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prologue)
고영완(高永完, 1914. 2.11~1991. 8. 6 운동계열 학생운동)은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서울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해 일본 센슈대학(專修大學)에 유학했다. 1939년 12월,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상흠(金相欽), 서영원(徐泳原), 윤주연(尹柱淵) 등이 중심 되어 조직한 항일결사조직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에 참가해 전라도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학생동지회는 3ㆍ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조직을 전국적... 더보기
책 속으로
프롤로그(prologue)
고영완(高永完, 1914. 2.11~1991. 8. 6 운동계열 학생운동)은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서울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해 일본 센슈대학(專修大學)에 유학했다. 1939년 12월,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상흠(金相欽), 서영원(徐泳原), 윤주연(尹柱淵) 등이 중심 되어 조직한 항일결사조직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에 참가해 전라도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학생동지회는 3ㆍ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도쿄 유학생 등 해외 유학생과 연락,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 냉천동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벽제관 등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며 동지규합 및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41년 7월에 동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日警)에 발각됨으로써 동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고영완은 여동생 고영남(고완남)과 함께 동년 9월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모진 고문을 당한 고영완은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의 공훈조서 외에는 무계 고영완의 독립운동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필자는 2010년 8월에 발간한 윤주연옹의 항일비밀결사 《조선학생동지회약사》를 통해 조선학생동지회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조선학생동지회는 비록 미수에 그친 독립운동이었지만, 1930년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단체를 결성한 투쟁봉기를 목적으로 생성된 단체였다. 1930년 이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한 단체는 오직 ‘조선학생동지회’뿐이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고영완(高永完, 1914. 2.11~1991. 8. 6 운동계열 학생운동)은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서울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해 일본 센슈대학(專修大學)에 유학했다. 1939년 12월,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상흠(金相欽), 서영원(徐泳原), 윤주연(尹柱淵) 등이 중심 되어 조직한 항일결사조직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에 참가해 전라도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학생동지회는 3ㆍ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도쿄 유학생 등 해외 유학생과 연락,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 냉천동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벽제관 등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며 동지규합 및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41년 7월에 동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日警)에 발각됨으로써 동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고영완은 여동생 고영남(고완남)과 함께 동년 9월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모진 고문을 당한 고영완은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의 공훈조서 외에는 무계 고영완의 독립운동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필자는 2010년 8월에 발간한 윤주연옹의 항일비밀결사 《조선학생동지회약사》를 통해 조선학생동지회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조선학생동지회는 비록 미수에 그친 독립운동이었지만, 1930년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단체를 결성한 투쟁봉기를 목적으로 생성된 단체였다. 1930년 이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한 단체는 오직 ‘조선학생동지회’뿐이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아일보 책 소개 (0) | 2017.05.03 |
---|---|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에 대한 작가의 변. (0) | 2017.04.25 |
서시(序詩)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 - 고 산 지 지음 (0) | 2017.04.21 |
추천서문 - 김원기(제17대 국회의장) (0) | 2017.04.21 |
한국판 쉰들러리스트 무계 고영완 일대기 - 1 (0) | 2017.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