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6]
- 한국문인협회의 역사기행 -
高 山 芝 시인
고구려사에 대한 이들의 동북공정도 모순되기는 매 한가지이다.
(1) ‘고구려는 고조선 땅에 세워졌다’는 주장에 대하여 - ‘오례통고(五禮通考)’201권에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 두 군이 다 옛 우이(嵎夷)의 땅”이라했고 ‘우공추지(禹貢錐指)’에 “동이 9족이 우이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견해가 실려 있다. 따라서 오늘의 요녕성, 즉 현도·낙랑 일대에 있었던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고조선 땅에 세워졌다.
(2) ‘고구려는 독립국이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다’는 주장에 대하여 - 중국의 천자가 자기 친척이나 친지를 분봉(分封)했을 때 그것을 지방정권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중국 역대의 어느 왕조에서도 그 친척이나 친지를 왕으로 봉한 사실이 없다. 고대의 조공책봉은 외교적 의식행위였으며 지방정권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3) ‘고구려민족은 중국고대 한족이다’는 주장에 대하여 - “조선·구려 등 여러 나라가 우(禹)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靑州)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는 기록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온다. 한족이라는 명칭은 유방(劉邦)이 한(漢)을 세운 이후 비로소 생겨났다. 고구려는 동이족으로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기 2000년 전인 하우(夏禹)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4)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국내전쟁이다“는 주장에 대하여 - ‘대역집의수언(大易集義粹言)’ 8권에 보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 것은 침략을 자행한 것이다(唐太宗之伐高句麗 爲寇者也)”는 구절이 나온다. 구(寇)는 도둑질을 한다는 뜻으로,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겁탈하거나 강탈하는 것을 표현할 때 쓴다. 위 구절에서 보듯 고대 중국인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 것을 위구(爲寇)라고 표현했다.
(5) ‘고려(왕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다’는 주장에 대하여 - ‘송사’ 고려조는 “장흥(長興·후당 명종 연호) 시기에 권지국사 왕건이 고구려 고씨의 왕위를 계승했다(長興中 權知國事王建 承高氏之位)”고 썼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중국의 고대사서가 입증하고 있다. 본인들의 사서까지 부정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6) ‘한반도 북부, 북한지역도 중국역사다’는 주장에 대하여 - ‘주서(周書)’에는 고구려가 이역조에 실려 있고, ‘송사’는 고구려를 외국열전에 포함시켰다.
고구려 역사에서 중국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기간은 30년에 불과하다. 668년에 당(唐)이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699년 그 땅은 대조영(大祚榮)에 의해 진국(震國)이 건립되고 713년 다시 국호를 발해(渤海)로 고쳤다. 따라서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포함되는 기간을 굳이 따진다면 고구려 멸망에서 진국이 건립되기까지 30년 동안이다. 일본이 한국을 36년 동안 통치했다고 해서 전체 한국의 역사가 일본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당나라가 고구려 땅을 30년 동안 지배한 것을 두고 고구려 전체 역사를 마치 중국 역사인 것 처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을 품고서 광개토대왕릉으로 발걸음을 옮겠다.
좌우로 늘어선 느릎나무 산발목(傘髮木) 사이를 걷기를 10여분 정도 장군총보다는 훨씬 큰 무덤이 보였다. 주변을 뽕나무 느릎나무 등 으로 정비하고 있지만 정작 무덤은 허물어진채로 방치된 느낌이다. 무덤에 올라서서 내부로 들어서자 관이 놓였던 단만 있을 뿐이다. 무덤의 출구 앞에 널브러진 잡석들은 어쩜 진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기단식 돌무지 무덤은 묘 자체는 거의 붕괴되었고 기단과 반파된 제2방단의 일부만 남아 있다. 기단의 각변의 길이는 약 66m 이고 5개의 입석을 세우고 큰 석재 7장을 쌓아 축조했으며 기단 위로 올라가면서 석대의 높이를 줄였다. 방단의 내부는 막돌과 강돌로 채웠다. 방단 평면 면적을 감안하면 장군총의 4배 규묘이다. 묘의 정상부에서 고구려 기와 파편 전돌, 특히 원태왕릉안여산고여구(願太王陵安如山古如丘)라는 명문전(名文塼)이 발견되었고 초석이 있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태왕묘(太王墓)의 주인으로 알려진 고구려 제19대왕(391∼412) 광개토대왕은 재위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영락대왕이라고 불렸다. 본명은 담덕(談德)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386년(고국양왕 3)에 태자로 책봉되고 391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확장시켰는데, 예성강(禮成江)을 경계로 백제에 대해서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392년(광개토왕 2) 석현성(石峴城;開豊郡 北面 靑石洞)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관미성(關彌城;江華 喬桐島)을 함락시켰다. 394년(광개토왕 4)에는 수곡성(水谷城;지금의 新溪), 395년에는 패수(지금의 예성강)에서 침공해 온 백제군을 격파하고 백제와의 접경지대에 7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396년(광개토왕 6)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략하였다. 399년(광개토왕 9)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는 신라를 백제가 왜(倭)를 앞세워 공격하자 모두 궤멸시켰고, 407년(광개토왕 17)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6성을 치고 백제를 응징하였다. 이러한 남방으로의 세력확장과 함께 서방으로의 진출도 꾀하였는데, 당시 고구려 서쪽에 있던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400년(광개토왕 10)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공해 오자 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여,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비롯한 요하(遼河) 동쪽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 밖에도 392년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에게 잡혔던 고구려인 1만 명을 데리고 들아왔으며, 410년(광개토왕 20)에는 동부여(東夫餘)를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세력권을 확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토를 크게 넓혀서, 서로는 요하(遼河),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또 내정의 정비에도 힘써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 중앙관직을 신설했으며, 역대 왕릉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고, 393년(광개토왕 3)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412년 39세로 세상을 떠난 광개토대왕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중국인들이 호태왕비(好太王碑) 또는 평안호태왕비(平安好太王碑)라고 부르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대왕(大王) 서거 2년 후 414년 장수왕이 세웠다.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는 약 6.39미터이며, 면의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 ~1.46m,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으나 이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전한(前漢) 예서(隸書)의 서풍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史料) 및 금석문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까지는 확인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가 해제된 뒤 1875년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되자 수많은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훼손되었고, 발라논 석회로 비면이 손상되어 지금까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은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이다. 마지막으로 제3면 8행부터 4면 9행까지는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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