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경과]
1947년 2월 28일, 타이완 시내에서 시위하는 시위대1947년 2월 28일,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발포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들어와 있던 중화민국 경찰과 군부대 본부를 에워싼 채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타이완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시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시위를 빌미로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들을 구타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천이의 집무처로 밀려든 시위대를 향해 군(軍)이 기관총소사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분노한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타이완 전 주민이 궐기할 것을 외쳤다. 이것이 이른바 '2·28사건'이다. 2월 28일 당일에는 타이베이 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3월 1일 이후 시위는 타이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년 반 동안 쌓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봉기는 삽시간에 대만 전역에 퍼지고 3월 2일,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각지에 '2·28 처리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타이베이시 참의회는 사태 해결을 위해 당일 오후 2시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의회에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 단속 살인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타이완 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 천이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표하였다.
1.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 발포를 한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가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처리위원회에 대한 타이완 주민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그 권위가 높아지자, 처리위원회는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이를 타이완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로 구체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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