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 빛은 동방으로 > - 연자시편 -한국문학신문 2019년 3월 6일 제392호

高 山 芝 2019. 3. 9. 14:13

< 빛은 동방으로 > - 한국문학신문

 

예수의 이인격설(二人格說) 주장한 말씀을

마리아 신모설(神母說) 부정한 말씀을

이단으로 정죄한 에배소 공의회(431년)

 

로마군대 동원하여 네스토리안(Nestorian) 박해했네

말씀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였네

 

페르시아에 망명하여 안주(安住)했으나

조로아스터교도와 이슬람교도

복음을 전파하자 핍박하였네

 

말씀의 디아스포라

중앙아시아 가로질러

실크로드 따라서 장안에 도착했네(635년,태종 9)

 

당나라 수도 장안에 남아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781년)

이렇게 기록했네, 경교를 추앙했네

 

“ 진상(眞常)의 도(道) 현묘하여 이름짓기 어려우나

공덕과 효용이 뛰어나게 밝으니 경교(景敎)라 하였다“

 

경주에서 출토된 석제 십자가

동제 십자가와 마리아 관음상(1956년)

신라의 얼이 베인 말씀의 형상이네

 

경교(景敎)의 흔적이네

이 땅을 찾아온 복음의 자취이네

 

동방교회의 분열들은 기독론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기독론 논쟁의 주 논점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에 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이견에서 비롯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로고스와 인간의 육체의 결합으로 이해한 것이지만, 안디옥의 기독론은 로고스와 인간의 영과 육체 모두와의 결합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하여 단성론과 양성론의 차이로 발전되었다.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론을 주장하였던 아폴리나리스가 정죄되면서 양성론이 기도교의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431년의 에베소 공의회에서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며 안디옥 출신 네스토리우스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두 개의 위격(位格)이 따로 있으며, 마리아는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다”는 기독론이 문제가 되었다. 문제를 삼은 측은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자 신학자였던 시릴이었는데, 그는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잉태자'라는 당시의 일반적 표현을 뒤엎고 '그리스도의 잉태자'로 표현한 것을 문제 삼았다. 네스토리우스는 '하나님의 잉태자'라는 말이 자칫하면 기독론을 단성론적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고 보았지만, 당시 상황에서 마리아의 호칭을 변경한 것은 신학적으로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시릴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로마의 감독을 자신의 정치적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결국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파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릴은 자신의 정치적 승리의 대가로 신학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단성론적 기독론을 포기하고 양성론에다 '두 본성의 교류'라는 개념을 추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네스토리안이란 시리아출신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로 재직했던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시릴(Cyril) 일파에 의해 이집트에서 유배 중 사망하였다. 그를 따르던 네스토리안들은 로마교회가 보낸 군대의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로 망명했다. 그러나 로마와 적대적이었던 페르시아에 의해 수많은 네스토리안들이 픽박을 받았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이들은 잠재적인 적(로마)일 뿐 더러, 페르시아의 토착종교인 배화교(조로아스터교)와의 갈등이 주된 이유였다. 페르시아가 이슬람화 되면서 박해가 본격화되자 네스토리안들은 아라비아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일대로 흐터젔다.

 

635년 여러 명의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페르시아로부터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당 태종은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일행을 장안에 머물게 하여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게 하였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신앙 및 사상을 경교(景敎)라고 불렀다. 경교 신자들은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중앙 아시아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에서 왔다는 의미에서 파사교(波斯敎)라 하였고, 그들의 교회당을 '파사사'(波斯寺)라고 불렀다. 638년, 당 태종(太宗)은 장안에 파사사를 건립하여 승려 21명을 배속시켰다. 양귀비 때문에 유명해진 현종(玄宗) 때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파사교'는 '파사경교'(波斯景敎)로 부르다가 후에 '대진경교'(大秦景敎)로 통일되었다. '대진'은 로마의 중국식 이름이다. 781년(建中 2년), 당의 덕종(德宗)때 세워진〈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는 635년에서 781년까지의 경교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다. 비문에 의하면, 경교 신도를 경중(景衆) 혹은 경사(景士)로, 경교사원을 경사(景寺), 본존(本尊)인 미사가(彌師訶)를 경존(景尊)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경교'라고 부르게 된 이유에 대해, "그 공덕과 효용이 뛰어나게 밝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635년은 신라의 선덕여왕 2년, 고구려의 영류왕 18년, 백제의 무왕 36년이며, 경교의 중국 전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세워진 781년은 통일신라의 선덕왕 2년에 해당된다. 당시 당나라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에 비추어볼 때, 당나라 조정의 환영을 받으며 불교에 못지 않은 지위를 수 세기 동안 누렸던 경교 또한 신라에 커다란 영향을 키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문헌인 ≪속일본서기 續日本書紀≫ 성무천황기(聖武天皇紀)에는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1928년, 남만주에서는 경교도의 분묘와 7개의 와제(瓦製) 경교 십자가, 그리고 동방박사의 아기예수 경배도가 조각된 바위 등이 발견되었다.

 

1956년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유물 중 석제 십자가, 동제 십자가와 더불어 마리아관음상 등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의 경교전래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독교동점사(基督敎東漸史)의 권위자인 고든(Gordon,E.A.)이 우리 나라의 경교전래를 밝히기 위한 연구기념으로, 1917년 금강산 장안사 부근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비를 세웠다. 흑대리석이 아니고 백대리석인 점에서 원래의 비(碑)와 다르지만, 이것을 목사 김양선(金良善)이 탁본하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해 놓았다. 이러한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경교의 흔적때문에 기독교의 한국 전래는 통일신라시대로 소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학계에서는 나오고 있다. 경교(景敎)가 바로 기독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