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란 초기에 전라도 지역에서 왜적의 직접적 침략을 받은 지역은 무주
금산 진안 장수 등 북부의 산간 지역에 불과하고 대부분 지역의 인력과
물력이 보존되어, 전라도는 7년 전쟁의 병참 기지가 되어 군량을 조달하였고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하는 등 전란 극복의 동력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어느 사학자가 평하기를 “호남의 근왕 의병은 실패하고,
해상 의병은 성공하였으며, 영남의 향보 의병은 무패하였다”고 하였다.
1592연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침략한 왜군이 불과 18일에 행군하듯 도성에 진입하였으니 무패(無敗)라고 할 만하다. 율곡의 10만 양병론에 불구하고 1584년 율곡 사후에 1587년 공주제독이던 중봉 조헌 선생은 상소문에서
찬시(簒弑)한 풍신수길과 수교를 배척할 것을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를 비하하고, 우계 성혼을 보내고 사암 박순을 내쫓고 송강 정철
마저 음해하려는 ( 渾去淳逐。而澈迹孤危 ) 주류 세력들은 우연의 평화만
믿다가 왜적이 침입하자 수도 서울에서 3일이 되어도 관군 300명을
모집하지 못하여 의병 활동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도 관군은 의병을 깔보고 왜적은 무서워했으니 충정감사 윤선각
전라감사 이광 경상감사 김수 등이 조 중봉 고 제봉 곽 망우당 등과 갈등을
야기한데서 알 수 있습니다.
세계 義兵史에 유례없는 6,000여 의병봉기에 불구하고 1592년 7월 금산에서 전라도 의병이 비록 패하고 1593년 6월 진주에서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
삼장사를 비롯하여 봉이 귀인 등 사노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호남 의병이
순절하였지만 적의 세력 약화로 호남을 보전할 수 있었음은 근왕 의병의
충의 정신의 발로라 여겨지며 계원의병으로 이어져 전라 좌의병이 경상도
성주와 개령을 수복하는 등 국토를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 충무공께서 한산도로 진영을 옮기면서 조정에 있는 친척되는 지평
희암 현덕승(希菴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 “호남은 국가지보장(國家之保障)이라. 약무호남(若無湖南)이면 시무국가(是無國家)라” 하였는데 7년 전쟁
기간 동안 왜적의 침공을 막아내고 군량과 병력의 확보는 물론 참된 향약정신으로 환난상휼하려는 호남민중의 의기를 취합하신 충렬공 제봉선생처럼 훌륭한 분이 있었기 때문이며, 실제로 왕조실록에 의하면 1593년 봄
호남에서 벼 2만석을 거두어 경상도의 종자로 사용케 한 기록이
증명하고 있읍니다.
임진 7주갑을 맞이하여, 제봉선생(1533-1592) 가문에서 삼부자 동순한
높은 기상은 송나라 문천상의 정기와 비견되며 정유재란에 차녀
(영광의 사인 노상용에 출가)까지 매적자결(罵敵自決)로 정절을 지켰으니
세독충정 유훈이 더욱 고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소위 九功臣 집안에 삼부자 同殉은커녕 父子 또는 兄弟 동순도 없으며
조 중봉을 제외한 문집에서 모의격서(募義檄書) 한 문장을 볼 수 없으니
아무리 호도하고 치장하여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임진란 선양사업을 주최하는 사람들의 발표물 (임진전쟁.420년의 기억과
공존의 미래)을 보면 대학의 교수들을 동원하여 학술대회를 열어 당시 주류 위정자의 무능은 감추려고 거대한 통일 국가가 된 일본이 전력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침략하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거나(5쪽 12줄),
결과적으로 길을 비켜준 지역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였다거나 하는 모호한 논리로 소위 구공신에 들지 않은 경상도의
곽재우 김시민 김면 전라도의 김천일 최경회 황진 선거이 임계영 등
훌륭한 선현들을 비롯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봉기한 의병들의 충의 정신을
모독하고 , 전쟁 중에 순절하거나 살아서 전쟁의 뒤치다꺼리를 하였던
지금은 고혼이 된 수 만은 호남민중의 영령들을 모독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려는 지난 6월2일 안동에서 있었던 기념행사 식장에서 당시
이 지역 출신 김모 의원 축사를 하면서 학봉 김성일의 귀국보고가 사실과
다르다는 조금은 생뚱맞은 언행이 이를 현실화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숨기고 남김없이 분석하고 반성하여 과오를
되풀이 않기를 바랄 뿐이며 타인을 원망하고 허물을 탓할 겨를도 없습니다. 후손되는 사람들이 변명하고 호도하기 보다는 김삿갓 정신으로 공과 죄를
반성하고 국가 장래를 위하여 정의로운 동포애가 펼쳐지길 희망 합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임진년 순절 의병의 명복을 삼가 빌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2012. 6. 14일 동양문헌학회 김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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