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의 안개처럼 살다

추천서문 - 김원기(제17대 국회의장)

高 山 芝 2017. 4. 21. 12:03

         추천서문 - 김원기(제17대 국회의장)           

제14대 대법원장 이용훈(李容勳, 고영완 선생의 둘째사위)씨로부터 고영완(高永完) 선생의 일대기에 관한 추천서문을 부탁받고 감히 거절하기 어려웠다.

고영완 선생과는 함께 정치를 한 적은 없지만, 본인이 기자였던 1974년, 동아일보에 ‘제1공화국 제8화 국민방위군 사건’을 연재하면서 선생의 의정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해동(海東) 굴지의 명문인 삼한갑족(三韓甲族) 제주고씨(濟州高氏) 장흥백파(長興伯派) 고복림(高福林)의 26세손이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16세손인 선생은, 일본 유학 시절 3,000석의 지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농촌계몽운동을 한 선각자였다.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학생과 일본 유학생이 중심이 된 항일결사조직 ‘조선학생동지회’에 누이동생 고완남과 함께 참가, 전라도 책임자로 활약하다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독립투사였다.

해방은 되었으나 국가 재정이 너무나 빈약해 부족한 교육시설은 학부모와 군민들의 힘으로 확충해야 할 난관에 부딪히자, 장흥공립중학교에 자신의 ‘논[畓] 100두락(斗落)’을 쾌척한 독지가였다.

선생은 초대 감찰위원회에 참여해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양곡매입비 조작유용 사건과 상공부장관 임영신의 수뢰 및 국가재산남용사건을 밝혀 낸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들의 파면을 거부하자, 감찰위원장 정인보와 함께 물러난 진정한 공인(公人)이었다.

6ㆍ25전쟁 중에 고영완 의원이 정읍군 고부면의 부역자들을 구한 이야기를 나는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정치활동을 했던 내 지역구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9ㆍ28 수복으로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가족들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종처남이 정읍군 인민군당위원장이던 고부면의 처갓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가족과 무사히 상봉한 고영완 의원은 정읍경찰서장에게 구치소에 구금 중인 부역자(附逆者)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거부하는 경찰서장에게 “내 가족이 지난 3개월 동안 무사한 것을 보면 저들은 공산당이 아닙니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완강히 거부하자 조병옥 내부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위원장 1명을 제외한 모두(4, 50여 명)를 석방시킨 이야기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처럼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최대실정인 국민방위군 사건은 군사재판 개시 3일만에 ‘김윤근은 무죄, 윤익헌은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자칫 묻혀버릴 것 같은 이 사건이 재심을 거처 사형선고에 이르게 된 것은 고영완 의원의 국회 발언 때문이었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한 선생의 용기 있는 행동은 후배 정치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신정동지회로 들어간 정치자금은 신정회 사무총장 조영환이 무죄판결을 받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특이하게도 신정회 사무국장이었던 조영환이 5년 후(1957)에 고정간첩으로 밝혀져서 15년형을 받았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4ㆍ19혁명으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선생은 신, 구파 분쟁으로 민주당이 분열하자, 구파동지회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에 잔류해 통합을 주장했다. 민주당 장면 정부가 5ㆍ16군사정변으로 10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무너진 원인은 민주세력의 분열에 있었다.

선생의 정치적 멘토였던 조병옥 박사의 “빈대 잡는다고 초가 삼 간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유산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의 가슴에 울림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추천사에 갈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