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 * 서장관(書狀官) * 고경명(高敬命) ]

高 山 芝 2011. 6. 16. 21:06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 * 서장관(書狀官) * 고경명(高敬命)

 

제봉 고경명은 1581(선조 14)년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절단은 명나라에 태조 이성계의 잘못된 종계를 시정해 주도록 요구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이때 고경명은 서장관이었다. 그의 임무는 사절단의 여러 임무를 왕에게 보고하고, 사절단의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사행 기간 그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사행 기간 동안 쓴 고경명의 시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만주를 지나 북경까지 갈 때 쓴 것들이다. 두 번째는 북경에서 사행 업무 동안 쓴 것들이다. 세 번째는 북경을 떠나 귀국할 때 쓴 것들이다. 그는 사행 기간 동안 64수의 시를 썼다. 만주를 지나가고 있을 때 쓴 시들은 이국적 정서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시가 <분수령>과 <알문묘>이다. 분수령에서는 많은 사신들이 시를 지었다. 그곳은 휴식의 공간이면서 의미가 심장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요하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경명은 <알문묘>에서 중국문화에 대한 엄청난 실망감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고 있다. 북경에 도착한 그는 외교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명나라의 비호의적인 처신과 엄격한 통제 때문에 활동에 애로가 많았다. 이때 그는 <예예부상서>와 <문성지불허강칙창음첩전운>이라는 2수의 작품을 썼다. 그는 이들 작품들을 통해 종계변무 외교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귀국길에 북경 근교에 있는 삼충사를 참배했다. 이 사원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충신인 제갈량, 악비, 문천상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고경명은 특히 문천상에 대한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문천상은 의병을 이끌고 투쟁하며 죽을 때가지 원나라에 항복을 거부한 우국 지사이다. 이 시에서 고경명은 문천상을 자신의 이상적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귀국길에 고경명은 <칠가령제석집고구>라는 시를 짓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고국에서의 미래를 위한 강한 결단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귀국을 또 다른 환로의 출발로 삼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경명에게 있어서 1581년에 있었던 명나라 변무외교 사행길은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환로에서의 진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이고 있고, 문천상과 같은 충신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삶의 좌표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조선이 명나라 사적(史籍)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줄 것을 명나라 조정에 요청한 일을 말한다. 당시 명나라 사적(史籍)에는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려 말 이성계의 정적(政敵)이던 윤이(尹彛) ․ 이초(李初)가 명나라에 도망가서 무고한 때문이었다. 조선 태조가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처음 안 것은 태조 3년(1394)이었다. 이인임은 우왕 때 이성계의 정적이었는데, 이성계를 그의 아들이라 한 것은 조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로 부각되어 태조 때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고쳐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시정 약속만 하고 실현되지 못하여 이는 역대 왕들의 가장 큰 현안문제가 되어왔다. 그럼에도 중종 13년(1518) 중국에서 돌아온 주청사(奏請使) 이계맹(李繼孟)은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에 명나라 태조의 유훈(遺訓)이라 해서 “이인임의 아들 단(旦: 태조 이성계)이 4왕(恭愍 ·禑王 ·昌王 ·恭讓)을 시해하였다”고 정정되지 않았음을 보고하였다. 남곤(南袞)이 주청사로 가서 시정을 요구하는 등 중종 때만 해도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뒤 선조 17년(1584) 종계변무주청사 황정욱(黃廷彧) 등이 가서 정정키로 확정을 보고, 1588년 유홍(兪泓)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와 일단락되었다. 선조는 유홍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친히 모화관(慕華館)까지 나아가 명나라의 칙사(勅使)를 맞았으며, 공을 세운 유홍에게는 벼슬을 올리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내렸다. 또한 선조는 종묘에 가서 종계의 개정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으며, 백관에게도 벼슬을 올려주었다.


▷ 1차 주청문(奏請文)

태종 3년11월15일, 사평좌사(司平左使) 이빈(李彬)과 여원군(驪原君) 민무휼(閔無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으니 사은(謝恩)하고 겸하여 종계(宗系)를 변명(辨明)하는 주본(奏本)을 올리기 위함 이였다. 주본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35년 정월 초 8일에 배신(陪臣) 조온(趙溫)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ꡒ조훈조장(祖訓條章) 내에 이르기를,「신(臣) 이방원(李芳遠)의 종계(宗系)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하였다하오니, 이 말을 듣고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홍무(洪武) 27년 4월 25일에 흠차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 등이 해악(海嶽) ․ 산천(山川) 등의 신령에게 고하는 축문(祝文)을 받들고 왔사온데, 축문 내에 고려(高麗) 배신(陪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사(後嗣) 이성계(李成桂)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신의 아비가 이미 일찍이 주본(奏本)을 갖추어 주문(奏聞)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조훈조장 내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게 되니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생각컨대 신의 아비의 선세(先世)는 본래 조선의 유종(遺種)으로서 신의 23대조 이한(李翰)에 이르러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신라가 망하게 됨에 이한(李翰)의 6대손 이긍휴(李兢休)가 고려(高麗)에 들어왔고, 이긍휴 13대손 이안사(李安社)가 전 원나라[前元]에 벼슬하였는데, 이것이 신의 아비 단(旦) - 예전 이름 이성계(李成桂) - 의 고조(高祖)입니다. 원나라 말년에 미치어 군사가 일어나매 할아비 이자춘(李子春)이 도로 고려로 왔사온데, 신의 아비가 조금 무재(武才)를 익혔으므로 항오(行伍)에 두었습니다. 공민왕(恭愍王)이 아들이 없어 총신(寵臣) 신돈(辛旽)의 자식 우(禑)를 데려다가 몰래 궁중에서 길러 자기 자식이라고 칭하였는데, 공민왕이 죽은 뒤에 이인임(李仁任)이 우(禑)를 세워 후사(後嗣)로 삼았습니다. 신의 아비는 공민왕 때로부터 위성(僞姓) 우(禑)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조심하고 근신하여 우의 말년에 신의 아비를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습니다. 또 시중 최영(崔瑩)이 있었는데, 배우지 못하고 광패하여 우에게 아첨하여 섬기어 딸을 바쳐 왕비로 삼게 하고,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공연히 사려(師旅)를 일으키고, 여러 장수를 발(發)하여 요동(遼東)으로 향하고자 하여 군사가 압록강에 이르렀사온데, 신의 아비도 그때에 부장(副將)이 되어 그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생각하기를 ‘상국(上國)에 죄를 얻는 것보다는 차라리 위성(僞姓)에게 죄를 얻어서 한 방면을 편안히 하겠다.’ 하고 여러 장수와 더불어 합의(合議)하고 회군(回軍)하여 왕씨(王氏)의 후손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웠는데, 인임(仁任) 등은 위성(僞姓)을 속여 세웠다고 죄를 논하여 폄축(貶逐)하고, 우(禑)와 그의 아들 창(昌) 그리고 영(瑩)은 모두 주살(誅殺)을 당하였습니다. 요(瑤) 또한 불의(不義)하여 나라 사람들이 신의 아비를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추대하였으므로 곧 갖추어 주문하였습니다. 이에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의 명령을 받아서 국왕이 되었고, 국호와 신의 아비 이성계(李成桂)를 개명〔단(旦)〕하여 주셨습니다. 또 인임(仁任)의 증조(曾祖) 이장경(李長庚)은 본국의 경산부(京山府) 아전이고, 할아비는 정당문학(正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며, 아비는 동지밀직(同知密直) 이포(李褒)이고, 인임의 아들은 전 대호군(大護軍) 이환(李環) ․고공좌랑(考功佐郞) 이민(李珉)이온데, 일찍이 고려에 벼슬하였고, 사위인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 강서(姜筮)와 상주목사(尙州牧使) 권집경(權執經)은 현재 본조(本朝)에 벼슬하고 있사오니 신의 종계(宗系)와는 전연 틀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굽어살피시어 신의 종계(宗系)를 고쳐 기록하여 주시오면 한 나라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하옵니다.ꡓ』


▷ 2차 주청문(奏請文 )

중종 13년6월16일, 영의정 정광필 ․ 좌의정 신용개 ․ 우의정 안당(安?) ․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 ․ 중추부사 김전(金詮) ․ 예조판서 남곤(南袞) ․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 형조판서 이유청(李惟淸) ․ 화천군(花川君) 심정(沈貞) ․ 우참찬 최숙생(崔淑生) ․ 예조참판 손주(孫澍) ․ 병조참판 방유령(方有寧) ․ 호조참판 이자견(李自堅) ․ 대사헌 이자(李?) ․ 이조참판 김정(金淨) ․ 이조참의 김안로(金安老) ․ 병조참지 조방언(趙邦彦) ․ 호조참의 김굉(金?) ․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趙光祖) ․ 형조참의 윤은필(尹殷弼) ․ 대사간 공서린(孔瑞麟) ․ 직제학 정충량(鄭忠樑) ․ 집의 유인숙(柳仁淑) ․ 사간 신광한(申光漢) ․ 장령 정사룡(鄭士龍), 민수천(閔壽千) ․ 부응교 민수원(閔壽元) ․ 교리 윤자임(尹自任) ․ 헌납 유용근(柳庸謹) ․ 지평 김식(金湜), 임권(任權) ․ 부교리 기준(奇遵), 장옥(張玉) ․ 정언 이희민(李希閔) ․ 정자 이인(李認) 등이 대궐 뜰에 모여서 주청문서(奏請文書)에 필삭(筆削)할 부분을 의논하였는데, 김전 ․ 남곤 ․ 심정 ․ 최숙생 ․ 이자 ․ 김안로 ․ 김정 등이 그 일을 실제로 주관하여 장황한 곳은 깎기도 하고 모자라는 곳은 보충하기도 하였다. 이에 정광필 ․ 신용개 ․ 안당이 그 교정된 글을 가지고 입계(入啓)하기를,ꡒ온당치 못한 곳을 고치고 보충할 데는 보충을 해서 대강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대목이 있을까 두려우니 남곤 ․ 이자 - 남곤은 주청정사(奏請正使)이고 이자는 부사였다. - 등으로 하여금 다시 반복해서 상세히 교정케 한 다음 신등이 또한 다시 본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ꡓ하니, ꡒ그리하라.ꡓ전교 하였다. 이 때 교정된 주청문(奏請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왕(朝鮮國王) 신(臣) 이역(李?)은 삼가 은혜 받기를 진청(陳請)하는 일을 아룁니다. 정덕(正德) 13년 4월 21일 배신(陪臣) 이계맹(李繼孟)이 북경에서 돌아와 이르기를,ꡐ《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있는 조선국(朝鮮國)이란 대목 밑에 적힌 주(註)를 보니 거기에 「이인임(李仁任)의 아들 성계(成桂), 지금 이름 단(旦)이라고 하는 사람이 홍무(洪武) 8년으로부터 25년까지 전후에 무릇 왕씨(王氏) 사왕(四王)을 시해하였으므로 아직 그냥 기다리게 하였다.」라는 문자가 있었다ꡑ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참으로 두렵고 민망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홍무 27년 4월 25일에 흠차내사(欽差內使) 황승기(黃承奇) 등이 해악(海嶽)과 산천(山川) 등의 신(神)에게 고제(告祭)하는 축문(祝文)을 가져왔는데, 거기에도ꡐ고려배신(高麗陪臣) 이인임의 후사인 성계로 지금 이름 단(旦)이라고 하는 사람……ꡑ이라는 문자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 모(某)가 곧바로ꡐ본종(本宗)의 세계(世系)는 이인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ꡑ는 사실을 여러모로 구비하여 주문(奏聞)하였습니다. 그런데 영락(永樂) 원년 정월 초 8일에 배신 조온(趙溫)이 경사에서 돌아오더니 또ꡐ조훈조장(祖訓條章) 안에「조선 국왕은 이인임의 후사이다.」라는 문자가 있다.ꡑ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는 선신(先臣) 공정왕(恭定王)이 전항(前項) 종계(宗系)에 관한 일을 재차 주달하여 바로잡아 주기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영락 2년 2월 초 10일에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지강(李至剛) 등이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가운데 이르기를ꡐ조선 국왕이 주문(奏文)하기를 이미 이인임의 후사(後嗣)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지난번의 전설(傳說)은 잘못인 듯하다. 다른 자료에 따라서 개정하라.ꡑ하였습니다. 이 말을 받들고 온 나라가 모두 기뻐하여 표(表)를 올려 진사(陳謝)하고 자손 대대로 황은(皇恩)을 받들고 있는데, 이제 《대명회전》의 내용을 듣건대 종계(宗系)에 관한 일이 개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조(先祖)에게는 있지도 않았던 악명(惡名)이 더 추가되었다 하니 일국 신민이 놀라서 모두 어쩔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신(臣)의 선세(先世)는 원래 본국의 전주(全州)에서 나왔습니다. 28대조(代祖) 한(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해서 사공(司空)이 되었고, 신라가 망한 뒤에는 한의 6대손 긍휴(兢休)가 고려(高麗)로 들어왔으며, 13대손 안사(安社)는 전원(前元)에 벼슬해서 남경(南京)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다루하치(達魯花直赤)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 직책을 세습(世襲)하다가 원나라 말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안사의 증손 자춘(子春)이 아들 성계를 데리고 그곳을 피해 동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지정(至正) 신축(辛丑)은 공민왕(恭愍王) 10년(1361)에 해당되는데, 이때 홍건적(紅巾賊) 모원수(毛元帥)․관선생(關先生) 등 20만 명이 국경 지방에 난입(亂入)하자 선신 성계가 처음 대장의 휘하에 들어가서 선봉으로 올라가 공을 세워 무반(武班)의 직책을 받았습니다만 아직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이 무렵 공민은 후사가 없으므로 몰래 총신(寵臣)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데려다가 자기의 소생이라 일컫고 이를 궁중에서 길렀습니다. 그런데 만년에 가서는 변덕스럽고 난폭하기가 이를 데 없어 근신(近臣)들을 많이 죽이므로 폐신(嬖臣) 홍윤(洪倫)과 내사 최만생(崔萬生) 등이 홍무 7년 9월 23일에 몰래 시역(弑逆)을 하였습니다.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이 윤과 만생을 저자에서 찢어 죽인 뒤 어둡고 약한 자를 세우고자 하여 우(禑)를 그대로 후사(後嗣)로 삼고 그 아들 창(昌)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 광국공신(光國功臣)

조선 선조 때 명나라 역사기록에 잘못 기록된 조선 종실계통을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운 19명에게 내린 공신 호. 1등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 하여 윤근수 유홍 황정욱 등 3명, 2등은 수충공성익모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光國功臣)이라 하여 윤섬 홍성민 이후백 윤두수 한응인 홍순언 윤형 등 7명, 3등은 수충공성광국공신(輸忠貢誠光國功臣)이라 하여 기대승 이양원 윤탁연 이산해 최황 김주 황림 정철 유성룡 등 9명이다.


□ 광국지경록 판목(匡國志慶錄 板木)

외속리면 불목리 기계유씨(杞溪兪氏) 재실(齋室)인 영모재(永募齋) 마루 천정에서 발견된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 목각본(木刻本)이다. 명나라『태조실록』과『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조선왕가의 계보를 영조 20년(1744)에 와서 바로 잡게 된 것을 축하한 시를 모아 목판에 새긴 것이다. 크기는 가로 58cm, 세로 30cm이며, 수량은 22매이다.

이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중국 사서에 잘못 기록되어 조선 전기부터 선조 17년(1584)까지 이를 고치기 위해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해왔으나 명나라에서는 계속해서 이를 거절하고 있었다. 선조 17년(1584)에 황정욱 등을 사신으로 보내『태조실록』의 기록을 바로 잡았으며, 선조 20년(1587)에 유홍이 다시 들어가 고쳐진『대명회전』가운데 조선에 관련된 한 본을 받아왔고, 선조 22년(1589)에 윤근수가 성절사로 가서 개정된『대명회전』을 가져오자 선조 23년(1590)에 공로가 큰 19인을 선정 이들을 3등급으로 구분하여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1등은 윤근수, 황정욱, 유홍 등 3인으로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다. 이때 종묘(宗廟)에 고(告)하고 축하시를 짓게 하였고, 이를 모아 숙종 27년(1701)에 선조, 숙종의 서(書)와 응시(應時)를 붙여 간행한 것을 다시 영조 20년(1744)에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여(李?)가 영조의 서와 마유명(馬維銘)의 시와 유홍의 화시(和詩)를 비롯하여 사신들의 시, 특사교문(特使敎文), 이산해(李山海)의 사은표(謝恩表), 태학유생(太學儒生)들의 헌축(獻軸) 등을 수록하여 간행하였다.

 

  광국공신(光國功臣) 홍순언(洪純彦)

조선조에서 상민이나 천민이 공신이 된 예는 흔하지 않다. 얼마 전에 TV드라마 '허준'에서 천민 출신의 허준이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 공신이 되는 것을 시청한 적이 있다. 전란 동안에 허준의 엄청난 활약상과 공적을 그린 드라마 내용으로 볼 때 시청자들에게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임란이 끝난 6년 후인 선조37년(1604)에 이항복 등 임란 수행과정에서 공이 큰 문신 86인이 공신으로 책록된 호성공신(扈聖功臣) 중에 허준은 3등에 포함되었다.(권율, 이순신, 원균 등 무관 18인에게는 宣武功臣이 별도로 책록됨)

이보다 조금 앞선 임란이 발발하기 전해인 선조24년(1591)에 책록된 광국공신은 윤근수 등 19인인데, 2등공신 맨 끝에 사신을 따라 다니는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란 사람이 들어 있는데 이는 예사 일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광국공신이란 중국의 공식 문서에 태조 이성계의 조상에 관한 종계(宗系)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는데 공이 큰 사람에게 내린 공신책록이다.

일의 발단은 태조3년(1394)에 명사(明使) 황영기(黃永奇) 등 세사람이 와서 해악산천(海岳山川)의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고제축문(告祭祝文) 내용중에 「고려의 배신(陪臣: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권세를 부리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後孫)인 성계(成桂)는 云云」하는 구절이 있어 이 명사 편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상세히 변무(辨誣)하는 글을 명나라로 보냈다.

그 후 태종 2년(1402)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온 조온(趙溫), 공부(孔俯) 등이 고하기를 명(明)의 조훈조장(祖訓條章)에 '이성계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되어있다'고 아뢰었고, 그 후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이렇게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로부터 태종-선조간 12대에 걸쳐 전후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선조22년(1599)에 종계를 바로 잡고, 2년 뒤인 선조 24년에 그동안 종계를 바로잡는데 공이 큰 19인을 골라 輸忠貢誠翼謨修紀 光國功臣(수충공성익모수기 광국공신)』(약칭: 광국공신)으로 책록한 것이다.

 

종계변무 사신 현황

시기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비고

1

태종3년(1403)

이 빈(李 彬)

민무휼(閔無恤)


종계변무주청사

2

중종12년(1517)

이계맹(李繼孟)

이사균(李思鈞)

이지방(李之芳)

책봉주청사겸

3

" 13 "(1518)

남 곤(南 袞)

이 자(李 潸)

한 충(韓 忠)

종계변무주청사

4

" 31 "(1536)

송 겸(宋 唧)



하성절사겸

5

" 34 "(1539)

권 발(權 撥)

임 권(任 權)


동지사겸

6

" 35 "(1540)

김인손(金麟孫)

임백령(林百齡)


사은사겸

7

명종 6년(1551)

한 두(韓 屝)



동지사겸

8

" 10 "(1555)

정 유(鄭 裕)



"

9

선조 6년(1573)

이후백(李後白)

윤근수(尹根壽)

윤탁연(尹卓然)

종계변무주청사

10

" 7 "(1574)

안자유(安自裕)


이언유(李彦愉)

동지사겸

11

" 10 "(1577)

윤두수(尹斗壽)


김성일(金誠一)

사은사겸

12

" 14 "(1581)

김계휘(金繼輝)


고경명(高敬命)

종계변무주청사

13

" 17 "(1584)

황정혹(黃廷或)


한응인(韓應寅)

"

14

" 20 "(1587)

유 홍(兪 泓)


윤 섬(윤 暹)

사은사겸

15

" 22 "(1589)

정 탁(鄭 琢)

권극지(權克智)


"


광국공신 책록(光國功臣冊錄)(淸選考)

宣祖朝 二十四年 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 十九人

(선조조 24년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 19인)

등급(인원)

공신명

1등(3인)

윤근수(尹根壽), 황정혹(黃廷或), 유 홍(兪 泓)

2등(7인)

홍성민(洪聖民), 이후백(李後白), 윤두수(尹斗壽), 한응인(韓應寅)

윤 섬(尹 暹), 윤 형(尹 炯), 홍순언(洪純彦)

3등(9인)

김 주(金 澍), 이양원(李陽元), 황 림(黃 琳), 윤탁연(尹卓然)

정 철(鄭 澈), 이산해(李山海), 기대승(奇大升), 유성룡(柳成龍)

최 황(崔 滉)

광국공신 2등 맨 끝에 홍순언(洪純彦)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아홉 살 때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하여 효종의 부마(駙馬)가 되고, 스무살에 홀로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숙종27년(1689)에 쓴『東平尉公私聞見錄』(동평위공사문견록)에 홍순언(洪純彦)과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301 洪純彦 譯官 外交로 功을 세우다(譯者가 붙인 題目)

 

「洪純彦(홍순언)은 역관이다. 일찍이 燕京(연경)에 갔는데 돈을 많이 가지고 갔다. 妓館(기관)에 갔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한 방을 안내하면서 "여기서 돈을 많이 써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純彦이 들어가 보니 國色(국색)인데 나이가 젊은 여자였다. 그 여자는 소복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몹시 처량하고, 당황해 하므로 그 연고를 자세히 물으니, 죄를 얻어 처형된 兵部尙書(병부상서: 병조판서)의 딸인데 부친의 시체를 고향으로 모셔가 治喪(치상)하기 위하여 몸을 팔게되었다고 하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한 번 몸을 허락하면 종신토록 수절하겠다고 하였다.

純彦이 이 말을 듣고 뜰 아래 내려가 엎드려 절하고 말하기를 "외국의 천한 역관이 어찌 감히 天朝(천조)의 宰相(재상) 집 가문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가지고 간 금덩이를 모두 다 주고 그냥 돌아왔다. 동료들이 이를 알고 조소하면서 놀려댔으나 純彦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 후 수년이 지나 純彦이 또 사절을 따라 바다를 건너 명나라에 가니 禮部(예부: 예조)에서 여러 번 純彦이가 왔느냐고 물어와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北京(북경)에 들어가 알고 보니 전날의 兵部尙書(병부상서) 딸이 禮部尙書(예부상서)의 후처가 되어있었다.

그 내력은 이러하다. 병부상서의 장례를 치르고 북경의 집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가려고 올라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예부상서 댁에 작별인사차 들렸다가 예부상서 처의 병 수발을 들면서 집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예부상서의 노력으로 병부상서의 죄가 혐의를 벗게 되었고, 전처가 죽자 그녀를 후처로 맞았던 것이다. 禮部尙書(예부상서)가 그의 처로부터 純彦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어 그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 때에 使節(사절)은 宗系(종계)를 바로잡기 위하여 갔는데 일이 禮部尙書(예부상서)가 관장하는 일이고 보니 상서가 純彦의 연고로 해서 극력히 주선해서 백년이 훨씬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宗系(종계)를 바로잡게 되어 王統(왕통)의 蔑辱(멸욕)을 벗게 되었다. 또 尙書夫人(상서부인)이 純彦을 불러 후한 선물로 많은 錦繡(금수: 비단)를 내려 純彦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한다.

宣祖大王(선조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宗廟(종묘)에 고하고, 光國功勳(광국공훈)을 책록하여 純彦을 唐陵君(당릉군)에 봉하였다.

領相(영상) 洪命夏(홍명하)가 그 때 어른에게서 듣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일개 역관이 마음 한번 곧게 쓴 것이 나라 일에 큰 보탬이 되어 자신은 2등공신이 되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까지 올랐으며 자손 대대로 양반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