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마을

시집,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 평설 - 이삼헌(시인, 수필가)

高 山 芝 2017. 5. 1. 22:28

시집,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 평설

                                                              -  이 삼 헌(시인, 수필가)

몸을 낮춰 흐르는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에서

 

어머니의 고향 같은 따뜻한 언어로 우리 곁에서 물흐르 듯 편안한 시를 써온 고산지 시인이 이번 세 번째 시집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을 펴냈다.

 

사금파리 같은

내 유년(幼年)의 파편들이

 

기억(記憶)을 헤집고

살아나는 해어름

 

술래잡기 하고 놀던

제각(祭閣) 문 닫혀 있다

 

적막을 깨뜨리는

흑염소 울음소리

 

차뜽의 소나무

울창했던 동백나무

 

낯이 선 넝쿨장미가

나를 맞는다

 

흔적없이 사라진

우복동(牛腹洞) 집터

 

무심한 저수지

흔들리는 쪽 달 따라

 

등 멱 즐기던 현이성이 보인다

씨름하며 뒹굴던 동무들이 보인다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에서 ※2 전문

 

노자가 도덕경에서 일컫는 상선약수(上善若水)에 이르는 경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향이다. 현실 세계에선 없는 이상향이기에 그만큼 우리의 관심 또한 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고산지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이다. 고산지 시인은 이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상선약수 마을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마음이 실존하는 마을이다. 고산지 시인은 ‘상산약수(上善藥水) 마을’이라는 시집을 통하여 그의 시(詩)를 만물을 이롭게 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바람이 불자

나그네 가슴

흔들리네

 

구불구불한

매끄러운 손길

뿌리치고

 

방죽에

떨어지는

백일홍 꽃 이파리

 

조각배

거룻배 삼아

하늘 여행 떠나네

-송백정(宋白井) ※1 전문

 

송백정은 배롱나무 군락지다. 1934년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50평 남짓한 작은 연못을 국회의원을 지낸 고영완 씨가 크게 확장 주변에 희귀목인 배롱나무를 심어 장흥 군민의 자랑 속에 보호되고 있다. 섬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와 동백나무는 고영완의 고조부 언주(彦柱)씨가 심었다. 고 시인은 “흐드러진 백일홍 꽃 이파리 송백정 연못 위에 내 유년의 편린이 헤엄치고 있다”고 고백한다. 시인에게는 상선약수 마을이 유년의 원천이 되고 상상력의 근원지가 된다. 방죽에 떨어지는 백일홍 꽃 이파리는 조각배 거룻배 삼아 여행을 떠나는 아름다운 시(詩)가 되자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은 상선약수(上善若水) 마을로 되고 만다.

 

바람 잔잔한 청명 아침

이슬 사라진 찻잎을 따

묵은 잎 골라내어 살청(殺靑)을 하네

 

닦기고 비비길 수차례

유념을 거쳐 건조를 하니

맛있는 작설차 되었네

 

맑은 샘물을 길어다

은근한 불로

차를 끓이네

 

하얀 찻잔에 홍매화 꽃잎 띄우고

차 한 잔 들이키자

마침내 선(禪)이 되었네

- 선(禪) 전문

 

장흥은 옛부터 야생 차나무들이 자라는 차 재배의 적지로서, 장흥도호부에는 13개소의 다소가 있었다. 차를 만들어 나라에 바치는 13개의 다소를 둔 장흥이 고산지 시인의 고향이다. 차를 끊이고 마시는 행위로 다선일여(茶禪一如)를 구현했던 정화사(淨化寺)라는 절이 원래 상선약수마을에 있었다. 스님들은 샘물(상선약수)을 길어 차를 끓이고 마시는 다도(茶道)를 통하여 선을 수행하였다. 고산지 시인은 그의 시를 통하여 물이 갖고 있는 도(道)와 그 물과 결합한 한 잔의 차를 선(禪)으로 치환하는 연금술사로 변신하여 독자들과 만난다.

 

눈이 날린다

흩날리는 눈발 따라

그리움이 쌓인다

뼛속까지 스며든

그리움이 얼어

살얼음이 된 실개천

어름장을 덮고서

잠이 든 기다림을 안고서

시내물이 흐른다

-고향(故鄕) ※ 2011 전문

 

고향은 어머님의 품속 같은 곳이다. 언제 찾아도 포근하게 나를 안아준다. 고향은 그 누구도 거짓으로 부정할 수 없는 곳이다. 고향을 부정하면 패악이고 불효다. 산다는 것은 고향을 출발하여 어느 곳으론가 끝없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시가와 가무음곡, 희로애락을 형상화하는 예술의 출발점은 고향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피라미드의 시신을 미라화한 곳에는 먼 바다로 향해하는 돚단배를 형상화한 그림이 자주 발견된다. 물 한 모금이 아쉬운 메마른 사막에서 왜 항해하는 배가 있을까. 인류학자들은 어머니의 양수 속을 항해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아니다. 그것은 사막 한가운데서도 그리운 고향을 찾아 가는 귀소 본능의 표현이다, 상선약수가 흐르고 차의 향이 선의 경지로 이끄는 그곳에 시인의 고향이 있다.

 

그리움이 얼어 / 살얼음이 된 실개천

어름장을 덮고서 / 잠이든 기다림을 안고서

시내물이 흐른다

 

그리움과 실개천 그리고 어름장을 덮고 잠든 기다림.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더 이상 무엇으로 절창하랴. 쉽게 흉내내기 힘든 표현들이다.

 

신학문 배운다며

경성 유학 떠난 백부

휘문고보 다니던 중

야구공에 얼굴 맞아

 

고향에 돌아왔네

고향으로 돌아왔네

 

결핵균 감염되어

폐병으로 도진 질환

기침소리 급해지고

비릿한 핏덩이를 요강에 토해 놓네

 

기장쌀밥 도라지와

지네, 닭과 오소리기름

폐병에 좋다는 구렁이도 구하여

서방님 봉양하던 열아홉살 큰어머니

객혈이 잦더니 식은땀 흐르고

골골거린 기침소리 아픈 가슴 거머쥐는

피골상접(皮骨相接) 남편을

눈뜨고는 볼 수 없네

 

인육을 먹으면 폐병이 낫는다는

방물장수 말을 들은 열아홉 살 큰어머니

허벅지 살 떼어서

남편을 봉양했네

 

하늘이 무심하고

땅 또한 박정하네

큰어머니 허벅지살 알고나 드셨을까

그 해 겨울 못 넘기고 돌아가신 큰아버지

 

명치대학에 유학중인

해리당숙. 장성당숙

부음 듣고 읊은 애사(哀詞)

심금을 쥐어짜네

 

애사의 구절구절

슬픔이 묻어나고

애사의 구절구절

친족애(親族愛) 배어있네

 

큰어머니 귀한 행실 열려정문 세워서

총생(叢生)들에 알려 주잔 무계형님

떠난 마을

큰어머니 전설만이

동산집을 맴도네

- 강골백모(伯母) 전문

강골 백모에 대한 슬픈 애사를 읊은 시다. 시(詩)라기보다는 한 가문에 전해지는 절규처럼 들린다. 우리는 한 많은 민족이다. 특히 근세 백년은 질곡과 전쟁으로 얼룩진 슬픈 역사이다. 칠십을 넘은 한국인들은 허벅지살을 떼어내 남편을 봉양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거나 실제 이를 목도한 사람들이 많다. 먼 과거가 아니라 근세 100년 사이에 일어난 비극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평화를 만들고 다향이 선의 세계로 이끄는 그 땅에도 전설이 된 슬픔이 있었다.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담한 한 편의 시로 엮어 냈다. 역사와 전설도 시인의 눈길이 닿으면 아름다운 시로 변신한다. 고산지 시인은 시집 상선약수 마을을 통하여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시를 엮어내는데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햇살이 경끼를 일으키는 배롱나무

약수마을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개의 키워드

 

상선약수 마을은 물과 울창한 숲을 테마로 다양한 놀이 체험과 호젓한 숲 체험을 즐길 수 있는 농촌 전통 테마 마을이다. 너른 들판을 따라 운치 있는 메타스퀘아 길을 지나면 상선마을 입구에 이른다. 우뚝 솟은 억불산의 연대봉 아래로 상선약수마을의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장흥군청이 소개하는 장흥지에 소개된 글이다.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우리나라의 자연은 많이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과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장흥의 상선약수 마을이 옛 정취를 잃지 않고 보존되고 있음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바람기 참지 못해

건들건들 산들바람

겉옷을 벗기고

속살을 만지네

 

수줍은 배롱나무

하얀 가지 뒤틀며

간지럼 참지 못해

간당간당 간당간당

 

백일홍 꽃송이

누어

워 조을던 햇살이

경끼를 일으키며

방죽에 떨어지네

-송백정(松柏井) ※ 4 전문

 

바람이 겉옷을 벗겨내고, 수줍은 배롱나무 하얀 가지는 간지럼 참지 못해 햇살이 경끼를 일으키며 방죽에 떨어진다. 백일홍 꽃이 방죽에 떨어지는 것을 의인화시켜 읊은 시다. 바람과 경끼하는 햇살이 떨궈내는 배롱나무의 낙화는 소리 없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이다. 무념무상의 경지이다. 이 시를 이해하자면 햇살이 경끼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잡스러운 것들의 범접을 금하는 무념무취에 빠져야 이해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고산지 시인의 여러 편의 시에는 이런 경향을 보이는 시들이 많다.

 

모듬지에 걸린 하늘

물풀 사이 끼어들자

 

일렁이는 수면에

온갖 색깔 일어나

 

햇살 따라 둥실둥실

춤을 추기 시작하네

- 송백정 (松白井) ※5에서

 

모듬지에 걸린 하늘이 물풀 사이로 끼어들자 수면으로 색깔들이 일어나 햇살 따라 백일홍 꽃잎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늘이 물풀 사이로 끼어드는 것을 봐야하고 수면으로 햇살들이 춤추게 해야 이 시는 비로소 독자의 몫이 된다. 그런데 화자인 고산지 시인이 햇살들을 물 위에서 춤추도록 연출하는 것인지 햇살들이 스스로 춤을 추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자연과 화자의 생각이 합일 할 때 시는 아름다워진다. 현대시에서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홀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이런 것들이 시의 본향을 파괴한다. 시에서 자연 친화성을 얕보는 것은 시의 본질을 망각한 데서 오는 비극이다. 고산지 시인의 자연친화적인 시의 특성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냥 쉽게 생성된 것은 아니다. 사십년 이상의 시적 연륜이 가져온 결과물이다.

 

송백정 작은 섬에

소나무가 독야청청(獨也靑靑)

엄동설한(嚴冬雪寒) 삭풍에도

거칠 것 없다네

 

민감한 기상은

불의를 참지 못해

적송(赤松)의 붉은 기개

하늘을 찌른다네

 

송백정 방죽가

백일홍이 독야홍홍(獨也紅紅)

자미수 붉은 나무

태양보다 뜨겁다네

- 송백정(松柏井) ※6

 

배롱나무는 하얀 가지 뒤틀며 간지럼 참지 못해 간당간당 하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유약한 나무가 아니다. 엄동설한을 견디며 불의를 참지 못해 하늘을 찌르는 적송의 기개를 닮은 나무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배롱나무의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화자에게 투영되고 있는 배롱나무의 참 모습이다. 햇살들이 경끼를 일으키는 배롱나무에서 엄동설한을 견뎌내는 꿋꿋한 배롱나무로 변신시키는 것은 바로 고산지 시인이다.

 

저수지에 걸린 달

찻잔에 띄우고

죽봉(竹峰)을 바라보며

차 한 잔 마시게나

 

댓바람 소리

솔바람 소리

맑고 청량한 기운 만끽하며

함께 어우러져 차 한 잔 마시게나

 

자네 없이도

세상은 돌아가니

좌(左)로나 우(右)로나 치우치지 말고

우리 함께 어우러져 차 한 잔 마시게나

 

삼매(三昧)의 기이한 향(香), 음미하면

세상의 모든 잡념 사라지나니

자네, 이리 와

차 한 잔 마시게나, 차 한 잔 마시게나

- 평화다원(平化茶園)에서 전문

 

첫 연의, 저수지에 걸린 달 / 찻잔에 띄우고 죽봉(竹峰)을 바라보며 / 차 한 잔 마시게나 는 참으로 여유롭고 멋스러움이 넘치는 시다.

 

그러나 3연에 오면

 

자네 없이도 / 세상은 돌아가니

좌(左)로나 우(右)로나 치우치지 말고

우리 함께 어우러져 차 한 잔 마시게나

 

이분법적으로 극심하게 편 가르기 하는 이 시대에 보내는 경고이다. 현대인들은 찻잔에 달을 띄우며 차를 마실 여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진한 향을 풍기는 아메리카노 커피를 허겁지겁 마시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는 불행한 일이다. 한 걸음 늦춰가며 상선약수에서 길어 올린 물로 차를 마시자는 것이 정화다소(丁火茶所)편의 시들이다.

 

다산등(茶山嶝)에

산정(山亭)을 짓고

동백나무로

치소(治所)를 가리었네

 

적송 그늘에 푸른 이끼

방천 둑길 따라

추강의 깊은 수심

하염없이 흘러가네

 

창현(彰顯)한 석양빛

기다리는 습독공(習讀公)

풀벌레 울음에도

마음이 상하네

- 차뜽(茶嶝)의 전설 전문

차뜽이라 일컫는 평화촌 다산등에는 장흥 위씨 오현조의 위패를 모신 하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판사공의 현손인 습득공은 지방 관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외면하고 조선의 반골적인 성향의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동백나무로 치소를 가린 산정제에서 강호제현들과 함께 술과 차를 마시며 시를 읊었다. 이때 만난 인물이 추강 남효은이다. 소릉복위 상소를 올리고 전국을 떠돌다 장흥에서 오래 머문 추강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부관참시까지 당한 선비였다. 습독공은 추강의 깊은 수심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창현한 석양빛

기다리는 습득공

풀벌레 울음에도

마음이 상하네

 

습득공의 모습은 고고함을 넘어 처연한 비장감마저 넘친다. 다산등의 산정제(山亭齊)에 얽힌 고고한 선현들의 얼을 고산지 시인은 한 편의 시로 엮어낸다. 석양노을이라는 시각성과 풀벌레 소리라는 청각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비감한 풍경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특히 시에 있어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은 동선에서 움직인다. 어떤 면에서 시의 시제는 파괴 되어 무의미 하다. 다산등에 산정을 짓고(과거), 치소를 가리고(현재), 깊은 수심 흘러간다(미래). 치소를 가린다는 것이 현재형인지 과거형인지도 불분명하다. 의도적인 배열일수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다. 특히 역사가 있는 사물을 소재로 할 때 이런 시제의 파괴(또는 의도적인 배치)현상은 두드러진다.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있는 듯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진다던

차 버러지 다산옹은

좋은 차 얻기 위해 염치마저 버렸네

 

물 끓이는 흥취를

게눈, 고기 눈으로 비유하며

옛 선비 흥취를 부질없이 즐긴 사이

왕실의 진귀한 차 거덜 났단 핑계로

부끄러움 무릅쓰고

차를 보내달라 애걸하네

 

새 샘물 길어다가 불 일어 달인 차 맛

신령께 바친 백포의 맛이라던 다산옹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라면서

한 줌 몰래 보내주라 복걸하네

- 다산옹(茶山翁)에게, 걸명소(乞名疏)에 부쳐서

 

걸명소란 다산정약용(1762-1836)선생이 유배시절에 아랑 선사에게 차를 보내주길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 글이다. 이를 한편의 시로 엮어낸 고산지의 시는 고려 가요처럼 유장하다. 그의 시가 현대적 감각으로 와 닿는 것은 차를 끓이고 마시는데 따른 달관의 경지를 현대 감각으로 형상화 했기 때문이다. 좋은 차 얻기 위해 염치마저 버리고 왕실의 진귀한 차 거덜 났다고 과장하며 “다산옹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라며 한 줌 몰래 보내주길 복걸하는 모습”에 이르면 빙그레 웃음을 자아낸다. 사물에 농할 줄 아는 이런 표현은 우리 가사의 큰 맥이다.

 

예 마리오, 이게 누구당가

 

상선약수 마을 평화리는 고려시대(918-1392) 억불산 봉수대를 관리하던 병정들이 거주하던 정화소(丁火所)의 소재지며 장흥고씨(또는 장택고씨)의 세거지(世居地)이기도하다.

 

웃사장 지나서

동산을 끼고 돌았네

 

인적 사라진

잡초 무성한 고삿길

 

늙은 팽나무 한 그루

게으름을 피우다 나를 반기네

 

“언제 왔능가?”

 

대바람 소리

솔바람 소리

배롱나무 가지 흔들고

 

삔츄랑 때까치

산비둘기 날아와서

 

“예 마리오 예 마리오

이게 누구 누구당가“

 

반가움에 노래하네

 

“이게 이게 누구당가?”

- 산선약수 마을에서 ※1 전문

 

7.5조로 이어지는 전라도 사투리는 그 억양이 바로 운율이고 빼어난 시다. 군더더기가 필요치 않다. “언제 왔능가, 예 마리오, 예 마리오, 이게 이게 누구당가” 산비둘기가 말한다. 그 뜻을 다 알아차리지 못한 외지인이라도 정겹고 반갑고 얼싸안아 주고 싶다. 왜 그럴까, 언어는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에서 생성됐기 때문이다. 바람 속으로 들어가면 고향으로 가는 웃사장이 있고, 팽나무와 배롱나무 그리고 삔추, 때까치가 있기 때문이다. 고향은 그리움의 보고(寶庫)이다. 고산지 시인은 고을과 마을 저편에서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는 우리의 하늘과 바람과 그리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상선약수의 물소리를 움켜쥐고 아름다운 시들을 빚어내고 있다. 다음 세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귀한 것들을 발굴해서 빚어내는 토기장이가 바로 고산지 시인이다.

 

하늘과 별에 새기는 전설과 설화들

 

상선약수 마을의 시는 제1부 송백정편(宋白井篇), 제2부 정화다소편(丁火茶所篇), 제3부 고을과 마을편(故鄕,村落篇), 제4부 전설과 설화편(傳說,說話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마을의 역사와 관련된 시들이다. 어느 한 편도 역사와 관련되지 않은 시가 없다. 좁혀서 보면 장흥의 상선약수 마을로 국한되고 있지만 근세 100년 아니 고려 이후의 우리 역사를 넘나들며 편편을 엮어낸 고산지 시인의 치열한 역사 정신과 해박한 역사 탐구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역사라고 하더라도 이것들이 시로서 고도의 상승 작용을 거치지 않으면 시(詩)가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고산지 시인은 치열한 역사탐구와 빼어난 미적 탐구로 이를 성공적으로 살려냈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고산지 시인의 시가 자연친화적이며 또 어떤 때는 물과 바람과 배롱나무가 어우러져 타의 추종을 허하지 않는 아름다운 역사시로도 자리매김했음을 살펴봤다. 그런데 제4부 전설과 설화편에 오면 장대한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겸허해 질 수밖에 없다.

 

우복천 시린 샘물

표주박에 떠올리자

떠올린 표주박에

초승달이 담겨 있네

- 우복동 ※1에서

 

우복동의 샘물에서 떠올리는 표주박에 초승달이 담겨 있다. 그래서 고산지 시인은‘우복동 이상향 예 아니면 어디일까!’ 노래한다.

 

강산이 변하고 수몰된 소배지

떠돌던 십승지 흰 구름이 되었네

전설이 된 우복동

저수지에 떠 오르네

우복동 ※2에서

 

저수지에서 전설이 된 우복동이 떠오른다. 시는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언제나 한복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삼국지를 즐겨 읊던 삼국지 할머니

6년 만에 상봉한 막내아들 부여안고

어두워진 두 눈이 보이기 시작했네

- 영암 할머니에서

 

고산지 시인은 교회 장로이다. 모자 상봉의 기쁨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막내아들 상봉으로 어두워진 두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노래하는데 하나님이 내리신 축복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

 

눈물보다 서러운 것이

자식들의 무관심이었음을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아들은

당신을 불러봅니다

- 사모곡 ※1에서

 

사모곡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던지는 따끔한 메시지이다.

 

무계 고영완을 노래한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나 국로 고재환을 노래한 「나라의 상앗대가 되어서」등은 근세 이후의 장흥 지역의 인물을 노래한 시다. 이 시들은 장흥의 역사이자 장흥의 하늘과 땅에 각인된 아름다운 노래다. 고산지 시인은 하늘과 별 그리고 구름 위에 전설과 설화들을 모아서 한편 한편 시로 엮었다. 이제역사 속에 묻혀있던 원광석을 채광하여 보석으로 연마하는 고산지 시인이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