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제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구속(拘束)받기 싫어서 제멋대로 살아왔네

제멋대로 사는 방종 자유라 생각하며
느낌대로 살아왔네 나만 위해 살아왔네

자유를 만끽하며 제멋대로 사는 세상
의지할 곳 없으니 피곤함만 중첩됐네

멋대로 즐긴 쾌락 즐거울 줄 알았는데
후회뿐인 아쉬움이 무거운 짐이 됐네

공허함, 허전함이 나의 삶을 지배하니
느낌대로 즐기면서 생각대로 하는 행동

평안이 아니었네, 자유가 아니었네

 

깨달았네 깨달았네, 집 떠난 후 깨달았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치 깨달았네

남을 위해 흘린 구슬같은 땀방울이
나의 결핍 채워주는 구속(救贖)의 사랑임을

바라보며 배려하며 어우러진 세상에서
누군가를 위해 흘린 당신의 땀방울이

감사로 은혜로 내 가슴 적셔놓고
지켜야 할 약속으로 나를 속박하였네

살펴보며 보살피며 말씀대로 살라하신
십자가의 복음되어 나를 구속(拘束)하고 있네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건져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게 하려는 그리스도의

섭리적(攝理的) 행위를 기독교에선 ‘구속(救贖)’이라고 한다.

재산이나 동물 또는 인간에 대한 법적인 자유가 금전을 지불함으로써

본래의 소유주에게로 돌아가는 구속이라는 한자에 대해 알아보자.

형성문자인 구원할 구(救)자는 뜻을 나타내는 등글월 문자와

음을 나타내는 구할 구(求)자로 이뤄졌다.

재미있는 것은 구원할 구(救)자에 ‘도움’이라는 제3의 뜻이 함의돼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행위이다.

 

조개 패(貝)자와 팔 매(賣)자가 합해진 형성문자 속죄할 속(贖)자도 흥미롭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장 12절).

여기에서 ‘죄’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이레마타’에는 빚 혹은 부채라는 뜻도 포함돼 있다.

빚진 죄인이란 말처럼 빚과 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경제적 개념인 ‘빚의 탕감’과 도덕적 개념인 ‘죄의 용서’ 또한 동일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죄와 빚을,

우리는 별도의 개념으로 착각, 구분하고 있다.

 

결여를 채우려는 아담의 욕망이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유의지를 통해 행동으로 표현된 선악과(善惡果)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은 최초로 분리됐다.

죄는 ‘소외 혹은 분리’이고, 은혜는 ‘수용(受容)’이라면서

‘용납될 수 없는 데도 용납된 자로서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용기야말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믿음이다’라고 설파한 폴 탈리히.

탈리히가 말하는 ‘구속(救贖)’은 수용된 상태를 의미한다.

복음(福音)은 나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은혜로 수용케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