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7천만원사건 김대운 진술내용(2)
돌아오는 길에 시내 중앙동 무궁화다방에(서) 이철승을 만나 남은 미화 50불을 집이
없다고 걱정하기에 방이나 얻으라고 주었다. 그리고 이덕원에게 대구 가라고 20불을
주었다. 그 후 이철승에게 부탁하여윤익현으로부터 참회서를 받아줄터이니 민국당출신
국회의원을 "신성"요리집에 많이 모아달라고 하였다. 29일 오후 5시경 "에덴"다방에서
이철승을 만났더니 "신성"요리집에 국회의원을 모아노았으니 오라고 (하)기에 가본즉
고영완. 서민호. 이철승. 유진산. 유성준. 김의원 등이 모아있었다.
그래서 내가 술을 내고 윤익현구출에 대해 말을 하였다. 밀담을 하기 위해 기생도
부르지 않고 우리들 끼리 안진 쪽에서 본인이 먼저 일동에 대하여 국민방위군사건은
결국 5명이 사형언도를 받았는데 김윤근은 책임자이니 할 수 없다하더라도 윤익환외
3인은 상부명령에 의하여 움직였을 뿐인데 사형까지는 너무하다. 대체로 방위군사건은
첫째 국방부장관 신성모씨는 제2국민병을 동원시킬 때 숙소 하나 준비없이, 식량 하나,
자동차 한대 준비없이 천리길을 치운(추운) 겨울날에 하루 밤만 눈 위에 자도 병이
들릴 것인데 20여일, 한달씩 거리에서 자고 굶주린 참상이 어찌 김윤근 윤익현에게 만
있다고 봅니까 ? 그리고 모르는 일이지만 신장관은 지금 결혼하면 아니되는지 62세나
되는 노인이 일선에서는 장병들이 죽업으로써 순국에 이바지하고 있고 또 한 때(는)
사랑하는 부하 김윤근이가 사형을 받게되었는데 무엇이 조아서 장가를 든단 말이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니 좌중 역시 본인의 말에 찬성하였다. 그러니 특히 고영완이가
본인에게 전에 말한 윤익현으로부터 신성모와 공화.민정회에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명백히 하는 참회서를 받아내면 윤익현을 구할 수 있다. 더우기 공화.민정회에서
윤익현으로부터 받은 1억3천만원의 정치자금이 탈로날까 하여 대통령에게 속히 사형
집행을하라고 하고 있다하니 참회서만 받아내면 공화.민정 세력을 분석하여 윤익현이도
구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우리당의 입장에서 보면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이 때
국회내의 안정세력을 가진 공화.민정을 분쇄하지 아니하면 우리 대통령선거에
지장이 있으니 이번 1억3천만원 사건만 밝히면 공화.민정측에서 관계직원 7.8명을
제거할 수 있고 그렇게되면 우리당에서도 민우회등과 합하면 어느 정도 승산이 올
것이니 꼭 협력을 해 달라고 하니 서민호의원이 그런 말 하지말라고 하였다.
그 후 본인이 참회서를 어떻게 받을까 물으니 윤의처로 하여금 받아내면 된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곘다고 약속하고 그 문제를 중심으로약 3시간 가량 이야기하고 헤어젔는데
당시의 술값은 약 50만원정도로 외상을 달고 헤어졌다. 그 이튿날 즉 30일에 국회에 가서
방위군사건으로 싸움이 생기는 것을 보고 참회서를 받아오면 힘껏 싸워주곘구나
생각하고 그 이튿날 대구로 보낼 양으로 이덕원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이덕원이가
가지않고 있자, 8월1일 오전 6시경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지검에서 모르는 사람 3인이
와서 나를 다리고 가메 따라 간 즉 동링 오후 2시경 대구에 갈려고 나오는데 김희준의원이
나를 만나드니 검찰청에 힘껏 협력하여주라고 부탁(하)였다. 그렇다고 답하고 동일 오후
3시경 장재갑.안희경 양검사가 방위군사건으로 조사할 일이 있으니 대구로 가자고 하기에
"찦차"로 대구를 갔다. 그날 대구에서 일박하고 양검사의 지시에 따라 동일 오전 10시경
헌사(헌병사령부) 로(노)소령과 같이 대구형무소로 가서 헌병 이상 이대진 입회하에
윤익현을 면회하였을 때 부산에서 국제신문과 대구, 경향신문을 별지와 같은 것 각 1매를
내어 방위군사건관계 보도를 보이고 나는 고영완에게서와 국회 내에서 싸우는 광경을
이야기하고 당신 부인에게 참회서를 써달라고 하였다. 윤익현이가 자기 부인에게 편지를
쓴 것은 신성모에게 5백만원과 신정동지회에게 1억3천만원원을 준 사실을 썼다. 그리고
편지내용전부를 못보고 가지고 나와볼려고 하고 헌사 로(노)소령에 빼앗기고 또 검사들이
가지고 가서 잘 보지 못했다. 그 편지는 로(노)소령이 한벌 베끼었다. 돌아와 (경)주에서
일박하고 부산으로 3일 오후 1시경 도착하였다. 4일 대구헌사 제2처장 송중령이 대구에
가서 윤익현이를 보고 또 면회하여 또 한장 편지를 부인을 입회시키어 바드되 가족을
다리고 가자고 하기에 윤의 처를 못차저 국회광장에 와 보니 김혜정이를 만나 윤의 처를
무른즉 대구옥천병원에 있다하여 그러면 김혜정이에게 가자고 하였더니 절대 못가곘다하여
욕을 하고 송중령과 같이 대구에 동일 오후 7시경 도착하여 윤의 처를 만나 면회 가자고 하니
절대 안가겠다고 거절하여 할 수 업시 나 혼자 며뇌를 하였다. 면회시 가족에게 할 말이
없느냐고 하였드니 헌사에 ㅁ 이야 ㅁ 하고 5일 비행기로 경부산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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