었고, 그 심정은 지극히 효하여 충렬공을 섬기되 좌우로 복근(服勤)하여 사랑과 공경이 아울러 지극하였다. 

 

충렬공이 고을 원이 되었을 적에 공이 방재 근친(覲親)와서 있는데 이 부인이 병이 났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래도 충렬공은 공을 즉시 돌려보내려 하지 아니하므로 공도 감히 굳이 청하지 못했는데 이윽고 또 급보가 있으므로 충렬공은 그제야 공을 재촉하여 가보게 하였으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부인이 임종시에 여러 어린 자녀를 부탁하니 공은 슬퍼하며 『당연히 아이들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다시 장가들지는 않겠다』고 말하였다. 복을 벗게되자 충렬공이 재취장가를 들이려고 하므로 공은 사유를 들어 말씀드리니 충렬공도 역시 강권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젊었을 적에 정시(廷試)에 들어가 그 글제를 보고 일찍이 집에서 지었던 것이라 혐의가 되어 선뜻 써서 바치려 하지 않으니 친한 친구가 옆에서 굳이 권하므로 공은 말하기를 『선비의 발신이 구차스러워서는 안된다』하였다. 그 사람은 또 그 글을 자기가 사용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다시 글을 지어 겨우 정초를 끝내자 시한이 이미 지났다. 

 

어떤 권귀(權貴)의 집 자제가 공의 그 작품이 뛰어나게 아름다움을 보고 크게 애석히 여겨 공을 위해 봐주고 싶어서 누차 말을 했으나 공은 끝내 들지 아니하고 이내 그 시권(試券)을 접어서 소매 속에 넣어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극구 칭찬하였다. 

 

공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기억력이 강해서 글을 읽으면 세 번을 넘어가지 아니해도 종신토록 잊지 아니하며 문장을 만들면 화려하고 부섬(富贍)하고 민첩하였다. 

 

임진(壬辰)년에 지은 격서와 기타 여러 작품은 충렬공의 수초(手草)가 아니면 공의 형제에게서 많이 나왔다. 임피공은 사람들에게 공의 격문중의 한 구절인 『저 왜적이 더욱 날뛴다면 노중련(魯仲連)의 도해(蹈海)를 택할 밖에 없으니 오늘은 더 더구나 전단(田單)의 반제(反濟)가 있기를 바란다』를 들며 이런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이 속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군중(軍中)에 있을 적에도 공은 한낱 서생으로서 활 쏘고 말 달리는 일은 본래 익히지 않았지만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홀로 한 쪽을 담당하되 일찍이 두려워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며 매양 하는 말이 「오늘의 사세로 보아 비록 자신이 죽고 가족까지 결딴난다해도 단연 후회하지 않겠다」 하였다. 

 

바야흐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충렬공은 자기 성명을 옷섶에다 자수로 기록하였고 공도 또 한 그렇게 하였으니 대개 이로써 다른 날 시체를 찾는데 한 증거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공은 나라 위해 죽겠다는 뜻이 이미 처음부터 결정되었음을 볼 수 있으니 어찌 저 창졸간에 몸을 희생한 자들과 비교가 되겠는가. 

 

아! 공은 그 재주 그 행실을 가지고서 이미 사적(仕籍)에 등록하고 조정에 들어갔으니 때를 타서 자기 포부를 펼수 있다면 경악(經握)이나 사원(詞苑)이나 어디고 적당할 것이며 또 그 영향이 세상에 미친 것도 반드시 한 시대 여러 명공(名公)들에게 뒤지지 않았을 터인데 공연히 시론(時論)에 액을 입어 한번도 논사(論思)나 찬술(撰述)의 자리에 쓰이지 못하고 마침내는 시대가 판탕(板蕩)함을 만나 무참히 들판의 한 시체가 되어 자신을 불행으로써 국가의 빛을 삼았으니 슬픈 일이다. 

 

인조조(仁祖朝)에 공의 아들 부천(傅川)의 종훈(從勳)으로써 영의정(領義政)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금상(今上) 정묘(丁卯)년에 호남 선비들이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여 임피공과 공의 사행(事行)을 자세히 진술하고 따라서 시호 내리기를 청하니 상감께서 특히 허락하여 일이 태상(太常)에 내려지자, 공의 현손(玄孫) 응익(應翼)이 그 부형의 청으로써 나에게 시장(諡狀)을 위촉하였다. 

 

나는 비록 공의 부자보다 늦게 낳았으나 본래부터 깊이 모앙하는 처지라 이에 감히 누졸(陋拙)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삼가 그 가첩(家牒)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찬술해서 유사(有司)에게 알리는 바이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金壽恒)은 근장(謹狀) 

 

태상(太常)이 공의 시호를 충민(忠愍), 의열(義烈), 의민(義愍)으로 입계(入啓)한 바 의열의 계(啓)가 내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