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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당신이 보시기에 좋지 않음은 독처(獨處)하는 사내의 모습입니다. 홀로 행하는 선(善)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진실입니다. 독선(獨善)의 이면에 흐르는 교만이 아집(我執)으로 고착화 되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흙으로 지으신 당신의 형상을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관계를 통하여 구현코자 하신 당신. 당신은 날 더러 하나가 되라 합니다. 이웃과 연합하여 선(善)을 이루라 합니다. 사랑은 독처하는 곳에는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은 관계 맺기를 원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라는 희망의 씨앗입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상처 난 자를 어루만져 주는 우리들의 선한 믿음입니다.”
- 독처(獨處) -
산업혁명이 인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던 효율의 덫에 사내는 갇혀있습니다. ‘제3의 물결’이라는 정보혁명의 지각 변동 속에서도 효율에 길들여진 사내였습니다. ‘제4의 물결’이라는 지식혁명이 쓰나미로 덮쳐오자 사내는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효율을 위해서라면 독선(獨善)도 선(善)이 됐던 시절을 사내는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선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협력하여 이루어 가는 선(善)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질책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협력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렸습니다. ‘편 가르기’ 와 ‘편 만들기’에 급급한 사회의 병리 현상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은 동이부화(同而不和)한다.’
군자는 화합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자신과 같음을 요구하지 않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지만) 소인은 자기와 같지 아니하면 상대방과 화합하지 못한다. (자기와 생각이 같지 않으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투고 분란을 일으켜서 지배하려 하고 동화시키려고 한다) 뭐 이런 뜻일 겁니다.
서로의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공의의 기준이 옳고 그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편이냐? 네 편이냐?’로 판가름 나게 됩니다.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적의(敵意)를 드러내선 협력할 수 없습니다. 이분법 논리에 길들여진 세상이 편 가르기를 계속하며 적의를 드러내기에 예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바울도 “손과 발은 주어진 임무가 다를 뿐 하나님 안에서 한 지체”라고 했습니다. 손과 발이 형상이 다르다고 서로 적의를 드러낸다면 몸 전체에 이상이 생기고 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이웃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적의의 대상도 아닙니다. 함께 협력하며 살아가야 할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