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8]
- 한국문인협회의 역사기행 -
高 山 芝 시인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고종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 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종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한국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駐)한국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 받아 궁궐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찬성한 다섯 명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8 대신 가운데 5 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영유권 문제는 한·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係爭問題)였다.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간도협약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였으며,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간도협약과 을사조약을 포함하여 일본이 대륙침략정책을 수행하면서 체결한 모든 조약과 이권 및 특혜를 무효 또는 원상회복토록 하는 많은 조치들이 취해졌다. 중일 양국은 이 기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하였으므로, 1909년에 체결된 간도협약도 필연적으로 무효일 수밖에 없다. 국내성의 중국 영토 귀속과 관련하여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중조(中朝) 국경조약’이다. 1909년 청일 간도협약에서 북간도만 양보했던 것을, 1962년 ‘중조 국경조약’에서 서간도의 국내성마저 다시 중국에 양보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1962년 북한과 중국 간에 체결되었다는 이 국경조약과 관련해 중국의 6·25 참전 대가로 북한이 국경을 양보했다는 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북중 양국이 아직까지 국경조약 체결 사실 자체를 숨기고 있어 그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인도의 한 신문이 1965년 7월 북한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중국은 6·25 참전대가로 백두산 지역 250㎢ 가량을 떼어달라고 북한에 요구했다”고 보도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사실무근은 아닌 것 같다.
광개토대왕비를 관람한 후 오회분오호묘(五盔坟五号墓)로 가는 차안에서 나는 강압으로 을사조약을 이끌어내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간도협약으로 이권을 챙기었던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우산묘구(禹山墓區) 최남단의 통구고분군에는 비슷한 형태의 5개 무덤, 오회분오호묘(五盔坟五号墓)가 있다. 그 중 1·2·3호묘는 도굴되어 내부상태가 좋지 않아 거의 방치되었으며, 4·5호묘만 벽화상태가 훌륭하다. 다만 5호묘는 일반에게 공개하기 때문에 날로 벽화가 훼손되고 있으나, 4호묘는 공개하지 않아서 가장 완벽한 벽화를 볼 수 있다. 5호묘는 무용총과는 달리 전실이 없으며, 묘도와 용도의 구별도 불투명하다. 우선 지하 3∼4m에 만들어 진 5호묘는 현재 묘도가 거의 파괴되었고, 그 끝에 큰 돌로 묘문을 막게 되어 있다. 1.93m의 용도에는 인동무늬가 둘러싸인 력사(力士)가 있다. 이 역사는 사천왕의 하나인 인왕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용도 위에는 큰 개석(蓋石)으로 덮고 있어 주실과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묘실과 3개의 관상(棺床)이 놓여 있다. 무덤의 주인외에 처와 첩의 것으로 추측한다. 사방의 벽과 천장에는 다양한 벽화로 채워지고 있다. 이곳의 벽화는 무용총이나 각저총의 벽화와는 달리 돌 벽 위에 그대로 그린 사신도가 특색이다. 5호묘의 특징은 신선사상이나 천지 창조 등을 반영한 천장벽화의 다양성에 있으며, 천정과 벽면에는 물방울이 엉켜있으며 결로현상(結露現象)으로 색감은 뚜렷하여 석회벽화(石灰壁畵)와의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5호묘 벽화는 고구려 벽화예술에 나타난 예술적 감각과 기후·온도·습도·광채·통풍 등을 고려한 고구려 벽화의 과학성이 한 곳에 결집된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천정과 벽면의 결로 때문에 벽화의 훼손이 뚜렷함에도 그대로 관람객을 받고 있는 이들의 문화에 대한 몰염치 때문에 뒷 맛이 씁쓸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 때문에 오녀산성을 구경할 수 없는 아쉬움이 더 컷다.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 오녀산(五女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추정되는 이 성(城)은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아 고구려 특유의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오녀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테뫼식으로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오녀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이고, 전체 약 8km이다. 압록강의 지류이자 비류수(沸流水)로 불리던 혼강(渾江)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성 안에는 천지(天池)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는데, 2천년 동안 한 번도 마른 일이 없다. 산성은 200m 높이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왔다. 동쪽과 남쪽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설치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전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 바로 오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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