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13>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가우디와 피카소 편 - 고 산지
"가우디는 바그너와 세잔 및 그 외의 예술가과는 반대로, 바르셀로나에서 혼자 혁명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지도 위에 카탈루냐의 위치를 표시하듯 미술사에서도 카탈루냐 지방의 위치를 표시함으로서, 다른 국가와 다른 분야의 천재들이 했던 모든 것, 앞서간 예술가들이 했던 모든 노력을 단 혼자의 재능으로 일궈낸 가우디를 발견하게 된다." - 푸란스시코 푸욜
1926년 6월 7일 전차에 치인 가우디는 3일 후인 10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이면서, 실내 디자인과 장식 조각, 심지어 의자와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예술가이다.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는 우아하고 기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를 건축에 사용한 그의 '집'들은 피카소의 그림과 견줄 수 있는 건축 작품이다. 그의 거대한 영혼과 작품은 당대보다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의 건축물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건축은 인간이 살아가는 실용적인 공간이다. 벽에 걸어두고 보는 그림이 아니고, 음반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지만, 가우디는 건축물을 보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내가 공간을 느끼고 보는 재능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주물제조업자였기 때문이다.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건축가인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주물제조업자는 표면으로 부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타고난 유전자 덕분이라고 밝힌다. 가우디가 ‘가우디 건축의 성지’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로 간 것은 17세이며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가우디가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는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생계를 위해 철 세공업과 같은 일을 시작했다. 이같은 경험이 가우디 건축에 다 녹아 들어간다. '구엘 별장' 정면의 철제문은 철 세공품이다. 철문을 장식하고 있는 용의 몸체는 휘어진 철봉으로 표현하고 굵은 용수철을 휘감았다. 용의 다리들은 돋을무늬로 세공한 비늘이 덮고 있고, 왼쪽 발에 움직이는 연접 장치를 하여 문을 여닫도록 만들었다. 주물제조업자인 선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그의 표현이 딱 맞아떨어진다.
가우디의 영원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구엘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구엘은1878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에서 가우디가 설계한 곤잘로 코메야(Gonzalo Comella)의 장갑 진열대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우연히 들른 에두아르도 푼티의 작업장에서 가우디의 책상을 본 구엘은 가우디의 탁월한 능력을 확신하게 된다. 이 후 구엘은 성당에 어울리는 가구의 디자인을 돈 많은 후작 등에게 주선해주는 등 여러 방면으로 가우디의 작품을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에우세비 구엘 바시갈루피(Eusebi Güell Bacigalupi)는 가우디보다 여섯 살 연상의 벽돌 제조업자로서 남작의 작위까지 받은 성공한 사업가였다. 푼티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진 갑부 구엘과 예술가 가우디의 각별한 관계는 1918년 구엘이 죽기까지 40년 동안 계속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Medici) 같은 재력가 집안에 의해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처럼 예술적 안목과 재능을 겸비한 재력가 구엘은 자신의 열정을 가우디를 통해 구현했다.1883년 구엘 가문의 건축가로 임명된 가우디와 구엘의 인연은 35년 동안 계속되었다. 가우디는 「구엘 궁전 Palacio Güell」과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납골당 Cripta Colonia Güell」「구엘 공원 Park Güell」「가라프의 구엘 포도주 저장고 Bodegas Güell」 등 구엘 가문에 속한 모든 건축에 참여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간이며, 손상된 인간이다." 가우디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말년에 가우디는 건축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다. 건축가로서의 명성과 열정이 종교적인 신성과 결합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건축물은 가우디 사후에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가우디는 성가족 교회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세 개의 파사드를 만들었다. 동쪽은 탄생의 파사드, 남쪽은 영광의 파사드, 서쪽은 수난의 파사드이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첨탑이 빠진 탄생의 파사드만 완성된 상태였다. 이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이다. '사랑, 믿음, 소망'이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는 문 앞에 서 있는 가우디를 상상한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 게르니카의 시장터는 장 보러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오후 4시경, 독일의 하인켈 111형 폭격기, 융카스 52형 폭격기, 하인켈 51형 전투기 등으로 구성된 비행편대('콘도르 부대'라고도 불렸다)가 게르니카 상공을 낮게 비행하면서 폭탄을 투하했다. 프랑코의 지원요청이 있자, 히틀러는 창설 중인 독일 공군의 신병기 실험장으로 이용하자는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독일 공군 '콘도르 부대'는 편대의 구성, 폭격 및 기총 소사 방법, 각종 폭탄의 성능 등을 게르니카에서 실험했다. '콘도르 부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공군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독일 공군의 폭격 및 기총 소사로 게르니카는 순식간에 불타버렸다. 눈에 띄는 건물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과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향하여 퍼붓는 기총 소사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다. 집과 건물이 무너지고 거리마다 잿더미가 쌓이는 바람에 도로의 대부분은 통행이 불가능했다. 생존자들은 불에 탄 시체들을 도로에서 치웠다. 가족과 이웃의 시체를 치우면서 모두들 울먹였으나 널부러진 시체가 워낙 많아 감당할 수 없었다. 곧바로 진주한 프랑코군 병사들은 시체를 모두 모아 소각해버렸다. 독일 공군의 만행이 저질러진 뒤 게르니카의 끔찍한 참상이 전 세계에 전해졌지만 프랑코 측은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몇 주일 뒤 영국의 조사단이라는 사람들이 들어왔으나 시체는 이미 소각되고 없었다. 조사단은 무너져내린 게르니카 시가지를 간단히 둘러본 뒤,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게르니카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방화되었다."
파리에 거주하던 화가 피카소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의뢰받았다. 게르니카의 폭격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화가의 모델'이란 원래 구상을 접고 게르니카의 폭격을 주제로 한 작품을 한 달 만에 완성했다. 가로 7.8미터, 세로 3.5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게르니카〉는 흑색과 회색이 기조를 이루고 있으며 핏빛인 붉은색은 사용되지 않았다. 죽은 어린 아들을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도움을 구하는 남녀, 상처입고 울부짖는 말, 칼을 쥐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 찢어진 깃발과 부러진 칼, 무심한 눈빛의 소 등을 표현한 이 그림에는 전쟁과 파시스트에 대한 피카소의 증오와 분노, 강한 의지가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게르니카 폭격 소식의 충격과 맞물려 이 그림은 전시 직후부터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 측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게르니카〉는 피카소와 함께 고국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게르니카〉는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 전시된 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전시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1973년 피카소는 "스페인에 민주 정치가 부활되는 날에 〈게르니카〉를 스페인 땅으로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게르니카〉는 1975년 11월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야 비로소 조국 스페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피카소는 1881년에 스페인 남부의 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는 피카소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14살인 피카소를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 시험에 응시하게 했다. 피카소는 이 시험에서 한 달 걸려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단 하루 만에 그려내어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19세 되던 1900년에 그는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로 갔다. 그러나 피카소는 파리에서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을 짙푸른 청색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가 바로 피카소의 '청색 시대(1901~1904)'이다. 이 시대의 작품에서 피카소는 차가운 느낌을 주는 청색으로 고통과 비참함, 그리고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1904년, 23살의 피카소는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인 일명 '세탁선'에서 살았다. 자유분방한 피카소에게는 이러한 환경이 새로운 예술을 위한 풍부한 아이디어와 창조력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다. 이를 토대로 피카소는 자신감이 넘치는 '장밋빛 시대(1904~1906)'를 맞이하는데, 이 시기를 일명 '어릿광대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그는 광대나 여성 곡마단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인상주의나 사실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중, 인류사 박물관에서 흑인 미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생명력에 매료되었다. 흑인미술의 원시적이고 원색적인 표현기법에 깊은 감명을 받은 피카소는 입체주의(큐비즘)를 탄생시켰다.〈아비뇽의 처녀들〉(1907)은 바로 흑인 미술의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기하학적인 감각을 토대로 반 장방형의 눈, 원주코 등 새로운 조형 세계를 표현한 큐비즘의 대표작이다. 그는 지극히 복잡한 다원적 공간을 아주 단순하고 축소된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창조해내어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의 입체주의는 시각 미술, 영화, 건축을 포함한 모든 예술 장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끊임없는 실험 정신으로 도자기, 조각, 연극, 시 등 예술 세계의 폭을 넓혀나간 피카소는 1973년, 남프랑스에 있는 별장에서 9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