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지의 戀子隨筆] 칠십이 되고서 - 금강일보 승인 2019.05.08 18:32
밤 송이 우엉 송이
다 끼어 보았네
기름진 가을 볕에
풋 똘기 아람 절로
마음 절로 떠도는
자유인(自由人)이 되었네 - 졸시, 칠순(七旬) -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서 유래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은 생명력을 잃고 빛바랜 언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나이 벌써 칠십이다. 70이라는 세월의 매듭을 풀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풍경들. 지난 70년 동안 나의 인생 여정은 기쁨과 슬쁨, 분노와 격정이 만들어낸 한편의 드라마였다. 나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나를 연단하여 훈련시킨 주재자의 섭리였다. 글을 쓰는 재능도 그 분이 주었고, 낯선 땅에서 방황을 하게 한 것도 그 분의 뜻이였다. 거칠 것 없는 나의 남은 시간,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몽당연필처럼 나의 재능을 모두 토해 내고 싶다
논어의 위정편에서 공자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인생관을 확립하였다.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는 들리는 말이 그대로 이해되었다. 일흔 살이 되자 비로소 마음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해도 법도를 넘지 않게 되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해도 어긋남이 없는 나이 칠십을 공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는 말로 대신했다. 이를 줄여서 우리는 종심(從心)이라고 한다. 공자가 종심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진다.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주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채나라 국경에서 뽕을 따고 있는 두 여인을 만나게 된다. 동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얼굴이 구슬처럼 예뻤고, 서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얼굴이 곰보처럼 얽었다. 공자가 혼자서 말하기를 "동지박 서지박(東枝璞 西枝縛-동쪽 가지는 구슬 박이고 서쪽 가지는 얽을 박)이네" 하였다. 그러자 서쪽 여인이 공자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건순노치 칠일절양지상 이백어면 천하명문지상(乾脣露齒 七日絶糧之相 耳白於面 天下名文之相-입술이 바짝 마르고 이빨이 톡 튀어나온 게 7일간 굶은 상인데, 귀가 얼굴색보다 흰걸 보니 문장만은 천하에 알려질 만 하겠군)이네.“ 무안을 당한 공자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러한 관상 때문에 공자는 채나라 국경에서 검문을 당했다. 자신이 노나라의 공자라고 말했으나 지긋히 그를 바라본 병졸은 ‘당신이 만약 노나라 성현 공자라면 보통사람과 다른 비범함이 있을 것이니, 구멍이 9개 뚫린 구슬을 명주실로 한번에 꿰어보라’고 했다. 공자는 연나흘을 끙끙댔지만 9개의 구멍을 명주실 하나로 꿸 수가 없었다. 공자는 '건순노치 칠일절양지상'이라 말했던 서지박 여인이 생각나서 제자를 보냈다. 뽕밭에 가보니 여인은 간데없고 짚신만이 뽕나무에 거꾸로 걸려있었다는 제자의 말을 들은 공자는 "계혜촌(繫鞋村)을 찾아가 보라"고 제자에게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계혜촌을 찾아간 공자의 제자는 서지박 여인에게 구슬을 꿸 수 있는 방법을 청했다. 말없이 여인은 양피지에 ‘밀의사(蜜蟻絲)'라는 세 글자를 써주었다. 양피지를 받아 본 공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꿀과 실과 개미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개미의 뒷다리에 명주실을 묶고 구슬구멍에 꿀을 발라 두자 하룻밤 사이 개미가 구슬을 다 꿰어 놓았다. 마침 그 날이 공자가 밥 한 끼 못 먹고 굶은 지 바로 칠일째 되는 날이었다. 옥문을 나서는 공자가 중얼거렸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인 것을...."
자신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뉘우친 공자는 왜? 구멍이 다섯도 일곱도 아닌 아홉 개 뚫린 구슬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공자는 70세에 비로소 그 이치를 깨우친다. 사람에게는 구공(九功)이 있다.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두 코로 향내를 감지하고, 입으로는 먹고 말하며, 두 구멍으로 배설을 한다. 이 아홉 개의 구멍에 막힘이 없는 것이 하늘의 도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범부인 나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는 못하지만, 공자의 인생에 감히 나의 삶을 대비해 본다. 나는 10대에 아버지를 잃고 가장(家長)이 되었다. 20대에는 시(詩)를 쓰며 세상을 걱정했으며, 30대에는 결혼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40대에 도산(倒産)하여 하나님을 만났으며, 신용불량에서 복권(復權)된 50대 후반부터 다시 pen을 잡았다. 남의 말이 들리기 시작한 60대에 장로가 되었고, 칠순이 된 나는 지금 몽당연필 한 자루를 들고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있는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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