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종계변무에 대하여

高 山 芝 2013. 5. 23. 09:30

종계변무에 대하여

 

종계변무란 조선시대인 1394년(태조 3)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 간 명(明)나라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잘못 기록된 세계(世系)를 시정해달라고 주청(奏請)했던 사건이다..

고려시대인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제거할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왕실의 후계가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으로서 그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모함하고 이성계는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 했다. 명나라에서는 이 내용을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기록했다. 조선은 1394년 명나라 사신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종계(宗系)문제는 조선왕조의 합법성과 왕권확립에 관계된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명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의 귀국 편에 변명주문(辨明奏文)을 지어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반응이 없자, 1402년(태종 2) 사은사 임빈(林彬)을 파견하여 주청문(奏請文)을 보냈으나, 명나라에서는 〈만력회전 萬曆會典〉 중수본에 변명사실 만 부기하는 데 그쳤다. 이후 이것은 200여 년에 걸친 양국간 외교문제가 되었고, 중종반정의 합법성 강조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주청사 이계맹(李繼孟)이 돌아와 〈대명회전〉 〈조선국조 朝鮮國條〉의 註에 "이인임과 그의 아들 단(丹 : 이성계)이 홍무 6년에서 28년까지 4명의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자 중종은 남곤(南袞)·이자(李耔)를 보내 개정을 요구했다. 그후 〈대명회전〉 重撰이 있으리라는 소식을 듣고 1529년 유보(柳溥), 1539년 권벌(權), 1557년(명종 12) 조사수(趙士秀), 1563년 김주(金澍), 1573년(선조 6) 청련 이후백(李後白)·월정 윤근수(尹根壽), 1575년 홍성민(洪聖民) 등을 보내 거듭 개정을 주장했다. 1581년 황강 김계휘가 주청사(제봉 고경명 서장관 사계 김장생 수행)로 使行하여 해결하였다.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등본을 가지고 돌아와서 종계변무의 목적이 일단락되었다. 1587년 유홍(兪泓)이 중수된 〈대명회전〉 중 조선관계 부분 1질을 받아와 선조가 종묘사직에 친고(親告)했으며, 1589년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옴으로써 종계변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1590년 선조20년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광국공신의 록훈을 책록하였는데 수훈자는

光國 1等 功臣 尹根壽 黃廷彧 兪 泓

광국 2등 공신 洪聖民 李後白 尹斗壽 韓應寅 尹暹 尹泂 洪純彦(역관)

광국 3등 공신 金澍 李陽元 黃琳 尹卓然 鄭澈 李山海 奇大升 柳成龍 崔滉 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1563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울산군수에서 퇴관하고 19년간이나 자정하던 제봉 고경명 선생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여 영암군수로 복관하고 내직(사헌부 지평)으로 불러  서장관으로 보내 문제를 해결하였음에도 다시 외직인 서산군수로 발령한 정국의 상황에 주목하며 당시 주류인 동인들의 안이한 국가안보관( 병조판서 율곡의 십만양병론 배척과  통신부사 학봉의 대일 온건론) 에  대하여 400여년이 지난 오늘 날 일지라도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20110223  신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