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산티아고 전설 편 -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차아서 * 11>

高 山 芝 2019. 2. 24. 20:22

 * 본 기행문은 주간한국문학신문에  연제되었읍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차아서 * 11>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산티아고 전설 - 고 산지

 

산티아고 순례길이 여러 루트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산티아고의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마치는 800여 km의 순례길이다. 이 길을 ‘Camino de Santiago’라 부른다. 전승에 의하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 사도는 스페인에 복음을 전파했으며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한지 800여년이 지난 후 야고보의 무덤이 '콤프 스텔라(별들의 들판)'에서 발견되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유럽의 사학자들은 야고보가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정하면서, 야고보와 스페인의 관계를 전설 수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의 무덤이 발견된‘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도시이름이다. 이곳에서 야고보의 시신이 발견되자 교황 레오 3세는 이 곳을 성지로 지정했다. AD 814년, 산티아고 대성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당이 그의 무덤 위에 건설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카톨릭의 3대 순례지중 하나가 되었다. 순례자들은 망토와 지팡이, 그리고 야고보를 상징하는 조가비모양의 모자나 장식을 단 전통적인 복장으로 장장 80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 이상 걸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야고보 사도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까지 가서 선교 했으나, 7명밖에 전도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헤롯왕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다.(야고보 사도가 순교당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온다.) 야고보 사도의 두 제자는 스승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배에 태웠다. 스페인 해안을 강타한 폭풍으로 야고보의 시신을 실은 배가 난파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조가비에 쌓인 그의 시신이 스페인의 이리아 풀로비아(파트론)에서 발견되었다. 이 후 야고보 사도의 시신을 보호해 준 조가비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땅 끝이라던 서바나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던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끝내 서바나에 기자못하고 로마에서 순교당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바울의 선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순교한 야고보 사도의 스페인 선교와, 시신이 옮겨지는 과정 및 8백년 후에야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전설은 신빙성이 없다. 이는 중세의 성인 유골 수집과 숭배가 빚은 과열된 신앙의 결과물로 판단된다.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에 있는 예수의 수의, 토리노 수의라 불리는 이 유물을, 카톨릭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라고 믿었다. 천에는 음영처럼 머리와 전신이 드러나 있고 가시 자국과 채찍에 맞아 찢긴 상처들도 선명했다. 1354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성물로 지정한 이 수의는, 1988년 방사성동위원소 측정 결과 예수시대의 것이 아닌, 14세기의 것으로 판명이 났다.

 

중세시대 ‘모하멧의 팔’을 앞세운 무어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당시 카톨릭으로서는 ‘모하멧의 팔’에 필적할만한 스토리 텔링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나서,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의 무어족 군대를 무찔렀다. 이때 열세에 있었던 전투에서 울려 퍼졌던 “산티아고, 돌격하라, 스페인이여(Santiago y cierra, España)”라는 구호는 이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스페인 군대의 정식 공격명령으로 사용됐다. 이 때문에 야고보 성인은 ‘마타 모로스(무어인을 죽인다는 뜻)’로도 불리게 되었고, 신대륙 정복 시에는 ‘인디오들을 물리치는 산티아고’의 모습으로 바뀌어서 스페인 병사들을 독려하는 수단이 됐다. '무어인 살해자'로 알려진 성 야고보의 이름에서 따온 산티아고 기사단은 아래쪽 끝부분이 뾰족한 칼처럼 장식된 붉은 십자가를 패용하고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으며 이교도들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스페인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일곱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그 중 두사람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두사람의 제자는 아타나시오와 테오도로 이다. 야고보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자, 야고보의 능력을 꺾기위해 주술사 헤르모게네스는 자기의 제자 필레토스를 야고보에게 보냈다. 그러나 필레토스는 스승 헤르모게네스에게 돌아와서 “저는 이제부터 야고보의 제자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받겠읍니다” 라고 말했다, 격노한 주술사는 “ 야고보가 어떻게 너를 구하나 보자” 하고 필레토스에게 쇠사슬에 묶이는 저주를 걸었다. 소식을 들은 야고보가 본인의 손수건을 보냈다. 사도의 손수건을 본 필레토스는 주문에서 즉시 풀려났다. 주술사는 다시 악령들을 모아 야고보에게 보냈다. “ 야고보와 필레토스를 묶어서 데려오라” 그러나 악령들이 오히려 온몸이 불에 타는 쇠사슬에 묶였다. 야고보 사도가 악령에게 말했다. “ 천사들이 너희 쇠사슬을 풀어 줄 것이다. 가서 헤르모게네스를 데려오되, 그의 몸을 해하지않도록 하라” 악령들이 데려온 주술사의 사슬을 필레토스가 풀어주자, 야고보사도가 말했다. “너는 자유다. 이제 떠나가라 ” 주술사가 말했다. “악령의 분노가 두려워 떠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몸에 지닌 물건을 징표로 주십시오.” 야고보가 그의 지팡이를 주었다. 헤르모게네스는 자신이 갖고있던 주술에 관련된 모든 물건을 바다에 버렸다. 주술사를 개종시킨 사건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야고보 사도에게 세례 받기를 원했다. 위협을 느낀 제사장 아비아달이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헤롯 아그립파 왕에게 끌고 왔다. 왕은 야고보 사도의 참수를 명했다. 형장에 끌려가던 도중 앉은뱅이가 외쳤다. “야고보 사도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야고보 사도가 기도하자 앉은뱅이가 일어섰다. 이에 놀란 율법학자 요시아스가 야고보 사도의 무죄 를 주장했다. 요시아스도 야고보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갔다. 참수 직전 야보보는 요시아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은 함께 목이 잘려 순교했다. AD 44년, 야고보의 제자 아타나시오(Atanasio)와 테오도로(Teodoro)라는 두 제자가 참수당한 야고보의 유해를 훔쳐서 배에 실었다, 바람과 성령의 인도하신대로 맡기고 항해하여 도착한 곳이 산티아고에서 20k 떨어진 페드로 곶. 이리아 플라비아(Iria Flavia -현 파트론 항구) 해초와 가라비가 많은 해안가였다. 이때 천사들이 나타나 물길을 안내하고 육지에 도착한 그의 유해는 조개껍질들이 둘러싸서 보호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사도의 시신을 편안한 곳에 안장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땅은 루파 곧 “암이리”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우선 스승의 시체를 바위 속에 숨기고 루파 여왕을 찾았다. 당시 콤포스텔라 지역을 통치하던 다신교의 여왕인 루파(Rupa)를 찾아가서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루파 여왕은 이들을 두요스(Duyos)왕에게 보냈다.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했던 듀요스 왕은 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들이 나타나서(다른 전설 :반짝이는 뿔빛이 나타나) 이들을 풀어주었다. 두요스 왕이 군사를 풀어 이들을 추격했다. 제자들이 강을 건너자 기적이 일어나 추격하는 군사들이 급류에 휩쓸려 모두 죽었다. 제자들은 야고보의 유해를 바위 위에 임시로 안치했으나, 이 지역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첬다. 제자들은 다시 루파 여왕을 찾아가서 묘지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여왕은 먼 산을 가리키며 저 산으로 가서 야생 황소들을 찾아 그 야생황소에 수레에 매달아 성인의 관을 싣고 가서, 적당한 장소에 묻으라고 했다. 루파 여왕은 야생 황소가 수레를 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말을 하었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수레에 관을 메단 야생황소가 스스로 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이에 놀란 여왕은 마침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모든 겔트족의 숭배장소인 제단을 헐어버리고 야고보의 유해를 자신의 궁궐 성벽 내부에 묻으라고 했다.

 

AD 813년 은수사 펠라요(Paio-성당지기)가 이리아 플라비아의 주교인 테오도미르(Teodomiro)에게 리브레돈(Libredon - 콤포 스텔라 기원이 되는 장소이자 “별들의 대지”라는 의미)산에서 기이하고도 강렬하게 반짝이는 불빛이 있다는 보고를 했다. 그리고, 잡초가 우거진 떡깔나무 옆에 있는 돌제단을 발견했다. 제단에서 발견된 3가지의 유물 중 하나가 팔 아래 머리가 있는 참수형 시신이였다, “여기 제배데오와 살로메의 아들인 산티아고가 잠들어 있다”라는 표식 양피지까지 있었다. 주교는 신의 계시에 따라 이 유골들이, 야고보(산티아고)와 아타나시오, 테오도로(두 제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사실을 갈라시아와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왕이었던 알폰소 2세(카스토 Casto)에게 전했다. 제단을 방문한 알폰소 2세는 산티아고 사도를 갈라시아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했다. 그 자리에 장차 현재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될 경당이 세워졌다. 이후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온 유럽에 퍼젔다 수많은 기독교들이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를 보기위해 순례길에 나섰다. 그리고 이는,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야고보의 유해가 진짜인지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학자들은 갈리시아 지방에서 3세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유적이 발굴된 바가 없으며, 유해가 발견된 장소가 켈트족, 로마, 수에브족, 서고트 시대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유해가 매장된 공동묘지였으므로 무덤의 진위와 야고보의 생전 전교 활동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아스투리아스 왕가가 야고보의 무덤을 서둘러 승인한 것도 당시 이슬람 지배하의 톨레도 교회에 대한 반감과 코르도바를 근거지로 했던 이슬람 왕조에 대한 적대의식, 그리고 성인의 무덤발견을 계기로 유럽의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들로부터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욕구 등 정치, 외교적인 이유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이미 9세기 후반부터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1122년 교황 칼리스토 2세가 산티아고의 무덤을 공인하게 되면서 유해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일단락 됐다. 하지만 이 또한 십자군 전쟁의 와중에 이슬람세력에 의해 예루살렘 순례길이 차단됨으로써 대체 성지의 필요성이 절박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합리적인 근거에 의한 공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구전에 의하면 1589년 5월 콤포스텔라시를 위협하는 아 코루나 항구에 정박한 해적들의 유해 도굴을 피해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를 숨겼다. 산티아고 사도의 유골의 흔적이사라진 후, 유해 재발굴은 경당 밖 제대 후미 안쪽에길이 99cm 넓이 30cm 의 비밀장소에 숨겨젔다는 사실을 알아낸 19세기 후반에 이루어 젔다. 1884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거 정식으로 산티아고 사도의 유해가 두 번째로 인정되었다.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의해 점령되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성스러운 해 곧 산티아고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이 되는 해에 산티아고로 순례를 가면 지은 죄를 완전 사해주고, 다른 해의 순례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 받는다고 대사를 선언했다. 그 뒤 기독교인들에게 콤포스텔라가 가장 유명한 순례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인 순례자가 많았는데, 자발적인 경우도 있지만 저지른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순례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야곱(Jacob)을 우리말로는 야고보, 영어로는 제임스(St. James), 불어권에서는 자크(Saint Jacques), 독어로는 야코프(Jakob), 스페인어권에서는 산티아고(Santiago)라 부른다. 신대륙에 이주한 에스파냐인들은 야고보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몇 개 도시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가장 유명한 도시는 현재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이고, 그밖에 쿠바와 도미니카공화국에도 산티아고라는 도시가 있다. 야고보는 에스파냐만이 아니라 영국과도 관련이 있다. 런던 중심가의 패션 지구를 세인트제임스('성 야고보') 거리라고 부른다. 헨리 8세의 왕궁이 있던 곳이다. 헨리 8세는 세인트제임스라는 아주 오래된 나환자 병원의 터에 궁궐을 지었다. 지금 이곳은 왕궁이 아니지만, 영국에 오는 외국 대사들은 공식적으로 '세인트제임스 궁정'을 방문했다. 모르몬교도(말일성도)들은 야고보가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모르몬교의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