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지 시인

세상에 십자가 그리도 많지만
네 몸처럼 사랑하란 예수는 보이잖네


처처불생 선포하는 불타의 설법에도
자비가 사라졌네, 보시(布施)가 보이잖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세상
애곡(哀哭)을 하여도 슬퍼하지 않는다네

제사장은 많은데 지식인은 많은데
너도 나도 밤나무 법대로 따지지만

귀찮고 성가신 일 얽매이기 싫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않는다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
가난한 자, 부추겨 쌍심지를 세우고

 

너도나도 의인(義人)이라 자랑하고 있지만
자기의(自己義) 드러내는 위선자들뿐이네

주린 자, 목마른 자, 음식을 대접하고
병들고 헐벗은 자, 돌본 소자(小子) 어디 갔나?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하며
상한 갈대 안아주는 착한 사람 어디 갔나?

선한 사마리아 인 사라진 거리에
자기의를 드러내는 인간들만 방행(方行)하네

의(義)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에서 나온다.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올바름을 지향하거나 올바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의는 일반적으로

사적인 이익과 대립하는 사회정의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넘보는 일, 본분을 망각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거나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태만하는 일 등은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배척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상실한 사람들이 방행하는,

양심과 염치가 사라진 난장(亂場)으로 변했다.

뱀의 유혹에 현혹돼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자신들의 모습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부를 가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대답했다.

적어도 아담과 하와는 수치(羞恥)를 자각했던 인간들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가죽옷을 손수지어 입혔다.

하나님이 수치를 가려준 탓일까?

이후 가인의 행태는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도 죄의식이 마비된 몰염치의 극치다.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신 하나님은

땅의 소산으로 드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몹시 분해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권면했다.

분을 이기지 못해 동생 아벨을 살해한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하나님은 돌이킬 기회를 제공했으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항변하고 있는 가인의 행태에

양심을 판 정치인과 죄에 마비된 종교인, 그리고 ‘생얼’을 숨긴 연예인들이 벌이는

난장(亂場)과 방행(方行)이 오버랩되면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검찰에 소환된 그들 대부분은 카메라 앞에 서서“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어디 있을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시인의 번민을 단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답답함이 나의 가슴을 짓누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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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 7일 금강일보 3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